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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 : 허수경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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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허수경
  • 출판사 : 난다
  • 발행 : 2015년 08월 12일
  • 쪽수 : 244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5463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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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걸어본다 05 뮌스터 - 허수경 에세이 [너 없이 걸었다]

    난다의 걸어본다 다섯번째 이야기, 허수경 에세이 [너 없이 걸었다]가 출간되었다. 시인 허수경이 독일로 이주하여 23년째 살고 있는 뮌스터를 배경으로, 그곳만의 사람들과 시간들을 독일 시인들의 시와 엮어 소개한다. 이 책은 에세이집이자 동시에 시집이자 역사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일이라는 나라를 다룬 총체적인 문화백과사전이다.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를 객관적으로 설명해내는 데 있어 시인의 사유는 깊고 그 문장은 미려하게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출판사 서평

    난다의 ]걸어본다[ 뮌스터
    허수경 에세이
    [너 없이 걸었다]
    너 없이 걸었다.
    시를 읽으며 걸었다.
    그러나 나는 당신 안에서 걸었다.

    당신과 나와 시詩, 그리고 뮌스터!


    난다의 걸어본다 그 다섯번째 이야기. 시인 허수경이 독일로 이주하여 23년째 살고 있는 뮌스터를 배경으로 그네가 천천히 걷고 깊숙이 들여다본 그곳만의 사람들과 그곳만의 시간들을 독일 시인들의 시와 엮어 술술 풀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매 챕터마다 그네가 번역한 독일 시인들의 시가 한 편씩 실리는데, 이는 그네가 알고 있고 알게 된 독일만의, 뮌스터만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꽤 요긴하게 쓰인다. 그네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는 그들의 시가 좁게는 기원전 6세기경에 시작되어 ‘도시’로 성장해가며 오늘날 인구 삼십만 명을 이룬 뮌스터를 테마로 삼고 있는데다 크게는 참혹한 전쟁을 겪은 독일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주요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뮌스터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벤치 한구석에 앉아 트라클의 시를 읽다가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리. 그대들도 그러리나, 그대들의 도시에 살면서 존재는 시리고 비리리라. 마치 어시장의 고무 다라이 속에서 갑자기 어느 손에 잡혀 시장 바닥에 던져진 혼자인 작은 졸복 한 마리처럼." (/ p.26)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이네, 트라클, 벤, 작스, 괴테, 릴케 같은 시인이 있는가 하면 한 번도 소개된 적 없는 그베르다, 아이징어, 호프만슈탈, 드로스테휠스호프 등의 낯선 이름도 그네를 따라 발음해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젤마 메르바움 아이징어'에게 관심이 간다. 우리가 안네 프랑크에게 관심을 두는 동안 철저히 외면당해온 소녀. 열여덟 나이에 전쟁병이라는 발진티푸스로 목숨을 잃은 소녀. 루마니아 체르노비치 출신의 독일계 소녀. 열다섯 살부터 쓰기 시작한 한 권의 시집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치고 죽은 소녀. 연인 피히만은 팔레스타인으로 떠날 운명이었고, 그는 제 운명을 예감한 듯 그 시집 원고를 소녀의 친구에게 맡겼다 한다. 피히만이 탄 배는 결국 침몰해버렸지만, 소녀의 친구 덕에 시집 원고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폴란드를 지나 헝가리로, 체코로,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지나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배를 타고 이스라엘로 가는 긴 여행 동안 친구의 배낭에 들어 있던 소녀의 시집 원고. 훗날 은행원이 된 친구 덕분에 소녀의 시집은 은행 금고 속에 오랫동안 보관될 수 있었고 독일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듯 긴긴 소녀의 사연을 길게 전하는 이유는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다.

