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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침묵 : 진보를 비롯한 오늘날의 파괴적 신화에 대하여

원제 : The Silence Of Animals: On Progress And Other Modern My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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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우리는 어떤 신화 속에 살고 있는가?|

    1950년대 초, 외계인이 지구 종말의 날을 점지했다고 믿는 사이비 종교집단이 있었다. 예언의 그날, 물론 지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신도들은 실망은커녕 이전보다 더 열렬하게 포교 활동을 했다. 이들 종교집단을 연구한 사회심리학자 리언 페스팅거는 현실이 자기 믿음을 배반할 경우 인간은 믿음을 버리는 게 아니라 상반되는 현실을 믿음에 맞게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정성껏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른바 ‘인지 부조화 이론’의 대표 사례다.
    당신이 인간의 이성을 믿는다면 종교집단의 맹신은 일탈의 사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존 그레이는 인지 부조화야말로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말한다. 화제작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 인간의 특징을 ‘파괴적이고 약탈적인 종’이라는 사실에서 찾았던 존 그레이가 이번에는 ‘신화를 만들어 내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며 인류는 진보할 것’이라는 휴머니스트들의 믿음은 비행접시를 믿는 종교집단의 맹신과 다를 바 없으며, 오히려 그보다 강력한, 그리고 해로운 신화라고 말한다.

    |행복과 자아실현, 오늘날 최악의 신화들|

    휴머니스트들은 인류가 신화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떠들지만, 자신들이 믿는 문명의 진보가 사실이 아니고 신념이며, 또 다른 신화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진보라는 신화는 싸구려 음악처럼 뇌를 마비시키면서 사기를 진작시킨다." 그레이는 행복과 자아실현이야말로 그러한 신화 가운데서도 최악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자아대로 되어야만 행복해진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는 이들 신화는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상정하고, 그에 미치지 못한 삶은 비루하고 무의미한 삶으로 격하시킨다.
    ‘진정한 자아’란 대체 무엇인가? 낭만주의의 이상에 기댄 이 관념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고유성과 독창성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삶의 본질인 공허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신화일 뿐이라는 것이 존 그레이의 주장이다. "이 신화는 단 한 종류의 삶에서만, 아니면 아주 소수의 비슷비슷한 삶에서만 당신의 삶이 꽃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기다리면서, 혹은 스스로가 가짜라고 의심하면서 만성적인 비참함에 빠져 살아간다.

    |침묵을 향한 인간의 열렬한, 그러나 헛된 욕구|

    [동물들의 침묵]이 조지프 콘래드의 단편 [진보의 전초기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콘래드야말로 제국주의 시대에 휴머니스트들의 신화인 ‘진보’가 어떻게 인류 역사를 오명에 빠뜨렸는가를 예민하게 인식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콘래드는, 벨기에 제국주의자들에게서 식민주의의 야만성을 발견한다. 쿠르초 말라파르테도, 아서 쾨슬러도, 조지 오웰도 진보에 대한 믿음이 배신당하고, 문명이 순식간에 야만으로 전락한 폐허의 현장에서 인간이 처한 실존적 진실을 깨닫는다. "‘야만인’과 ‘문명인’이라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과 영원히 전쟁을 치르는 ‘인간 동물’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들 신화가 만든 "의미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레이는 인간이 신화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며 J. G. 발라드의 묵시록적 소설에서 "의미의 폐허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신화의 힘에 주목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신화를 선택하느냐"는 것이다. 그에게 좋은 신화는 "환상을 부풀리는 게 아니라 환상을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 보르헤스, T. E. 흄 등은 인간 삶의 최종 상태가 질서가 아닌 혼돈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들의 독특한 ‘체념’의 정서로부터 그레이는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를 발견한다. "세계에 의미가 부여돼 있지 않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의미에 갇힐 일도 없다."
    존 그레이는 ‘행동’을 통해 인간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그 어떤 믿음도 거부한다. 그러나 ‘행동’의 반대편에서 인간사의 모든 갈등과 충돌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묵’을 추구하는 인간의 또 다른 욕구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다. 갈등과 충돌은 인간 정신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속성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아의 평온을 위해 침묵을 수련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막스 피카르트 같은 이는 동물의 침묵은 구원되지 않는 침묵이기에 인간의 침묵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았지만, 존 그레이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그는 "인간 동물은 자신의 속성대로 존재하는 데서 놓여나기 위해 침묵에 기대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일종의 타고난 권리로 침묵을 즐긴다"고 하며 인간의 침묵에 그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의 침묵이 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책 제목인 "동물들의 침묵"은 그래서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폐허인 현실에서 인간이라는 특수한 종種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인간 동물의 오만에 대한 비판이자 그런 인간이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동물들의 침묵에 대한 헌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에 대한 희망 없이, 의미를 추구하려는 노력 없이, 환상이라는 위안 없이’ 사는 삶은 대체 어떤 삶일까? 전작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그냥 바라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끝을 맺는다. [동물들의 침묵]은 그런 삶의 형상을 ‘동물들의 침묵’을 통해, 삶의 혼돈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프로이트, 마우트너, 베케트, 그리고 J. A. 베이커 등의 삶과 그들의 유산을 통해 흐릿하게나마 보여 준다.
    [동물들의 침묵]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진행한 인터뷰에서 존 그레이는 "유토피아적 비전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그 비전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제를 쓰고 인터뷰를 진행한 평론가 문강형준 씨의 말대로 그레이의 사유는 한국에서, 비록 새로운 행동은 아닐지라도 새로운 성찰을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다중적인 내면과 행동"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성찰로 이어질 것이다.

