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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한국경제 이야기 2 : 노태우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민주화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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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이장규
  • 출판사 : 살림
  • 발행 : 2014년 06월 01일
  • 쪽수 : 204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52228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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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역대 대통령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제 정책을 썼을까?

    1988년부터 2012년까지 25여 년간,
    파란만장한 한국경제를 이끈 대통령들의 정책을
    실증적이고 개관적으로 관찰한 한국경제통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60여 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이 지금은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과 함께 정치민주화도 함께 이룩했다. 이 같은 한국의 경제발전 사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한국경제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세계적인 경제전문가들 주장대로였다면 한국경제는 벌써 망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했던 굵직굵직한 투자들을 한국은 보란 듯이 성공시켰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국민소득 50달러의 최빈국 주제에 공업 자립을 주장한 것이나, 박정희의 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등은 국제적인 웃음거리였다. 그러나 세계가 반대했고 국내외 전문가들이나 언론들이 비난했던 일을 성공시켜서 오늘의 한국경제 기반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오히려 한국경제 발전 과정이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발전해 있다. 이런 경제발전을 과연 어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한국경제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경제 발전 역사는 경제를 전공하는 대학생들에게 필수 과목이다. 당시 정부의 역할과 기업의 활약이 어떠했는지, 자기네 나라가 어떻게 경제대국이 됐는지 과정을 소상히 알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경제에 대해서는 많이 배워도 한국경제에 대해서는 별로 배우는 게 없다. 경제학과에서도 미국에서 유행하는 이론을 가르치기만 할 뿐, 제 나라 경제가 무슨 고초를 겪고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는 관심 밖이다. 경제학을 전공하나 영문학을 공부하나 한국경제를 잘 모르기는 별 차이가 없다.

    한국은 지난 60여 년 동안에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모든 국민이 노력한 결과지만, 그 중심엔 대통령의 리더십이 있었다. 그 중 한국의 민주화 25년을 이끈 대통령들을 살펴보면, 노태우 대통령은 민주화를 감당해내는 가운데 북방 정책의 길을 텄고,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같은 어려운 개혁조치를 단행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은은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복지 정책을 본격화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돈 선거를 청산하고 사회통합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했으며, 이명박은 잇따라 터진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럽의 재정위기 등을 무난히 넘겼다. 구체적인 잘잘못을 떠나, 역대 대통령들이 각자의 시대에 저마다 역할을 해 왔던 셈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경제정책사]는 역대 대통령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제정책을 썼으며 결과가 어떠했는지 정치적인 논리를 떠나 실증적이고 개관적인 관찰을 통해 기술하였다.
    이 책은,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의록을 담은 저자의 저서 [대통령의 경제학]을 쉽게 풀어서 재구성했으며, 일반인들이 전문 지식이나 경제용어를 몰라도 술술 읽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해방 이후의 현대 한국경제사를 리더십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경제와 대통령의 리더십을 정확하고 균형 있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 노태우 시대
    경제는 실패, 개혁은 성공, 김영삼 시대
    위기를 극복하고 복지를 말하다, 김대중 시대
    비주류 대통령, 노무현 시대
    CEO 대통령, 이명박 시대

    한국경제 일지(1988~2012)
    주요 경제지표(1988~2012)

    본문중에서

    노태우는 다른 것은 몰라도 북방 정책에 관한한 뽐낼 만하다. 당시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는 외교적으로도 중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경제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 가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노태우는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재임 기간에 수교한 공산권 국가가 무려 37개국이나 됐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할 수 있었던 것은 노태우가 시대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고 북방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했던 결과였다.
    사실 정부 안에서 조차 북방 정책을 둘러싸고 찬반이 엇갈렸다. 외무부(지금의 외교부)는 북방 정책에 적극적이었지만, 경제부처들은 소극적이었다. 공산국가들이 대부분 수교를 대가로 경제협력이라는 막대한 뒷돈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를 감당해야 할 경제부처들은 자연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태우가 “돈이 들더라도 공산권 수교는 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고수한 결과로 북방 정책은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 pp.29~30)