    "선연히 저 벽돌담처럼 햇살을 받으며 내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들이 있는 어느 날. 마음의 지층 아래에서 숨쉬고 있었던 그 모든 것에게 붙일 이름이 있다면 그리움이라는 이름 말고 또 어떤 이름이 있으리." (/ p.117)

    한때 우리는 독일과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었다. 안으로야 어떤 변모를 앓고 있었을지 모르나 최소한 겉으로는 그랬다. 독일이 벽을 깨부수는 동안, 한국이 철조망을 조이는 동안 한국, 그것도 진주라는 소도시의 한 시인이 독일, 그것도 뮌스터라는 소도시로 학생이 되어 떠났다. 1992년의 일이었고 시를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동료들은 그네가 머잖아 돌아올 거라고, 그네는 한국을 떠나서는 못 사는 여인이라고, 특히나 우리말로 시 다루는 데는 타고났고, 우리 음식이라면 뭐든 척척 다 잘해내는데다 무엇보다 우리네 모든 글쟁이들을 무조건 덮어놓고 사랑하는 그네가 어떻게 독일 여인이 될 수 있겠냐며 돌아올 거라고, 그것도 일찌감치 다 때려치우고 금세 돌아오고 말 거라 했다지만 그네는 23년째 한국을 떠나 아직도 그곳에 있다. 몇 년을 더 보태면 인생의 절반가량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 된다. 지금 소개하려는 이 책은 어쩌면 그런 그네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열쇠구멍 혹은 바늘구멍 정도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분명하게 알 수 있던 건 그네가 몹시도 사랑하는 그곳이 여전히 한국이며, 독일 곳곳을 홀로 걷고 있으나 텅 빈 그네의 옆구리 대신 그네 마음은 여전히 그네만의 ‘당신’으로 꽉 차 있었다는 사실 정도랄까.

    [너 없이 걸었다]는 한 권의 에세이로 지칭되고 있지만 동시에 시집이자 역사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일이라는 나라를 다룬 독일만의 총체적인 문화백과사전이다.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를 객관적으로 설명해내는 데 있어 그 사유는 깊고 그 문장은 미려하다. 새로 산 하이힐 신은 발로 걷는 걸음처럼 조심스럽고 단정하기보다 오래 신고 적당히 닳은 운동화 신은 발로 걷는 걸음처럼 유연하면서도 자유롭다. 그럼에도 늘 하고자 하는 말의 축과 의지의 깃대를 찾을 줄 알고 흔들 줄 안다. "유혹하는 로렐라이. 시는 유혹하는 어지러운 글"이라고 했던가. 그럼에도 그네를 아름다운 나그네로 칭할 수 있는 데는 그네만의 사람됨을 우리가 익히 알기도 하는 연유다. 그네는 말하지 않았던가. "따뜻한 인간은 언제나 따뜻하게 닿는 거, 이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의 기반이지요."라고. 따뜻함, 인간, 닿음, 믿음, 기반, 이 말들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총 열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번 책에서 도저히 밑줄을 긋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한 대목들이 매 페이지마다 눈에 띠는데 이는 이방인으로, 점점 우리말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우리말을 고파하고 우리말의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그네의 고독이 빈번히 들키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네는 "낯섦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고 했다. "고독에는 대가가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네를 버티게 해준 건 무엇보다 ‘시’가 있어서라는 고백을 서두부터 서슴지 않고 해댔다. 그곳까지 가서 시라니, 그곳에서마저 시라니, "시를 통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풍경들. 그냥 그렇게 스쳐가는 이방의 순간들. 시들을 읽으면서 그 순간들이 갑자기 가슴에 먹먹하게 차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는 천생 시인 허수경.

    이 책은 우리에게 ‘인간’을 묻고 ‘삶’을 묻고 ‘별’을 묻고 ‘존재’를 묻고 ‘상처’를 묻고 ‘죽음’을 묻는다. 그네가 그네에게 던지는 자문인데 반복에 반복을 거듭할수록 읽어나가는 우리에게는 질문에 질문이 된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그네의 질문.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그대들이 있어서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다, 는 멜로디를" 흥얼거릴 줄 아는 그네. 사는 게 추하다 할지라도 시가 있어 ‘위로’를 배운다는 그네. 그런 그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은 또한 계속될 수 있을 거란 데서 희망을 배우게 하고, 사랑이 끝났으니 사랑했던 그 사람을 더는 볼 수 없음으로 절망을 배우게 한다. "그는 ‘너’를 발견했다. 그러자 그만이 쓸 수 있는 시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사랑은 그에게 언어를 주었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그네에게 ‘사랑’은 이렇게나 ‘시’로 다다. ‘시’로 전부 다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우리가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위로할까.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도시들은 우리를 안아주지 않았던가. 뮌스터는 그대 없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그 도시를 그대 없이 참 오랫동안 걸어왔다. 모든 평범한 이 세계의 도시, 혹은 저 하늘의 별들이 걷는 것처럼. (/ p.33)

