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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1992년)한 이인원 시인의 시 62편이 수록된 시집 <빨간 것은 사과>는 시간과 사랑을 화두로 삼고서 세월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거나, 감각의 촉수를 예민하게 곤두세워 여성으로서의 삶에서 포착되는 내밀한 징후를 도발적으로 그려낸다. 시각,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을 활용하여 직조된 감각으로 발화한 이미지는 남성에게 익숙한 사유와 논리를 벗어난 지점에서 치열하고 능동적인 여성의 열정과 열망을 생동감있게 육화시킨다. 여성에게 익숙해 보이는 슬픔의 속성과 삶의 비의를 후려침으로써 현실을 끌어안는 이인원 시인의 독특한 몸짓을 통해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하는 시집이다.

세월의 무게에 대항하는 여성의 몸짓

199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이인원 시인이 6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간행하였다. 세계사시인선의 127번째 시집으로 간행된 『빨간 것은 사과』는 시간과 사랑을 화두로 삼았던 시인의 두 번째 시집과 소재나 주제적 측면에서 동일한 듯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보다 적극적으로 시간, 즉 세월에 대항하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거나 감각의 촉수를 예민하게 곤두세워 여성으로서의 살이에서 포착되는 삶의 내밀한 징후들을 도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번 시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적극적인 오감의 활용이다. 시각과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을 활용하여 직조된 이미지들은 감각적일 수밖에 없다. 감각들에서 발화된 이미지들은 그러나 삶의 뜻을 <찾아내려는> 마음이기보다 <그려내는> 데 집중해 있는 듯하다. 함부로 재단하거나 단정지을 수 없는 삶의 속성을 시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해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들리는 대로 그려내고자 할 뿐이다. 시인의 이러한 시작(詩作)의 동력원인 예민하게 곤두세운 감각은 세월의 무게를 감당해내려는 삶의 몸짓에 다름 아니다.

영감이 지고가기 좋게 바짝 마른 나뭇단의 무게와/흙으로 돌아가기 좋게 버쩍 마른 영감의 몸무게와/저울 눈금 하나 안 기울게/똑같아 보이는//아름다운 짐, 그 위로/닿을 듯 앉을 듯 날고 있는/흰나비 따라/아주 멀리 가서//그때그때 흘리지 못했던/눈물 몰래 쏟아내고 싶다/그때그때 버리지 못했던/개숫물 말끔히 비워내고 싶다//점점 무거워지는 저녁 해를 등지고 앉아/하염없이/고무신만 털고 있는/저 영감처럼
―｢짐｣ 부분

이 시집의 서시라고 할 ｢짐｣에서 <점점 무거워지는 저녁 해를 등지고 앉아/하염없이/고무신만 털고 있는/저 영감>의 행위를 통해서 시인은 삶을 감당해내기 위해 <쏟아내고> <비워내>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생의 무게를 <쏟아내고> <비워내>는 일이 곤핍한 생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월의 무게를 지혜롭게 감당하려는 책임의식으로 읽어야 할 듯하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하여 삶에 대한 욕망의 짐을 떨쳐내려는 몸짓은 ｢밥상들｣에서는 역설적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예컨대 <이빨 없이도 먹>고 <맛 없어도 먹>어온 나이만큼의 수많은 <오욕(五慾)>의 <밥상들>로 유지되어온 몸뚱이가 실은 <세월>에 보시하기 위한 <밥상>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그것이다.

<남 눈치 볼 것 없이 태연자약> 온몸으로 <까발리>기

그러나 이인원의 감각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부분은 세월의 무게를 떨쳐내려는, 다소 소극적인 견딤의 모습을 보일 때보다 저항하거나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이다. 보다 발랄하고 절실한 몸짓의 풍경을 그려 보여주는 것이다. <검은 보자기를 들어올리는/후끈거리는 콩나물 대가리의 힘>(｢실크터치｣)을 <팅팅 불은 껍질이 찢어지는 순간/그대로 內燃機關이 된 온몸으로부터 발화된 것/실린더는 맹렬하게 한 방향으로만 작동하여/부쩍 키가 자>란다고 표현한 대목에서는 치열하고 능동적인 삶에의 열정을 생생하게 육화시켜놓고 있다. 특히 삶의 무게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는 표제작이기도 한 ｢빨간 것은 사과｣나 ｢호박씨는｣ ｢내 사랑 마녀｣ ｢게으름의 여왕｣ 등과 같은 수다를 풀어놓은 듯한 산문시를 통해 구체화된다. 여성의 고유한 영역이라 할 생활의 한 단면들을 관찰한 것을 토대로 쓰여진 이 시편들에서 시인은 <저 여자, 또 호박씨 깐다라는 말쯤은 귓바퀴 하나 붉히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주>(｢호박씨는｣)겠다면서 <남 눈치 볼 것 없이 태연자약 까발리는 그 염치없음이 충격을 흡수하면서도 뛰어난 반사 효과를 가져다주는 에어쿠션 역할을 하는 것>(｢빨간 것은 사과｣)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여성에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슬픔의 속성과 삶의 비의를 후려침으로써 비로소 현실로 끌어안는 시인의 몸짓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한다.


