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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시집 『산그늘 주유소』. 크게 6부로 구성되어 ‘풀꽃 언덕’, ‘내 안의 물소리’, ‘어머니의 바다’, ‘광내기’, ‘길 위에서’, ‘음악의 집’ 등을 주제로 한 시편들을 수록하고 있다.

산자락을 오를 때면 싱그러운 숲의 숨소리를 만난다. 초록이면 초록으로 물들고, 가을철이면 철철 단풍으로 물들며 사람들은 생명과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들판에는 수없는 방향의 길이 있었고 풀섶의 한가한 풀잎 냄새가 우리들 오욕칠정을 거름으로 더욱 푸르러 있었다.
우리가 풋풋한 생명을 가지는 것은 그 청정한 식물성이미지의 숲과 들판, 언덕을 만날 때 가능하다. 때문에 산을 찾고 들을 찾아 유영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끊임없는 움직임의 나무와 잎, 사람들의 생애에도 음악의 생명률이 있다. 음악적 에너지의 근원을 파악한 철학가나 예술가는 이미 모든 예술의 기본은 음악으로 향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는 우주나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모성의 바다가 있다.
이와 같은 흐름으로 시를 쓴 박영선 시인이 첫 시집을 상재한다. 그의 시세계는 첫째 식물성 이미지와 이것을 받쳐주는 물의 이미지가 있고 둘째는 음악이 있는 풍경이 시의 밑바탕에 있어 기독교적 세계관과 감사와 그리움으로 넘치고 셋째 모성의 영원함과 공존의 세계, 넷째 삶의 철학으로 자리 잡혀진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시인의 말]

원고지와 오선지를 오가며
어느새 삼십여 년...

인내의 고비마다?
나를 지탱케 해준 소중한 분신들에게
이제야 조그만 집 한 채 마련한다.

시와 음악, 그리고 신앙은 내 삶의 중심축이다
세월 칸칸이 밀려드는 적막에는
선율로 채워 왔고
세상살이 번잡할 땐 기도하며
詩시를 다독거렸다
하지만 치열한 苦惱고뇌의 한복판에는 닿지
못해서일까
아직도 내 詩시는 화장발이 안 받는다
민얼굴이라 부끄럽고,
또 하나의 책 공해가 되지는 않을까
세상 나서기 두렵지만
더 늦기 전에
평생 나에게 산그늘 주유소가 되어주신
九旬구순의 어머니 앞에
'첫 시집'을 바치려 한다.

2014년 늦가을

海閏해윤 박영선

시인의 말

제1부 풀꽃언덕

부레옥잠
탄광촌의 풀잎
등산
패랭이꽃
겨울 숲에서
스파티필름
천리향
액자 속의 풍경
백목련
4월 장미
가을 산·1
가을 산·2
가을 산·3
고구마 덩굴손
꽃병

제2부 내 안의 물소리

폭포·1
폭포·2
폭포·3
시냇가에서
밤바다
우물 속에는
바다·1
바다·2
바다·3
물 위에 살고 싶다
느림이 주는 선물
물의 영토

제3부 어머니의 바다

開眼개안
산그늘 주유소
기척
출렁거림
집념의 한판승
어머니의 방
스친다는 것·1
스친다는 것·2
어머니의 섬
難聽난청
그대 안의 꽃
열쇠
유채꽃, 그 바다
그대, 소중한 까닭은
봄 앓이
그럴지라도

제4부 光광내기

고소공포증
마른 꽃
가방 속
겨울나무
빈 방
내가 사는 집엔
천사
집수리
쓰레기를 殮염하다
光광내기
바늘과 실
더 낮은 곳으로
잃어버린 것
생선구이처럼
휴지통·1
휴지통·2
밀걸레
누군가에겐

제5부 길 위에서

풍선
출근길
어느새 벚꽃지다
내부수리 중
산, 산, 산
노숙자
컴퍼스와 자
鳶연·1
鳶연·2
번개 모임
돌담
동산과 부동산
門문
해운대, 여기
꽃길에서
호수공원
오대산 숲

제6부 음악의 집

퉁소·1
퉁소·2
관현악지휘
피아노 앞에서
음악이 있는 집·1
음악이 있는 집·2
발성법
지휘하는 어린 손
케이크를 작곡하다
바이올린 사랑·1
바이올린 사랑·2
어느 피아니스트의 고백
피아노가 있는 방·1
피아노가 있는 방·2
피아노가 있는 방·3
피아노가 있는 방·4
피아노가 있는 방·5
피아노가 있는 방·6
피아노가 있는 방·7
피아노가 있는 방·8
피아노가 있는 방·9
피아노가 있는 방·10

평설

제1부
풀꽃언덕



부레옥잠

진흙땅 밟아도
사유는 청아하게
잎사귀는 푸르게

마음에
비 오는 날,
푸른 지우산을 들고

물 위를 걸어도
물 같은 사랑에는
결코 젖지 않는,

보랏빛 꽃부리



탄광촌의 풀잎

검은 잎새도
흙 마음이 품어준다

연초록, 진초록
먼지 덮인 검은 초록
생각은 달라도 어우러져 산다

막장 그 캄캄한 길이
언젠가 끝장 날 때까지
삶의 오솔길
한 번 더 걷고 싶어
꼭꼭 접어놓은 검푸른 풀잎 길

애간장 태운 뿌리
흙바람에 묻혀도
외유내강이다.



등산

어제도 오늘도
맘 속 뼛속
멀고도
높은
산,

사람들 모두
암벽 타며 산다.



패랭이꽃

모두들
바닥으로 꺼지지 마라
한탄하지 마라
그대 발아래
빙글빙글 춤추며 반기는
빛 고운 느낌표 하나 있다
부챗살 미소로
네게 전해주는 꽃말,

“언제나 사랑해”



겨울 숲에서

숲의 건반에 누워 본다
신선한 공기
글리산도로 날아드는 산새
종말처럼 드러눕는,
구스타프 말러*의 꿈틀거리는 대지처럼
거대한 나무들이 걸어 나와
잎들은 일제히
바이브레이션으로 우는 날,

내 마른 삭정이와
뱀 껍질 무늬의 잔해를 걷어내며
나는 봄의 연서를 다시 쓴다
새로운 숲의 건반을 두드리려


*낭만시대 마지막 작곡가, 교향곡 제2번 C단조 ?부활?이 있고 ?대지의 노래?는 성악과 관현악을 합친 대작이다.



스파티필름

하얀 초승달처럼
멀고먼 기억처럼

너의 볼멘 깃이
안타까워
애를 쓰지만

사흘이 멀다 하고
토라지는
저, 투정 보아라

그래보니
갈증난 너의 가슴앓이를
내가 딸꾹질 하네.



천리향

네 탓이야 네 탓이야
밟고 다녔더니
풀 한포기 나지 않던 땅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돌 치우고 고랑 파며
나를 묻었더니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가을꽃 향기가
새봄까지 같이 가잔다.



액자 속의 풍경

탁자 위의 찻잔에는
눈물 그렁그렁
배불뚝이 꽃병엔
풀꽃이 진다

액자 속,
새 한 마리
찻잔 위를 날고

창 너머
주마등을 끌고 가는
시월 바람 시리다.



백목련

성당,
초록 정원 한 켠

겨울 커튼 젖히고
얼굴 쏘옥 내민
순백의 여인

삐걱거리는 이층 창가
파이프오르간 선율 사이로
실눈을 뜬다

바람 따라 질척질척
덧칠하는 강
살얼음이 두려운데

일찌감치
봄 햇살 끌어당기려
미사포 쓴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