    너를 생각하면서 걷는다. 너는 언젠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재중. 나는 너에게로 가고 너는 나에게로 온다. 이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향하고 있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 (/ p.76)

    "대충 잡아 열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에 당신은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까운 곳에 우리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네이기에 이 책에 담긴 한국의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음을 안다. 물리적 시간적 제약은 있으나 우리의 한 시대를 한 세대를 실시간으로 함께 살아내면서 그네는 우리와 함께 고통을 느끼고자 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치유방법이 없을까 늘 두리번거리는 또 한 명의 품성 넉넉한 대모를 자처해왔다. 어쩔 수가 없다. 그네의 눈에는 그 수가 보일 수도 있는 탓이렷다.

    희생된 이들에게 잊히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잊음을 독촉하는 사회가 비인간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일을 잊어버리면서 인간은 짐승이 되어간다. 그 짐승은 인간을 다시 억울한 구석으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담함을 주장하고 관철하려고 한다. 잊음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몸짓이다. (/ pp.91~92)

    우리는 잊히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뭔가를 철저하게 잊음으로 사라지게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반복되는 맹세는 얼마나 쉽게 우리가 잊어버리는지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 p.171)

    그네를 이야기하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손’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내민 그네만의 말 또한 손의 일환이기도 하지 않는가. 손은 손을 낳는다는 말은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만 굴러떨어져 깨어지는 불안한 유리잔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서로의 손을 맞으면서 두 인간 사이의 관계는 시작되고, 손은 서로 맞잡는 순간, 인간을 인간에게로 다가가게 만든다는 말이 된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 또한 손을 잡아주는 일이라는 말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긴다한들 무리는 없지 않을까. 서로에게 서로의 손이 안전하다 말해주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 평화가 아닌가. 이 거리에서 잡아야만 하는 당신의 손, 그 안전함. 그만큼 떨리는 내 손, 그 불안함.

    한 인간이 타인의 손을 잘 잡는 일은 사건이다. 일생에 진심으로 우리는 몇몇의 손을 잡았을까.

    다만 몇 손.
    다만 죽음과 사랑에 닿을 거라는 믿음에서 내민 손.
    그 울퉁불퉁한 노동으로 미워진 손.
    타인의 손을 끌어안고 차가운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있는 이들은 이 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리라. (/ p.176)

    아직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너에게로 가지 못할 이유가, 내 속을 다 걸어보지 못한 이유가 있다는 그네의 이야기를 우린 아무래도 반복해서 읽어봐야 할 듯하다. 아니 그래야 알 듯하다. 그네만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그 진심을.

    추천사

    우리는 그녀에게 뎅크말일까, 만말일까.(*독일어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무언가를 기리는 기념물을 뜻하는 말로 뎅크말Denkmal이 있고, 어떤 부정적인 사건을 경고하는 기념물이라는 뜻을 가진 만말Mahnmal이라는 말이 있다.)

    뮌스터에 가면, 한 동양 여인이 당신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길을 걷는다. 이미 여인의 마음에는 수놓듯 맨손으로 만든 뮌스터의 지도가 있다. 죽은 사람들, 폭격당한 도시, 그리고 사라진 시들이 있는 지도다. 지도에 그려진 길은 인간의 역사. 그 길은 모럴이 없는 역사다. 누가 역사의 정의를 말했던가. 우리는 그저 뎅크말과 만말을 새겨서 그 앞에서 묵념할 뿐이다.

    낭패한 도시와 사라진 사랑에 대해 허수경이 존댓말로 묻는다. "움직일 수 없는 단 하나의 말은 무엇일까요."

    뮌스터가 다 무엇이야. 그이를 만나러 가고 싶을 뿐. 추천대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서 기차를 타고 가리라. 진주의 방언으로 그이를 만나리라. 핀쿠스 황금맥주를 마시며 푸른 반지를 끼고, 눈에 물기 많은 여인과 신 철기시대의 마지막을 함께 보리라. 시를 읽어도 좋겠다. 우연인 듯, 대부분 요절한 시인들의 시를 낭송하리라. 빵 굽는 오븐처럼 따뜻한 밤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시간은 밤공기에 흩어지고 뮌스터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쓸쓸히 자취방으로 사라지는 시인의 뒷모습.

