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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의 연구진은 2013년 5월에는 도시인문학총서 14권 『도시, 성, 사랑』을 펴냈고, 2014년 4월에는 “사랑 이후의 도시”라는 주제로 국내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연구와 토론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들과 그 근거들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지만 끝내 좁혀질 수 없는 관점의 차이를 확인하였다. 이번에 엮어 내는 책 『사랑 이후의 도시』는 연구진 안에서 더 이상 좁혀질 수 없었던 차이를, 하지만 단지 그들 안에만 있는 차이가 아니라 오늘날 도시와 사랑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연구진뿐 아니라 연구진과 학적 교류를 맺었던 외부 연구자들의 성과도 함께 묶었다.

책소개

과거에 이 땅의 청춘에게 도시는 사랑의 장소였다. 연애란 동경과 경성에서 신학문을 공부하는 청춘여남의 관계에만 붙여지던 특권적 명칭이었다. 자유연애를 억압하던 전통과 권위주의가 무너진 지금, 도시에서의 사랑은 소멸되거나 다른 관계로 대체되고 있다. 21세기 서울, 낭만적 사랑은 남성중심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청춘은 늘어간다. 이 책은 한국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친밀관계의 양상을 철학자, 국문학자, 인류학자 등의 시각에서 설명한다. 오늘날 도시의 수많은 찻집과 술집에서 벌어질 사랑에 관한 숱한 대화들이 좀 더 진지하고 성찰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 엮은이의 말 중

출판사 서평

이 책은 다학제적 관점에서 도시화와 사랑 담론을 밀도 있게 엮어냄으로써 기존 도시문화연구와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고 있다. 남영호는 인류학적 관점으로 서구 유럽도시에서의 연애 담론과 부족문화에서의 사랑 개념을 천착하면서 새로운 사회관계에 따른 새로운 사랑을 제시한다. 여성철학자 이현재는 근대 도시에서의 연애가 자기서사를 가능하게 했다면 후기자본주의 도시에서는 개인의 자아성장 프로젝트로 변화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다양한 친밀성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철학자 정성훈은 니클라스 루만의 매체이론적 맥락에서 사랑을 코드화된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규정하고, 역설의 코드화에 그 기원을 둔 낭만적 사랑을 강조한다. 국문학자 박수현은 한국 현대문학을 분석함으로써 한국의 연애관이 낭만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추적한다. 박찬효 또한 1960~70년대 최인호의 소설을 분석함으로써 낭만적 사랑의 불가능성을 진단하고 새로운 관계의 윤리학을 모색하고 있다. 이렇듯, 이 책은 인간과 인간, 남과 여 사이의 친밀관계를 도시화 혹은 도시문화의 맥락에서 풀어냄으로써 기존 도시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독창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엮은이의 말 | 정성훈 · 7

제1부 도시인의 삶에서 사랑의 의미

도시, 근대, 연애 그리고 이들의 외부 | 남영호 · 15
도시문화와 개인의 자아성장 프로젝트로서의 사랑 | 이현재 · 53
코드화된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사랑 | 정성훈 · 79

제2부 사랑 이후의 도시문학

사랑의 도시에서 사랑 이후의 도시로 | 정성훈 · 109
연애관의 탈낭만화와 도시인의 연애소설 | 박수현 · 131
최인호의 소설에 나타난 도시 재현 양상과 ‘사랑’의 윤리학 | 박찬효 · 169

오늘날의 20대는 연애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다. 흔히 88만 원 세대로 명명된 이들에게는 현재의 삶이 고달프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하기에, 서로에게 끌리는 사람을 만나 함께 꿈을 키워가며 장래를 약속하는 일 따위는 사치에 속한다. 그보다는 엄청난 등록금을 감당하기 위해 각종 ‘알바’에 자신을 내던져야 하며 살벌한 취업전선에서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학점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여러 자격증을 포함한 ‘스펙 쌓기’에 전념해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입시전쟁에 뒤이어 곧 대비해야 하는 취업전선은 대부분의 전투병에게 패배를 예고한 싸움이며, 패자에게는 비정규직 또는 평균 임금 88만 원이라는, 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운명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담론에서, 경제적으로 88만 원 세대로 규정된 이들은 생애주기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연애, 결혼, 출산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기에 3포 세대라는 사회적 규정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게 되었다. 오죽 20대의 처지가 안타까웠으면 한 경제학자가 장시간의 인터뷰 말미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자. 아무리 어렵더라도 결혼 못하고 애기 못 낳는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연애는 꼭 하자”라고 덧붙였을까.

‘88만 원 세대론’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담론은 그전까지 요즘 대학생을 정치에 대한 관심도 사회의식도 없으며 풍족하게 자라 자신만을 아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비난하던 소위 386 세대에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담론이 20대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 효과를 미친 것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20대를 주요 조건이 결여되었으며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동정의 대상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과연 올바르고 정확한가. 이 글은 이 중에서도 20대에 적어도 한 번쯤은 해 봐야 한다고 하는 연애에 대해 다소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이들이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랑이 낭만적 사랑, 즉 연애를 가리킨다면, 많은 학자들이 (그리고 일반 대중의 상당수도) 이미 환상이거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왜 20대에게 환상이나 이데올로기에 빠지라고 권유하는가. 환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랑을 말한다면, 그런 사랑이 쉬운 적은 있었는가. 그러한 사랑은 언제나 어려웠으나, 또 동시에 많은 이들이 사후적으로 깨닫게 되는 관계가 아니었는가. 위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유종일도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 하느라 연애를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이 글은 연애(romantic love)는 특정한 지정학적, 역사적 조건에서 발생한 관계라는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환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역시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성적인 관계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낭만적 사랑의 이념은 근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강력한 자장을 형성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 자장 안에 포섭되지 않으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낭만적 사랑은 사람이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하나의 강력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많은 사람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행위했는가는 의문이다. 최근에는 후기자본주의에서 개인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낭만적 사랑도 하나의 소비 형태로 변용되었음을 지적하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여/성이론? 제28호 기획특집, 2013). 근대적 인간관계의 하나로서 낭만적 사랑을 규정하는 입장에 동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글은 오늘날 한국에서의 낭만적 사랑은 문화적 각본으로서 소비행태의 한 규범을 형성한다는 이러한 연구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글은 낭만적 사랑이 근대의 사랑 일반을 대표할 수 없으며 후기자본주의라는 개념 규정으로 한국의 감정 관계를 환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 낭만적 사랑을 논할 때에는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친밀성의 구조변동](1996)이 그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앤서니 기든스의 낭만적 사랑의 개념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나 그의 이론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서구중심주의가 가진 한계를 지적하는 일은 드물다. 이 글의 3장에서는 앤서니 기든스의 개념을 검토하며 북미와 서유럽의 바깥에서 낭만적 사랑의 개념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또는 적용 가능한지를 살펴본다. 4장에서는 한국으로 시야를 돌려 낭만적 사랑이 직면한 곤란함을 1920년대와 1960년대의 사례를 통해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낭만적 사랑은 도시적 현상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도시는 근대적 생활양식의 대표자이며 낭만적 사랑은 이러한 근대적 생활양식을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2장에서는 낭만적 사랑과 도시적 생활양식과의 관계를 간략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