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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 아케이드

원제 : 最果てア-ケ-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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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있어서는 안 되는 모순 속에 숨어있는 '소설'

정적에 감싸인 낡은 아케이드에서 벌어지는 열 편의 이야기를 담은 [세상 끝 아케이드]는 먹먹한 상실을 맞이한 사람들이 차분하게 슬픔을 받아들이고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모습을 오가와 요코 특유의 투명하고 고요하며 서늘한 문체로 표현한다.

오가와 월드 특유의 묘사와 정서와 더불어 그녀가 천착해온 죽음과 삶,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출판사 서평

[박사가 사랑한 수식][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의 작가
오가와 요코 3년 만의 신작 연작소설
세상 끝 아케이드에서 벌어지는 열 편의 이야기


오가와 요코의 세계는 고요하다.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복고풍 그림엽서 속 마을 같은 거리에서 사람들은 큰 소리로 명랑하게 웃지도, 통곡하며 울지도, 언성을 높여 싸우지도, 환성을 지르지도, 요란하게 자기주장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눈을 내리깔고, 숨죽이고, 조용히 기도하듯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렇기에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언제나 정밀靜謐함이 잔물결처럼 가슴에 찰랑찰랑 밀려든다.
- 권영주 / 옮긴이

아쿠타가와상, 요미우리문학상, 일본서점대상, 다니자키준이치로상에 이어 2012년에는 문부과학대신상을 수상하며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한 오가와 요코의 연작소설집 [세상 끝 아케이드]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박사가 사랑한 수식][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등의 작품을 통해 절제된 문장으로 따듯한 감동과 아름다운 정서를 선사했던 오가와 요코가 이번에는 정적에 감싸인 낡은 아케이드에서 벌어지는 열 가지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엮어냈다.[인질의 낭독회]이후 한국에서 3년 만에 발매되는 신작으로 그녀를 기다리던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상실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을 끌어안고 헤매다 작은 아케이드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죽은 이의 기억이 담긴 물건을 사고 따뜻한 어둠에 슬픔을 풀어놓는다. 비록 그 슬픔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슬픔을 이해하고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과 장소를 만나 위로받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아케이드의 관리인이자 배달원인 서술자 '나' 역시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죽음을 아케이드에서 치유하며, 이야기가 거듭되며 밝혀지는 나의 과거와 에피소드들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점점 허물어 간다.

"어려워하실 것 없어요, 편히 들어오세요."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아케이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그리움에 못 이겨 추억을 사러 옵니다.
오가와 요코가 선물하는 애틋하고 찬란한 기억의 파편들


모조 스테인드글라스가 달린 아치형 천장과 십몇 미터만 가면 끝나는 2층 건물 두 줄로 이루어진 작은 아케이드. 눈에 띄지 않는 입구에 어둑한 조명, 비좁은 공간, 소박한 상품들…… 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기해 보이지만, 아케이드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기 힘든 것들을 제공한다. 바로 죽은 이들이 사용하던 물품들이다. 상점 주인들은 경의와 애정을 갖고 상품을 다루며, 죽은 이를 그리며 찾아온 손님들의 슬픔을 포용해주고 그들이 추억을 되새길 수 있게 조용하지만 따듯하게 지켜봐준다.
중고 옷감과 레이스로 무대의상을 만들어 잠시나마 죽은 이를 무대에 살려내는 노부인의 이야기를 다룬 [의상 담당]을 비롯해, 죽은 딸이 끝까지 읽지 못한 백과사전을 베끼며 딸의 세계를 이루는 조각들을 모으는 신사의 모습을 그린[백과사전 소녀], 사용된 그림엽서를 통해 죽은 이들의 기억을 항해하는[종이 상점 시스터], 손잡이 너머의 따뜻한 어둠에 묻혀 슬픔을 덜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손잡이 씨], 죽은 이의 머리카락으로 레이스를 떠 고인을 기리는[유발 레이스]등 열 편의 이야기들은 먹먹한 상실을 맞이한 사람들이 차분하게 슬픔을 받아들이고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모습을 오가와 요코 특유의 투명하고 고요하며 서늘한 문체로 표현한다.