    정부는 자신만만했다. OECD 가입을 계기로 자본 시장을 과감히 개방했고, 신생 종금사들이 홍콩 금융시장에서 외자를 끌어들여 한국기업에게 빌려 주는 일도 예사로 벌어졌다. 그들은 돈만 빌려 오는 것이 아니고, 대박을 노리고 위험부담이 높은 싸구려 정크본드를 대량으로 사들이기도 했다.
    국내 금리보다 낮은 외채가 들어올 수 있게 되자 기업들은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등의 신규 사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고, 부채비율(30대 재벌 기준)은 350~400%로 높아졌다. 그러나 원화가치가 계속 유지되는 한 기업은 외채를 많이 빌릴수록 좋았다. 재수가 좋으면 싼 금리에 더해 환차익까지 누릴 수도 있었다.
    외국투자자들도 ‘설마 한국에 돈을 떼일까?’ 하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한국기업들에 돈을 빌려 줬다. 수출이 줄어들어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는 데도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원화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엔화나 중국의 위안화는 같은 기간에 20~30%씩 절하되는 판에 유독 한국의 원화만 3년 내내 평균 환율이 달러 당 800원대를 유지됐으니 수출은 죽을 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김영삼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출은 부진한데 소비재 수입이 급증하고 해외여행 자유화까지 겹쳐 급기야 1996년에는 237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외환보유고에 육박하는 적자를 낸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금융기관들이 해외영업 규제에서 풀려 마음대로 외자를 끌어들였다. 그것도 정부가 장기 차입은 규제하고 단기 차입만 허용했기 때문에 1년 만기 이하의 단기 외채 도입이 크게 늘었다. 이렇게 총 외채는 1993년 439억 달러에서 1996년에는 1,047억 달러로 급속히 불어났다.
    (/ pp.52~53)

    “금고 열쇠를 넘겨받아 열어 보니 1,000원짜리 한 장 없고, 빚 문서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G7조차 약속했던 80억 달러를 못 주겠다고 한다. 외채 만기를 연장해 주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모라토리엄(moratorium, 채무 불이행)으로 갈 수밖에 없다.”
    김대중은 훗날 자서전에서 “달러가 생긴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야 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당선자 신분이었던 66일 동안 이미 그는 사실상의 대통령으로서 IMF와의 협상을 지시하고 주도했다.
    김대중이 당선되자 일부에서는 불안해 했다. 그동안의 주장과 노선을 감안할 때 ‘좌파적’인 정책을 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IMF도 그런 점을 미심쩍어했다. 그러나 경제상황이 좌·우파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김대중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주장한 ‘대중경제론’이 아니라 IMF와 미국의 신뢰를 얻는 일이었다.
    IMF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의 재무차관이 워싱턴에서 날아와 김대중 당선자를 만났다. 과연 구제금융을 해 줄 만한 지 저울질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은 정리해고 등 노동 시장 개혁과 과감한 개방 정책 등을 골자로 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면접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은 벼랑 끝 상황에서도 노련하게 대처했다. 표를 얻기 위해 남발했던 선거 공약들 대신 위기 타개를 위한 현실적인 정책들을 하나하나 챙겼다. 우선 인사부터 예상을 깼다. 경제 분야는 선거 캠프 때부터 활약했던 측근들을 배제하고 전문 관료 위주로 내각을 구성했다. 측근이었던 김태동을 첫 경제수석에 기용했으나 불과 3개월 만에 경질하고 경제기획원 관료출신인 강봉균을 앉힌 것이 대표적인 예다. 기업과 은행의 부실 문제를 감당해야 할 금융위원장에는 적군 이회창 캠프의 경제참모였던 이헌재를 앉히고 전권을 일임한 것도 전혀 뜻밖이었다. 이헌재는 비록 적진의 참모였으나 김대중의 신임 속에 재정경제부 장관까지 하며 재벌 개혁과 은행 개혁을 강력히 밀어붙일 수 있었다.
    (/ pp.70~71)