    시인은 마치 우리가 뮌스터를 걷는 듯, 상세하게 이 도시를 풀어놓고 있다. 도시의 골목, 기념물,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들. 책장을 덮었다. 뮌스터의 지도는 그이가 몰래 밤마다 마음에 새긴 조국의 지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밤마다 암호로 보낸 통신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슴을 친다.
    - 박찬일 / 요리사·칼럼니스트

    목차

    prologue
    1│어느 우연의 도시
    2│기차역에서
    3│칠기 박물관 앞에서
    4│뮌스터의 푸른 반지
    5│츠빙어Zwinger에서
    6│소금길, 그리고 다른 길들-멀고도 가까운 전쟁
    8│중앙시장과 옛 시청
    9│대성당과 그 주변
    10│루드게리 거리와 쾨니히 거리에서
    11│뮌스터아 강을 따라서 걷기 1
    12│뮌스터아 강을 따라서 걷기 2
    13│아호수에서
    14│쿠피어텔에서 프라우엔 거리
    epilogue

    본문중에서

    김밥은 잘 정돈된 혼돈을 뜻한다. 김밥에 말려진 재료들은 강, 바다, 들판에서 온 것들이다. 채소, 어묵, 햄, 그리고 간을 한 밥. 이 모든 것들은 소금에 섞이면서 혼동을 갈무리하며 김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김밥은 소금이 몰고 오는 혼동이 자물린 차가운 시간을 뜻한다. 소금을 친 음식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더운 시간 속, 소금은 그냥 널브러져 있다가 음식이 차가워지면 진면목을 드러낸다. 절여진 시간이 입안으로 들어올 때 얼마나 짜고 쓴지 우리는 알지만 그 유혹을 차마 떨치지 못한다. 삶의 짠맛을 보기 위해 우리는 기차역으로 간다. 기차 안에서 김밥을 먹으며 자주 목이 막히고 떠나오던 기차역이 자꾸 눈에 어른거리는데도 말이다.
    (/ pp.41~42)

    뭘 그려?
    그냥...... 네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그려달라고 말하는 소녀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꽃이 가득 핀 마당에 서 있는 작은 집을 그렸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분주하게 오가며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여자들을 그렸고 여자들 앞에서 구슬치기를 하는 아이들을 그렸다. 작은 구름 같은 연기가 나오는 굴뚝을 그렸고, 그 옆으로 날아가는 새를 그렸다. 그림 그리기를 마치자 소녀는 나에게 말했다.

    창문 앞에 호두나무 한 그루도 그려줘.
    왜?
    겨울이 오잖아, 다람쥐도 먹을 게 있어야지.
    (/ pp.191~192)

    (......)
    뮌스터는 인구 삼십만 명이 살고 있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속합니다. 그 가운데 학생의 숫자가 오만 명이 넘어 학생 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학생만큼 많지는 않지만 이 도시는 전통적인 행정 도시였으므로 지금까지 수많은 행정을 담당하는 건물들이 있고 그에 맞게 행정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백여 개의 성당과 교회가 있어 사제들, 사제가 되려는 학생들, 교회 업무를 맡고 있는 성직자들도 많이 있지요. 비가 많이 오고 종소리가 자주 울리고 그 둘이 한꺼번에 이 도시를 채우면 일요일이라는 농담도 있는 도시.

    독일 지도를 펴놓고 이 도시를 찾는다면 지도의 왼편 위쪽에서 검지가 멈출 거예요. 이렇게 간략하게 위치를 말하는 이유는 내가 숫자에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도와 위도의 좌표로 자리매김되는 위치는 숫자로 꿈을 밀어버리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지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도시들과 마을들은 꿈이 아닐까요. 그곳에는 그곳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어요. 모르는 장소와 모르는 사람들은 일종의 꿈이라는 생각. 그래서 이렇게 느슨하게 이 도시의 위치를 꿈길처럼 설명합니다.

    1. 유럽 지도를 펴세요.
    2. 영국과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가 둘러싸고 있는 바다인 북해를 찾으세요.
    3. 손가락을 네덜란드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움직이세요. 그러면 네덜란드와 독일의 국경 근처에 손가락은 놓일 겁니다. 그때 조금 더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면 뮌스터입니다. (네덜란드 국경에서 뮌스터는 약 70킬로미터 거리예요.)

