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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에세이 : 예술의 눈으로 세상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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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진중권
  • 출판사 : 씨네21북스
  • 발행 : 2013년 09월 12일
  • 쪽수 : 324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84317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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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까지, 진중권이 펼쳐놓는 미학적 사유의 장
다양한 영역과 주제를 아우르는 통섭의 관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예술’까지, 진중권이 예술, 철학, 정치, 사회를 아우르는 미학적 사유의 장을 펼친다. 정치논객 이전에 미학자로서 저자가 그간 던져온 예술과 세상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쉼 없는 고찰을 만날 수 있다.
삶과 죽음, 성, 기술, 정치,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예술에 대한 고찰을 전방위로 확장시킨 사색의 결과물. 그 중심에 선 것은 진중권의 ‘미학자’로서의 정체성이다. 저자는 이 책의 글감이 강의를 위한 독서, 또 다른 책의 집필 과정, 때로는 그날 읽은 기사에서 얻어지곤 했다고 밝힌다. 그렇게 무심히 얻어진 듯한 소재들은, 필연적으로 미학적 사유의 테두리 안에서 방향과 자리를 잡는다. 저자는 좁은 눈으로 예술만을 바라보지 않으며, 세상을 이야기할 때면 미학자로서 중심을 잡는다. 이 독서는 미학, 즉 예술의 눈으로 세상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다양한 영역과 주제를 아우르는 통섭의 관점을 체득하도록 이끈다.

종횡무진, 예술의 세계를 탐닉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포스트모던 이후까지, 회화, 사진, 영화, 희곡, 건축 등 다양한 분야와 시대를 저자는 예술의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글을 풀어간다. 책의 문을 여는 1장에서는 서양문화의 근간인 ‘고대 그리스’의 희곡 작품에 담긴 인간 삶에 대한 성찰을,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이르는 예술가들을 다룬 8장에서는 다채로운 예술가들의 작업 방식을 살펴본다. 몸을 날려 물질세계의 법칙을 벗어나는 예술을 선보인 이브 클랭, 가촉적 체험을 통해 현상학적 지각을 실험하는 올라퍼 엘리아슨,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예술에 끌어들인 제프 월과 구르스키와 같은 예술가들의 독특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사건의 해결이 플롯의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는 인간사를 바라보는 ‘내재적’ 관점이, 인간사가 신의 역사(役事)가 아니라 인간의 업보, 즉 인간들 자신이 한 행위의 결과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_15쪽

정확한 재현의 과제를 카메라가 넘겨받은 이상, 회화는 더 이상 거울일 수가 없다. 이제 회화는 재현이 아니라 ‘구성’, 인식은 반영이 아니라 ‘구축’으로 여겨진다. _231쪽
구르스키의 사진 역시 모종의 ‘몽타주’다. 하지만 그것은 불연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시점들 사이의 균열을 완벽하게 봉합할 수 있게 해준다. 구르스키의 사진은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적 ‘숭고함’을 보여준다. (......) 벤야민이 말한 신(新) 천사의 눈앞에 펼쳐진다는 그 거대한 파국적 드라마의 숭고함이랄까? _259, 260쪽

더불어 예술가와 작품뿐 아니라, 박물관이나 평론 같은 바깥의 요소들이 예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물관을 ‘예술의 무덤’으로 정의한 아도르노의 글을 필두로 뒤샹, 뷔랑, 크리스토 같은 예술가들이 박물관의 권위에 어떤 식으로 도전하고 흡수되었는지, 그리고 평론이 ‘예술의 시종’을 넘어서 어떻게 예술사의 변화를 주도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9장 평론에 관하여)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예술을 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 (......)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예술가들이 박물관에 들여보낸 일상의 사물들은 죽은 수령의 시체처럼 그 묘지에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_245쪽
결국 비평가 역시 의미를 생산하는 창작자인 셈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저자나 비평가나 공동의 대상을 놓고 동일하게 어려운 과제를 떠맡는다. 바로 ‘언어’를 조직하는 과제다. "훌륭한 창조자와 겸손한 시종. 각자 제자리를 지키면 둘 다 필요하다." 저자와 비평가의 관계를 설명하는 낡은 비유는 여기서 무너진다. 바르트는 말한다. "저자와 비평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작가가 있을 뿐이다." _282쪽