이야기는 이웃과 죽음을 매개로 발전해온 '파사주-아케이드'에서 시작되었다
오가와 요코는 전자책 서점 리더스토어에서 주최한 [세상 끝 아케이드]특별 대담에서 '인물보다 장소를 먼저 묘사하고 싶었고, 손님이 많지는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얻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어디에 있는지 모호한 그런 닫힌 곳을 그리고 싶었다'며 파리의 파사주(19세기 유럽 도시에 출현한 아케이드 거리. 이웃들과 장례를 매개로 해서 발전했다고 한다)나 유럽의 아케이드와 비슷한, 좁은 골목에 유리 천장이 있고 상품과 동화된 것 같은 주인이 앉아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를 생각해냈다며 작품의 배경이 되는 아케이드를 묘사한다.
또한 자신이 좁은 곳에 집착하는 것은 반대로 굉장히 넓은 곳을 찾는 일과 같다며 전작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중에서]가로 8칸, 세로 8칸인 체스판을 통해 주인공이 그 이상의 세계를 접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처럼, 아케이드의 백과사전이나 의안 등도 일상생활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곳을 보여주는 문고리이자 입구이며, 아케이드는 깊고 넓은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라고 설명한다.
집필 과정에 대해서는 "예를 들자면 레이스란 물건은 검은 종이에 붙여 보면 아시겠지만 사실 우리가 뜬 실이 아니라 짜이지 않은 틈새, 즉 그곳에 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소설적인 사물이다. 아케이드의 상품들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두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의 고귀함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케이드에서 취급하는 상품을 먼저 고른 후 그에 따라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고 말한다. 아케이드라는 장소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상품으로, 그리고 캐릭터로 연결되어 뻗어나간 것이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오가와 요코의 죽음과 삶, 소설에 대한 시각
결국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죽음이다. 요코는 이어지는 대담에서 "결국 나는 살아 있는 건지 죽은 건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좋아한다. 박제 동물도 죽고 싶지만 인간의 애정 때문에 애매한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고 느끼는데, 그런 모습에 애정이 솟는다. 그런 있어서는 안 되는 모순 속에 '소설'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라고 말한다.
또 "내 소설에 그려진 시점에서 결국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이라는 면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소설은 죽음을 그리기 위한 도구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줄여 주기 위해 죽음을 설명해 주는 게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세계에서 죽음을 지켜봐줄 사람이 없다면, 적어도 작가는 그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라고 자신의 사생관과 소설관을 피력했다.[세상 끝 아케이드]는 이렇게 오가와 월드 특유의 묘사와 정서와 더불어 그녀가 천착해온 죽음과 삶,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오가와 요코의 새로운 시도, 만화와의 접목
[세상 끝 아케이드]는 오가와 요코 작품 중 처음으로 만화가 아리나가 이네가 작화를 맡아 동명의 만화 및 이네의 삽화가 들어간 버전의 소설도 발간되어 주목을 끌었다.
삽화 소설과 만화의 전자책 출간에 발맞춰 이뤄진 만화가 아리나가 이네와의 대담에서 요코는 "만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화면에서는 무언가를 표현할 때 적어도 두 단계 이상을 밟아나가야 하며, 글이 그런 면에서는 독자를 좀 더 단번에 다른 세계로 접할 수 있게 한다는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네는 "작업을 하며 어느덧 이야기 속에서 안과 밖이 모호해지는 경험을 했다. 어떤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넓은 우주로 이어지는 느낌, 현실과 이어져 있으면서 우주와도 이어져 있는 느낌 같은 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소회하며 오가와 월드에 대한 감탄을 전했다.