    만일 그 누군가가 날, 뜨악하게 바라보며 이것도 위치 설명이라고 하는 거요? 라고 말하면 나는 다짜고짜 이럴 겁니다.

    그냥 한번 들르세요. 일부러 오기까지는 못하겠지만 이 근방을 지나가신다면 마치 기약 없는 나그네처럼, 훌훌 털어버린 가벼운 어깨를 하고,

    그냥 한번.

    이렇게 바쁜 세상에,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만일, 정말 만의 만의 하나라도 시간이 난다면,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약 열 시간 거리를 날아오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합니다. 공항의 역인 프랑크푸르트 페른반호프Fernbahnhof에서 기차로 약 세 시간 반 혹은 네 시간을 달리면 뮌스터에 도착하지요. 오전에 인천공항에서 출발해서 시차 여덟 시간(겨울), 혹은 일곱 시간(여름)을 통과하고 난 뒤 당신의 프랑크푸르트 공항 도착 시간은 저녁 무렵이에요. 여름이라면 아직 독일의 저녁은 밝습니다. 이곳의 여름 저녁은 놀라울 정도로 천천히 옵니다. 뭐 자동차를 빌릴 수도 있고 당신이 원한다면 아주아주 오래 걸리더라도 자전거를 타고 며칠씩 쉬엄쉬엄해서 올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기차를 타고 오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직접 탈 것을 몰지 않으니 편한데다가 무엇보다도 기찻길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온 여행의 피곤함 속에서 당신은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프랑크푸르트 역을 지나 마인츠와 코블렌츠, 그리고 쾰른을 지나는 이 길은 라인 강의 길이에요.
    (......)
    당신은 누구냐? 라는 어떤 이의 질문에 하이네는 "나는 독일 시인이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시인은 노래하는 자이지요. 그가 바로 로렐라이입니다. 유혹하는 로렐라이. 시는 유혹하는 어지러운 글입니다. 유혹이 싫어 단정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당신에게도 어느 순간, 시적인 돌발 사태는 옵니다. 라인 강은 그런 힘이 있습니다. 라인 강뿐일까요. 이 세계의 모든 강들은 지구의 눈물을 머금고 있는 양,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해가 지고 있는 라인 강을 기차 너머로 바라보며 겁을 잔뜩 먹으면서도 가야 하는 길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겁니다. 여행은 그런 것입니다. 낯선 곳을 찾아가는 인간을 동반하는 것은 설렘과 고독이지요. 모르는 모든 것들 앞에서 설레지만 그 모든 것들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고독에 속합니다. 처음 도착하는 비행장이나 역에서 짐을 지켜줄 사람을 찾지 못해 꾸역꾸역 그 짐을 끌며 급히 화장실을 찾아야 하는 순간, 고독은 아주 구체적인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지요. 그리고 도착하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나요?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아주 평범하고도 당신이 여행으로 선택한 곳이라 아주 특별한 한 장소.

    뮌스터 역에 도착하면 어쩌면 이렇게 못생긴 역이 어디 있나, 당신은 어둠 속에서 혼자 묻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이차대전으로 거의 폐허가 된 뮌스터에는 이렇게 못생긴 건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어느 입구입니다. 낯선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아, 사람들이 사는 곳은 똑같네, 식으로 말한다면 아주 익숙한 별의 입구입니다. 이 도시는 나그네들에게 친절하여 벌써 역 앞에 여관들이 보입니다. 이 여관들도 어쩌면 역 건물처럼 볼품없이 보일 겁니다. 하지만 하루 잘 만한 곳은 되지요. 하지만 조심할 것 하나. 쏜살처럼 달리는 이 도시의 자전거들! 자동차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은 바로 이 도시의 자전거입니다. 그러니 조심. 자전거가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면 그냥 눈웃음을.
    (/ '작가의 말'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64~2018
    출생지 경남 진주
    출간도서 22종
    판매수 8,789권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을 두 권 내고 고향과 서울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엎드려 책 읽고 남의 시간을 발굴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십수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에도 시집과 산문집을 내곤 했다. 지금껏 펴낸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있고,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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