'죽음'을 바라보는 예술

예술은 항상 '추'에 관심을 가진다. 삶에 대한 욕망의 반대편에는 추함과 더불어 해체, 즉 죽음에 대한 이끌림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서문에서 "장으로 묶고 보니,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관련하여 바타유가 ‘기저유물론’이라 부른 해체의 경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들어온다"라고 밝힌 대로, 저자는 예술가들의 작품(또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죽음(해체)의 욕망을 들여다본다. 미시마 유키오의 유미주의적 죽음, 바타유와 마송을 통해 본 에로티즘과 죽음 충동의 관계(3장 언캐니), 워홀, 폴록, 만초니, 백남준의 분변 예술(4장 분변증), 벨머의 가학적으로 해체된 인형(2장 인형의 꿈) 등, 예술에 드러난 죽음 욕망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본다.
문명은 중력을 이기고 수직으로 상승하려 하고, 자연은 이를 다시 수평으로 되돌리려 한다. 워홀의 소변과 만초니의 대변은 수직의 스트레스에서 수평의 안식으로 돌아가려는 은밀한 욕망의 표출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의 충동'의 예술적 승화라 해야 할 것이다. _115쪽

기술미학에 대한 관심

중세적 판타지가 컴퓨터 게임으로 박진감 넘치게 구현되고, 소설에 등장하는 해리 포터의 투명망토가 현실화되는 등 기술적 이성이 거의 ‘마술’적 수준에 다다른 반면,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되는 이 시대, ‘기술적 상상력’이라 표현된 기술과 예술의 ‘융합’에 대해 고찰한다. 1세대 컴퓨터 예술가 가와노 히로시를 비롯하여 테크놀로지를 예술에 끌어들인 작가들, 고대 신화 속 피그말리온에서 미디어 예술가 백남준에 이르는 예술과 기술의 결합의 예를 살펴본다.(7장 기술미학)

오늘날 ‘네오’라는 접두사를 달고 중세주의가 부활한 것 역시 대중이 이 사회에 뭔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정보 전달의 플랫폼이 바뀌면서 대중의 의식에도 변화가 생긴다. 계몽의 시대에는 대중에게 책을 읽혔지만, 오늘날 정보는 더 이상 읽는 것(text)이 아니라 보거나(image) 듣는(sound) 것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라틴어 성경책을 못 읽는 대중에게 성화를 그려 보여주고, 탁발승단이 무지한 대중에게 구술체의 설교를 들려주던 중세와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이다. _191, 192쪽

기술적 상상력, ‘융합’이 어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겠는가. 그것은 사회가 문화로 뒷받침해줘야 할 부분이다. 수많은 연구, 창작, 실험, 비평,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수많은 시행착오들. 그 시간과 비용을 사회가 기꺼이 감당해줘야 하는데, 알다시피 한국사회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기술에 투자한 것은 곧바로 회수가 되지만, 문화적 저변에 투자하는 것은 회수 기간이 길다. 아니 회수가 될지조차 불투명하다. _202쪽

미학자 진중권이 꿈꾸는 어떤 정치

예술은 정치에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는가. 저자는 ‘취향’을 둘러싼 예술사의 논쟁을 통해 소통을 위해 필요한 전제, 상식과 공통감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또한 예술이 체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고, 주류 문화에 의해 전유되는 ‘회복’의 상황에 대한 제안을 제시한다.
냉전시대 미국에서 모더니즘 예술은 매카시즘의 공격을 받지만, 그 이후 역설적으로 추상표현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선전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티셔츠와 광고에 등장하고, ‘예술 문화’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었던 뒤샹의 변기는 이제 20세기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렇게 주류와 체제에 의해 문화적으로 전유되고 마는 ‘회복’의 상황의 대안으로 저자는 상황주의자들의 ‘전환’ 전략을 제시한다. (2012년 G20 포스터에 쥐를 그려넣어 슬쩍 그 기능을 뒤집어버린 사건이 그 예가 될 만하다) 그리고 이 ‘전환’이 다양한 수준에서, 소수의 지식인이 아니라 다수의 대중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진보와 개혁을 말하고자 하는 자라면 낡은 질서를 고집하는 이들보다 지성과 미감과 도덕성 측면에서 우월해야 한다. 하지만 감히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우리는 지성, 감성, 도덕성 면에서 사회적 평균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으면서 그저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근거 없는 ‘우월감’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바로 그 얄팍한 위선에 대한 반감이 민주적 에토스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_150쪽