이인원의 시세계는 다분히 명상적이고 초월적인 전망의 파노라마가 일렁이고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풍경 속에는 <부러진 생솔가지의 눈물>(｢藥師如來｣)도 얼비치고 <보슬보슬 마른 흙 냄새>(｢슬픔은 고양이처럼 온다｣)도 난다. 시인은 비극적인 소멸의 제단에 촛불을 밝히고 싶다. 시인이 섬세하면서도 은근하고 또 단호하게 파악하는 시적 물상은 단순한 피사체로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원형적인 모습으로 재생산된다. 여기에는 온갖 살가운 추억과 거미줄처럼 반짝이는 세밀한 풍경이 존재한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을 호명하는 제의의 굿판을 벌이고 싶다. <금간 화병/이제 여느 꽃병보다 오래 건재할/저 편안한 상처의 집>(｢安居｣)에 보이는 선적인 비움의 미학이나, <하루 종일 비 오시는 날/수제비 끓여 먹기>(｢프릴 장식을 단 생각들｣)에 보이는 적막한 여유, 또한 <도르르 말린 잠의 봉오리를 완전히 감싸줄 때까지/암술과 수술 사이, 살갗과 잠옷 사이의/긴장된 공기를 한 알도 흐트러뜨리면 안 돼>(｢가벼운 잠 1｣)라는 식물적 상상력 뒤에 숨어 있는 섬세함을 보면, 이인원 시인이 직조해내는 언어의 날줄과 씨줄이 팽팽한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탁번(시인)

감각의 활성화가 대부분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눈여겨보고 그러한 삶의 자리에 스며들어 있는 여성의 독특한 몸짓을 발굴해내려는 노력 가운데에서 도모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러한 여성의 독특한 몸짓을 실감나는 감각의 체험으로 되살려내는 문체도 여성의 주체적 화법으로 구가된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시세계가 남성들에게 익숙한 사유와 논리의 그물을 벗어난 지점에서 몸의 느낌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풀어내고 즐기는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점, 그리고 그러한 몸의 감각화가 심상을 빚어내는 서정시의 고유한 특장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도 미더워 보인다.
―이경호(문학평론가)

짐
약사여래
안거
연애
슬픔은 고양이처럼 온다
염전
분호엥 홀리다
그 창에 딱 맞는 커튼
바로 그런 때
인
실크터치
즐거운 견딤
행복한 숙주
밥상들
호박씨는
꿈길 밖에 길이 없어
편애
무조건,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빨간 것은 사과
내 사랑 마녀
게으름의 여왕
반회장 연두저고리를 조카딸에게
사랑은 2
절벽에서 보았다
속궁합
노랑
결
겹눈
맨드라미
상징사전 - 네 잎 클로버
밤의 동쪽
작은 방 한 칸
순이
침묵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 - 어머니 1
눈물 까끄라기를 걸러내다 - 어머니 2
일본 언니 - 어머니 3
가을 엽서
눈에 ?이 핀다
동재기 나루터 1
동재기 나루터 2
동재기 나루터 3
동재기 나루터 4
동재기 나루터 5
동재기 나루터 6
동재기 나루터 7
동재기 나루터 8
동재기 나루터 9
동재기 나루터 10
프릴 장식을 단 생각들
거리
수령
자자형
과적
따뜻한 그늘 - C에게
분홍식
해설. 감각의 '내연기관'을 활성화하기 / 이경호

[백두산에 오르는 아주 쉽고 빠른 길이 있다 원숭이 구경가는 것이 큰 나들이였고 맛있는 거 하면 단연 바나나를 꼽던 시절에 즐겨 부르던, 촌스럽게도 반도 삼촌리와 역사 반만 년을 강조하며 끝나던 노래 촌티란 원색적이며 솔직하다 못해 약간은 염치 없는 것 원숭이 똥구멍은 빨갛다, 가 아니가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라고 시작했다면 빨강의 명도와 채도는 확 달라졌을 것 바나나에서 기차로 이어가는 거리감과 비행기와 백두산을 견주는 눈높이는 얼마나 단순 명쾌한가 관념과 추상을 싹 배제하면서도 직유와 은유를 아울러 뛰어넘는 탄력적인 리듬감, 바로 그 힘으로 단숨에 백두산 정상에 이르는 것! 털이 숭숭 난 똥구멍일지라도 남 눈치 볼 것 없이 태연자약 까발리는 그 염치없음이 충격을 흡수하면서도 뛰어난 반사 효과를 가져다주는 에어쿠션 역할을 하는 것 전기면도기로 싹 밀어냈지만 모근만은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느 새파란 턱을 치켜들고서 고급 향수에 최신 모드로 빼 입은 수사법에 주눅이 들 때면 그래서 새빨간 동화가 그리울 때면 가끔 흥얼거려 보는 노래, 치모 몇 가닥 쯤은 비죽비죽 비어져 나온 그리운 그 노래]

표제 시 <빨간 것은 사과>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