줄거리
[의상 담당]
세상 끝에 있는 듯 적막 속에 잠긴 낡은 아케이드에는 섬약한 청년이 경영하는 중고 레이스 상점이 있다. 극장에서 의상 담당으로 일했던 노부인이 이곳의 단골손님으로, 은퇴 후에도 중고 옷감과 레이스로 아무도 입어 주지 않는 무대의상을 만들며 지낸다. 아케이드의 관리인이자 배달원으로 일하는 '나'는 종종 개 페페와 함께 레이스를 배달하러 그녀가 혼자 일하는 무대의상 연구소를 방문해 노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백과사전 소녀]
아케이드 끝, 안마당 서쪽 모퉁이에는 손님들이 쉬어 가는 독서 휴게실이 있다. 나는 아버지가 일하는 동안 그곳에서 책을 읽었고, 또래 R 또한 매일같이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백과사전을 [아]부터 차례대로 읽어 나갔다. 하지만 R는 사전을 끝까지 읽지 못한 채 갑작스레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후 R의 아버지가 딸이 하지 못한 일을 대신하듯 독서 휴게실을 찾아와 백과사전을 차례대로 읽으며 내용을 노트에 연필로 베낀다.

[토끼 부인]
아케이드 천장에는 낡은 모조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워져 있다. 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색색의 빛에 흰 운동화를 담그며 놀곤 했다. 빛의 웅덩이가 가장 크게 만들어지는 곳은 인형이나 박제 등에 들어가는 의안을 판매하는 의안 상점이었는데, 화려한 차림의 중년 부인이 기르는 토끼의 눈을 찾는다며 종종 나타나 래빗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나는 어느 날 유모차를 끌고 가며 말을 거는 그녀를 보고 몰래 그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R와 같은 병원에서 래빗이라는 별명의 남자애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부인이 사라지고 한참 지난 후였다.

[고리 집]
아케이드 입구에는 기본적인 재료로만 만드는 심플한 도넛 한 종류만 파는 도넛 전문점 <고리 집>이 있다. 10년 전 그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다. 근처 스포츠 센터에서 기계체조를 가르치는 전직 올림픽 체조 선수로, 쾌활한 성격과 완벽한 포니테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력은 가짜였고, 결혼 사기범이란 게 밝혀져 결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 우연히 출소한 그녀를 만난 나는 그녀에게 도넛 자세를 취해 달라고 요구한다.

[종이 상점 시스터]
레이스 상점 주인의 누나가 경영하는 종이 상점 시스터에서는 편지지와 카드, 만년필과 잉크 등을 판다. 이미 사용된 중고 그림엽서도 상품 중의 하나인데, 나는 오래된 그림엽서를 보며 거기 적힌 내용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상상하곤 했다. 한 젊은이가 카드와 편지지를 사며 중고 그림엽서를 고르는 것을 보고, 나는 어릴 적 어머니가 있던 요양 시설을 찾아가 관리인 할아버지가 시설로 온 우편물들을 분류하는 것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을 떠올린다.

[손잡이 씨]
문손잡이 전문점의 주인은 나이가 아주 많은 할머니로, 상점 주인들에게는 손잡이 씨라 불린다. 상점에는 온갖 형태의 손잡이가 실제로 돌려볼 수 있도록 벽에 설치된 판자에 경첩과 함께 붙어 있다. 그중 주인이 가장 아끼는 손잡이는 수사자의 머리가 조각된 백랍 제품인데, 그 뒤에는 그저 그 손잡이를 위해 존재하는 빈 공간이 있다. 나는 지치거나 힘들 때 그 어둠에 몸을 욱여넣고 마음을 진정시키곤 했다. 나는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우는 소녀를 보며 처음 그곳을 발견했던 때를 기억해낸다.

[훈장 상점 미망인]
훈장, 메달, 트로피 등을 파는 훈장 상점의 주인은 미망인이다. 시상식을 좋아하던 남편이 죽은 뒤 가게를 정리하려 하지만 맘처럼 쉽지 않다. 어느 날 초로의 남자가 아버지의 유품인 훈장을 팔러 온다. 그는 훈장과 함께 거기 깃든 기억도 떨쳐버리려 하고, 미망인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사들인다. 나는 훈장의 주인이었던 시인의 시집을 빌려, 훈장은 팔렸어도 그의 시는 누군가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고 전하듯 시를 낭송한다.

[유발 레이스]
레이스 상점에서는 유발(죽은 이의 머리칼)로 레이스를 뜨기를 원하는 의뢰인과 유발 레이스 장인을 연결해 주는 중개 업무도 하고 있다. 나는 의뢰인이 원하는 디자인과 유발을 레이스 장인에게 전달해주고, 만들어진 유발 레이스를 다시 레이스 상점으로 가지고 온다. 장인이 유발에서 죽은 이를 느끼면서 레이스를 뜨는 모습을 보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나는 어느 날 내 머리카락으로 유발 레이스를 떠달라고 의뢰한다. 그 유발 레이스는 아직도 레이스 상점 한구석에 걸려 있다.

