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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훈 소설집 『이타방』. 이태원에서 태어나거나 자라서 유·소년기와 청년시절을 함께 보낸 여러 남녀의 이야기를 그려낸 표제작 《이타방》을 비롯하여, 저수지가 있던 ‘수탐골’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듯이 살아가는 할아버지 이야기인 《아무 곳에도 없는 마을》 등 모두 5편의 중단편 소설을 수록했다.

데뷔 20년 기념해 두 번째 소설집『이타방』출간한 소설가 이예훈

대전의 중진 소설가 이예훈 씨가 데뷔 20년을 기념함과 동시에 첫 작품집 『딸들의 방』 출간 이후 10년 만에 두 번째 작품집 『이타방』(이태원의 옛 별칭)을 출간했다.

『이타방』의 표제작 「이타방」은 미군과 양공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고 이태원에서 태어나거나 자라서 유-소년기와 청년시절을 함께 보낸 여러 남녀의 이야기이다. 중편소설 분량인 「이타방」은 주인공 문수의 성장기로 시작하여 또 다른 주인공인 화영이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문수, 형근의 관계, 또 이들과 철진이라는 친구들의 관계 등을 다룬 것이다.

이외에 『이타방』에는 저수지가 있던 ‘수탐골’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듯이 살아가는 할아버지 이야기인 「아무 곳에도 없는 마을」, 2002년 서울월드컵이 열리던 때 붉은 물결을 보호색으로 삼으며 거리에서 살아가는 아이와 가출한 딸을 찾아 나선 여교사와 국제미아가 된 채 정처 없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인 「레드서머」, 장애인 윤지숙과 그 가족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왜곡되고 뒤틀린 시선을 드러내는 「성전의 문간방」 등 모두 5편의 중단편 소설을 수록했다.

이렇듯 이예훈 작가의 『이타방』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 배치된 내 삶과 그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역사와 그 과정에서 받은 상처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며 살고 있는지 돌이켜 보게 된다. 그런 작가의 눈길은 그늘지고 소외된 곳에 머문다. 그러다가 그 눈길은 존재의 그림자를 안고 잔잔하고 찬찬하게 흐르며 저물어가는 깊은 물길이 된다. 타인의 삶을 껴안고 다독거리며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어느 순간 그 눈길은 들녘같이 허허로운 무명의 삶에 스며들게 된다. 마치 남의 처지와 신세를 자기화하듯 온 몸으로 감싸는 그 순간에 작가정신은 공감의 진폭을 극대화하며 삶에 대한 통찰로 보편적 정서를 확보하는 것이다.

문단 데뷔 20년을 기념해 『이타방』을 펴낸 이예훈 작가는 소설 쓰기를 통해 말을 잃고 사는 사람들이 하지 못한 표현을 간절히 대언하면서 그 삶을 애잔하고 넉넉하게 품어 안음으로써 자신이 쓴 소설이 나와 남을 이해하고 남과 소통하는 가장 훌륭한 방식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 작가의 말 | 살아서 전설이 된 것들을 위해

아무 곳에도 없는 마을
이 편한 세상
레드서머
이타방
성전의 문간방

■ 해설 | 시공간의 뿌리에 스미는 눈길·권덕하

수록 소설들

●…「아무도 없는 마을」은 이예훈 작가의 여느 작품들에서도 반복해 등장하는 공간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저수지가 있던 ‘수탐골’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듯이 살아가는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사라진 ‘수탐들’은 단순한 회고적인 이상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도 엄연히 인생의 질곡이 있고 신산한 삶의 현장이다. 주인공 노인에게 ‘수탐들’은 그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가치가 있던 곳이다. ‘수탐들’이 공단으로 바뀐 뒤에는 그런 가치마저 상실했다고 주인공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일제식민지, 미군점령지였다가 이제 자본이 지배하는 공단으로 바뀌면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 번도 땅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소외된 상황을 작가는 ‘수탐들’의 한 노인을 통해 절실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 편한 세상」은 대학에서 운영하는 평생교육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거의 퇴직한 사람들이거나 중년 주부들인 수강생은 저마다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중 하나인 ‘명’이라는 인물이 겪어온 삶은 우리 사회 월급생활자의 전형이라 하겠다. 가족을 부양하느라 혼기를 놓치고 30년이 넘게 은행창구와 집밖에 모르고 살다가 퇴직하고 나서 퇴직금마저 주식 거래로 날린다.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서는 완벽하고 유능한 존재였으나 거기에서 떨어져 나오자 직장 바깥의 세상살이에는 전적으로 무능함을 드러낸다. 이런 인물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여러 인물들이 모여 수강하는 것은 ‘외국여행을 위한 필수영어반’이다. 이들의 외국여행은 이 땅의 불편한 것들로부터 잠시나마 떠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다. 수강생들은 원했던 대로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을 하게 되고, 여행 일정의 마지막 날 밤 술집에서 서로 격의 없는 취중진담을 시작하지만, ‘마이클’이 고백하는 아내의 죽음에 관해 의견을 나누다가 급기야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그 대화는 소란으로 끝나게 된다.

●…「레드서머」는 2002년 서울월드컵이 열리던 그때, 붉은 물결을 보호색으로 삼고 거리에서 살아가는 아이와 가출한 딸을 찾아 나선 여교사, 그리고 국제미아가 된 채 정처 없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들의 삶이 교차하는 곳은 ‘모란공원’이다. 그곳에서 딸은 자기를 찾아 나선 엄마와 남자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본다. 제 속에 악마가 살고 있고 그것이 제 아버지를 죽게 했다고 믿는 아이는 엄마와 소통할 수 없어 집을 나와 붉은 물결에 휩쓸린다. 도시에서 소통하지 못하며 살다가 결국 붕괴된 가족들, 욕망과 좌절로 인한 내핍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사람들을 통해 작가는 삶의 명암을 드러내고 있다.

●…「이타방」은 중편 분량의 무게감 있는 작가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외국인들이 많이 생활하는 이태원이 소설의 배경이지만 미군과 양공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다. 「이타방」은 이태원에서 태어나거나 자라서 유-소년기와 청년시절을 보낸 남녀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문수의 성장기로 시작하여 또 다른 주인공인 화영이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문수, 형근의 관계, 이들과 철진이라는 친구들의 관계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개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을 묘사하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들의 삶을 통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역사를 드러내며 그것이 현재에도 그들 개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추적하고 있다. 이예훈 작가는 이태원이 배경인 소설의 제목을 조선시대의 별칭이었던 ‘이타방’이라고 붙임으로써 이태원에 짙게 배어 있는 비극적 질곡을 인물들의 삶을 통해 드러내려는 것이다.

●…「성전의 문간방」은 장애인―‘되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소설로 소설가였던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장애인 윤지숙은 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왜곡되고 뒤틀린 시선을 드러낸다. 그런 시선은 지숙에게도 내재화되어 있다. 우리가 의식하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시차를 통해 이 소설은 의식의 한계와 비정상의 정상을 연출하고 있다. 자기 몸을 사용하여 나와 남의 시선이 교차하는 몸이 환상의 장소로 기능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남이 설정한 역할을 거부하고 본능에 솔직한 몸에 귀 기울이는 노력의 생명력을 무시하는 남들의 완고한 의식과 편견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