    노무현이 한미 FTA를 결심하게 결정적인 계기는 지극히 비정치적이고 실무적인 차원에서 비롯됐다. 통상산업본부장 김현종으로부터 한미 FTA 관련 보고를 받고 나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한 번 결심이 서자 주저하지 않고 추진했던 것이다.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의 반대가 뻔했던 정책을 그처럼 단호하게 결심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노무현의 한미 FTA 결심에 보수층은 놀랐고,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노사모를 비롯한 지지세력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경제측근으로 각별한 신임을 받았고 노무현 경제를 선봉에서 이끌던 진보성향의 경제학자 이정우와 정태인 등은 ‘잘못된 정책’이라며 노골적으로 노무현의 결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노무현의 측근이었던 김병준은 ‘참여 정권 경제 5년’에서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처음에 대통령은 나라를 팔아먹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다. 세계 최대이자 최강인 시장과 경쟁을 하는 것 아닌가. 나도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대통령은 개방하지 않고 발전하는 국가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폐쇄하면 망하는 외길이지만, 개방하면 우리 노력 여하에 따라 성패의 갈림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무현은 집권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한미 FTA를 반대하는 농어민 문제를 다루는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특단의 의지였다. 한미 FTA로 정치적 입장이 얼마나 난감해지겠는가. 아무런 이득이 없다. 한미 FTA는 정치적으로는 손해지만 국가산업과 경제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무현은 좌우 이데올로기를 떠나 어느새 ‘개방론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지지자들을 향해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요구가 상충될 때 국가지도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자신은 지지자들의 표를 잃더라도 국가 이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무현이 판을 벌여 놓은 한미 FTA는 결국 다음 정권인 이명박 정권에 와서야 어렵사리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노무현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 pp.110~112)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 골간을 담은 소위 ‘747 공약’은 공교롭게도 15년 전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 5개년계획’의 운명과 매우 흡사했다.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많은 참모와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라든지, 집권 직후 각종 개혁적 변화를 다짐했음에도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된 것 등이 그랬다. 비행기에 비유됐던 747 공약은 그럴듯한 청사진이었고, 악화일로의 성장 동력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하는 당시의 고민을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친기업을 표방하고 나섰을 당시, 처음부터 여론이 747 공약에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감세 정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기업 정서가 심해지고 경쟁력 강화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 기류가 강했다. 기업을 핍박할 게 아니라 격려해야 일자리도 늘어난다는 주장이 새삼 설득력을 얻었다. 공기업 개혁을 약속하고 시장원리를 적극적으로 창달하겠다는 공약들이 제법 먹혀들었다. 슬로건 자체가 ‘노동자가 대우 잘 받는 나라’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바뀐 셈이었다. 그랬기에 기업인 출신이 많은 표를 던졌던 것이다. 이명박은 전임 참여정부와의 차별화를 분명히 했고, 유권자들은 그런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따라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해서 다수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747 공약을 강력히 추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이명박 정책 중 가장 심한 지탄을 받아 결국 포기를 선언했던 ‘대운하 사업’도 선거공약에 버젓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 pp.141~142)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현 서강대학교 부총장. 중앙일보 뉴욕특파원, 경제부장, 일본총국장, 편집국장, 경제대기자를 역임했다. 모든 경제부처를 출입한 전천후 경제기자였으며, 10년간 기명 컬럼을 썼다. 저널리스트 생활을 마감한 뒤 하이트진로 대표이사 부회장과 삼정 KPMG 부회장 등을 지냈다. 모교인 서강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서 ‘대통령의 경제학’을 4년째 강의하고 있다.
    세계경제 흐름의 변화 속에서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많은 글을 썼으며, BRICs, 이머징마켓, 자원전쟁 등에 주목해 [19단의 비밀, 다음은 인도다] [카스피해 에너지 전쟁] 등의 저서를 펴낸 바 있다. 또한 [경제는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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