[유괴범의 시계]
아케이드 맞은편 건물에는 커다랗고 단순한 모양의 시계가 걸려 있다. 예전에 이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본 아이는 유괴범에게 잡혀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도 소문을 믿어 시계의 가장자리만 보아도 얼른 눈을 감곤 했는데, 화재로 아버지가 죽은 날 처음으로 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가끔 아케이드의 손님들을 미행하며 아버지의 뒷모습을 찾는다. 유괴범의 시계가 일으키는 물결에 휩쓸려 거리를 걸으며, 아버지가 살았을 수도 있는 인생을 보고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포크댄스 발표회]
열여섯 살 겨울, 나는 아케이드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해 난생처음 번 돈으로 아버지에게 영화 티켓을 선물했다. 무척 기뻐하는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보기로 한 날, 갑자기 포크댄스 발표회 참가상 메달을 배달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주민회관으로 향한다. 노인들의 춤을 구경하다 메달이 하나 모자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아버지와의 약속보다 배달 의뢰를 우선해 다시 상점으로 가 여분의 메달을 가지고 주민회관으로 달려가지만, 도중에 영화관에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목차

의상 담당
백과사전 소녀
토끼 부인
고리 집
종이 상점 시스터
손잡이 씨
훈장 상점 미망인
유발 레이스
유괴범의 시계
포크댄스 발표회
옮긴이의 말

본문중에서

나는 의상 담당의 뒷모습이 멀어진 뒤로도 안마당에서 그녀 생각을 했다. 시든 화분과 수많은 의상들로 둘러싸인 방에서 그녀는 홀로 작업한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만 상연될 연극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입을 옷을 짓는다. 내가 배달한 꾸러미에서 레이스 쪼가리 하나를 꺼내 어루만지면,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옷감을 만져온 손가락이 금세 그 속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옷감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을 반지 하나 끼지 않은 늙은 손이 건져 올린다. 그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잠시간 무대에 되살려내기 위한 의상을 생각한다. 이윽고 재봉틀에 실을 꿴다. 소맷부리에, 가슴에, 또는 치맛자락에 레이스를 꿰매 붙인다. 구부정한 등이 재봉틀과 하나로 이어져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무대의상 한 벌이 완성된다. 빠뜨린 데가 없는지 구석구석 살펴보고, 먼지를 털고,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고 나면 긴 숨을 한 번 내쉬고 행어에 건다. 얼마 남지 않은 공간에 그럭저럭 쑤셔 넣은 의상은 금세 다른 의상들 속에 파묻힌다. 의상 담당은 이런 식으로 죽은 이를 위한 옷을 계속해서 만든다.
( '의상 담당' 중에서/ pp. 27~28 )

대학 노트가 한 권 한 권 글자로 메워지고, 연필은 몽땅하게 줄어들었다. 등이 쑤시고, 공책은 땀으로 축축하고, 눈도 가물거리지만 신사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괜히 무리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을 형성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찬찬히 바라보며 감촉을 확인한 뒤 있던 곳에 되돌려놓는다. 그 일을 한없이 반복한다. 과거에 딸이 탐색했던 길을 따라가며 희미한 자취라도 남아 있지 않은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애가 그렇게 바랐어도 도달하지 못했던 길을 대신 밟는다.
( '백과사전 소녀' 중에서/p p. 52~53 )