    목차

    1장 오래된 혼돈
    진보의 부름 _ 얼어붙은 말과 벽돌 사막 _ 보이지 않는 잉크, 벗겨진 가죽, 흰개미 _ 황제의 무덤 _ 둘에 둘은 다섯 _ 독재자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일 _ 물고기 철학자와 자유주의자 _ 종이로 만든 옷, 그랜드 피아노, 10억 개의 풀잎 _ 금융의 연금술사 _ 휴머니즘과 비행접시

    2장 마지막 생각의 너머로
    프로이트의 담배와 열반으로 가는 긴 우회로 _ 환상에서 허구로 _ 최고의 허구 _ 행복, 없어도 되는 허구 _ 융, 아리아인의 무의식, 신화는 무엇이 아닌가 _ 근미래에 대한 신화들 _ 틀뢴, 그리고 두 개의 오후가 없는 역사 _ 언어와 재 _ 신이 없는 신비주의

    3장 또 다른 햇빛
    빛에 잠긴 프리즘 _ 동물들의 침묵 _ 대영 박물관의 방문객 _ 무한한 도시들 _ 숨넘어갈 듯한 기침과 초록 코트 _ 사라지는 행동 _ 무대 뒤의 낯선 사람

    해제+저자 인터뷰
    존 그레이를 읽는다는 것_문강형준

    참고 문헌
    감사의 글

    본문중에서

    동물에게는 침묵이 자연적인 휴식의 상태이지만 인간에게는 내면의 소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침묵을 추구하지만 동물은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침묵 속에서 살아간다.
    (/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존 그레이(John Gray)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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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스퍼드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하버드와 예일 등에서 방문 교수를 지내다 2008년까지 런던 정경 대학(LSE) 유럽 사상 교수로 재직했다. 지금은 [가디언]과 [뉴 스테이츠먼]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구 계몽주의는 끝나지 않은 기획이며, 그 본질은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관념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나치즘과 공산주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 테러와의 전쟁 등, 세상을 전체화하려는 모든 기획에 일관된 칼날을 들이댄다. 그의 글은 숨 가쁠 정도로 집요하고 예리하지만 한편으로 광활한 사색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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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시카고 대학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글로벌 거버넌스, 물질세계와 사회 등을 주제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물건 이야기』, 『큐브, 칸막이 사무실의 은밀한 역사』, 『건강 격차』, 『계몽주의 2.0』, 『친절한 파시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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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강형준 해제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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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평론가,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위스콘신대(밀워키) 영문과에서 영문학과 문화이론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저서로 [파국의 지형학],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아이돌](공저), 역서로 [광신], [권력을 이긴 사람들], [루이비통이 된 푸코](공역), [비평가의 임무](근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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