그곳은 결코 방이 아니고, 헛방도 아니고, 당연히 의자라든지 전등, 양탄자도 없는, 그저 문손잡이를 위해 존재하는 어둠이었다. 세계의 우묵한 구멍 같은 아케이드에 숨겨진 또 하나의 우묵한 구멍이었다. 그곳에 주저앉아 몸을 둥글게 말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올바른 위치에 쏙 들어간 것처럼 몸이 편안했다. 거리를 걸으면서 옅게 흐릿해졌던 속 알맹이가 다시 응축되는 듯했다. 페페도 꼭 같이 들어와서는 틈새가 없을 듯한 곳에 재주 좋게 파고들어 내 엉덩이와 다리 사이에 몸을 말고 누웠다.
어렸을 때는 관절이 삐걱삐걱 쑤실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좁은 게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몸이 자라고 페페까지 있으니 더 좁은 게 당연하건만, 구멍과 몸의 라인이 조화를 이루고 어둠은 우리를 보듬어주었다. 어디에도 무리가 없었다.
( '손잡이 씨' 중에서/ pp.136~137 )

"이런 식으로 누가 대대적으로 칭송받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일 아니냐.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 자신은 평생 칭송받을 일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어도, 박수를 보내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행운이란 기분이 드는 거야."
(중략)
"세 선수의 목에 차례대로 메달이 걸려. 특제 받침대에 놓여 있던 메달이 선수의 목에 걸리는 순간 갑자기 생기 넘치게 보이니 참 신기하지. 드디어 영혼을 얻은 거야. 하지만 메달이 선수보다 튀는 일은 결코 없어. 가장 빛나는 건 물론 승자야. 메달은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어. 자기는 이 사람이 승자입니다, 하고 가리키기 위한 조그만 표지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
( '훈장 상점 미망인' 중에서/ pp.154~155 )

내가 태어나기 조금 전, 어느 부잣집 다락방의 여행 가방에서 나온 진기한 레이스를 만난 레이스 상점 주인은 잠시 망설인 끝에 그것을 사들여 액자에 담아 가게 구석에 장식했다. 그게 유발로 뜬 레이스였다. 망설인 것은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소유자의 마음이 그토록 깊이 스며든 물건을 장사하는 곳에 들이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스는 여행 가방 속에서 짓눌리고 가장자리는 올이 풀려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손을 보지 않으면 조각조각 해체되어 한낱 먼지 묻은 머리털이 될 우려가 있었다. 주인은 그것을 구해내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고 보존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 유발 레이스는 자신이 취급하는 물건은 많든 적든 죽은 이의 자취를 지니고 있으니 그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잊어선 안 된다는 신념의 상징이었다.
( '유발 레이스' 중에서/ pp.157~158 )

어디로 돌아가는지 모르는 조교의 뒷모습을 향해 말없이 작별 인사를 한 뒤, 나는 홀로 아케이드로 돌아왔다. 걸으면서 내내 조교 생각을 했다. 인간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캄캄하고 습한 동굴에 사는 황갈색과일박쥐를 생각하는 인생. 그들이 발하는 초음파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고, 그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르는 채, 날이면 날마다 그들을 관찰하고 그래프를 만들고 가설을 수립하고 실험을 되풀이하는 인생. 인간이 모르는 방식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작은 동물의 현명함에 감명 받는 인생. 그리고 바이올린을 잘 켤 수 있는 인생.
어쩌면 아버지가 살았을 수도 있는 인생은 이렇게나 매력적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버지의 불운을 이렇게 누가 보충해준다. 아케이드 관리인으로서의 인생이 얼마나 근사한 것이었는지를 이런 식으로 내게 보여준다.
( '유괴범의 시계' 중에서/ pp.208~209 )

저자소개

오가와 요코(Ogawa Yoko)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62.03.30~
출생지 일본 오카야마
출간도서 21종
판매수 27,128권

1962년에 오카야마 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교 제1문학부 문예과를 졸업하고, 1988년 [상처 입은 호랑나비]로 가인엔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1991년 [임신 캘린더]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2003년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제55회 요미우리문학상 소설상, 제1회 일본서점대상 등을 수상하며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04년 [브라흐만의 매장]으로 이즈미교카문학상을, 2006년 [미나의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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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미야베 미유키, 무라카미 하루키, 미쓰다 신조, 온다 리쿠 등의 주요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제20회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다수의 일본문학은 물론 《십자군》 《믿음을 넘어서》 《사탄의 탄생》 《다빈치 코드의 비밀》 등의 인문서와 《데이먼 러니언》 《어두운 거울 속에》 등 영미 장르문학 작품도 꾸준하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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