로마인들은 ‘취미에 대해 논쟁할 수 없다’고 했지만 논쟁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취미뿐이겠는가? 오늘날 이미 많은 이들이 ‘정의에 대해서는 논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에 팽배한 정치적 환멸은 바로 이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물론 사적 이해를 배제한 무관심성의 상태에서, 칸트가 말하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의 위치로 올라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사회는 이른바 ‘상식(common sense)’을 갖게 된다. 사실 우리 사회에 결여된 게 바로 그것이 아닌가. _158쪽

목차

1 그리스 비극에 관하여 -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의 삶을 묻다
에우리피데스가 신을 불러낸 까닭은: 플롯과 특수 효과
인간이 불행해지는 두 가지 방식: 하마르티아와 휘브리스
페르소나: 인격이 된 가면

2 인형의 꿈 - 가상의 존재에 투사한 욕망
허수아비: 허수아비의 정체와 주술적 흔적
벼룩시장에서 태어나다: 마티스의 '영감'에서 네자르의 '작품'까지
죽음과 사랑: 벨머의 인형과 섹슈얼리티
로봇 부처: 언캐니와 호감 사이
기계를 닮은 인간, 인간을 닮은 기계: 우스움과 섬뜩함의 이유

3 언캐니- 죽음에 이끌리다
라스푸틴의 예언: 대제국의 신학적 환상
죽음 앞의 인간: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과 유미주의
에로티즘의 성(聖)과 속(俗): 극단적 공포, 성스런 황홀경과 결합하다
죽음의 충동: [대사들]과 대상의 응시
시각성의 광기: 근대의 세 가지 시각 체제

4 분변증- 예술의 분변증에 깔린 충동
문명의 스트레스를 배설하라: 모차르트의 분변증적 표현
생명에서 죽음으로: 워홀의 소변과 만초니의 대변
예술, 죽음의 충동을 향하다: 두 개의 유물론

5 성과 육체와 예술- 예술이 육체를 다루는 방식
게이 미학에 관하여: 동성애 예술과 캠프
정체성이라는 문제: 마르셀 뒤샹의 여성적 자아
리펜슈탈의 육체미학: 감성 차원의 파시즘

6 예술과 정치- 예술이 정치에 제시하는 것
우리가 잃어버린 것: 민주주의적 에토스와 사랑
상식의 부재 속에서 소통하기: 공통감에 관하여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애국과 반체제 논리의 역설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회복과 전환

7 기술미학- 융합 시대의 기술과 예술
최초의 컴퓨터 예술가, 최후의 공산주의자: 가와노 히로시를 추억함
메카니코스: 기술적 한계를 넘어서
마술을 믿습니까: 신중세주의와 디지털 테크놀로지
인문학의 미래: 현대의 대중과 디지털 매체
융합에 관하여: 기술과 예술
영상맹의 시대: 기술적 형상과 그 독해

8 예술가들- 예술에 대해 다시 묻다
허공으로 도약: 클랭의(空)과 선(禪)
빛의 방: '생각'과 '행동' 사이의 체험
세계의 자화상: 거울-회화
신이 없는 신성함: 장소 특정적 예술작품과 그 아우라
박물관은 견고하다: 예술의 무덤
고문을 위한 예술: 어떤 천연덕스러움
컴퓨터의 눈: 사실적이면서 허구적인 구르스키의 사진
사진은 회화처럼: 제프 월의 사진을 통해 본 몽타주의 역사

9 평론에 관하여- 평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평론가라는 기생충: 평론과 인민주의 선동
저자, 비평가, 작가: 롤랑 바르트의 신비평
입법자로서 비평가: 비평가는 누구인가

10 한국미- 한국적 미의 몇 가지 특질
각하의 삽질 미학: 한국적 자연미에 반하는 4대강 사업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인위적' 과장과 '자연적' 일탈
우월함은 어떻게 과시되는가: 편두와 구별 짓기
행복해져라 웃음을 통해: 이질적 언어의 공존과 충돌
거기 해방이 있네: 병신춤이라는 원초적 평등

본문중에서

‘사건의 해결이 플롯의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는 인간사를 바라보는 ‘내재적’ 관점이, 인간사가 신의 역사(役事)가 아니라 인간의 업보, 즉 인간들 자신이 한 행위의 결과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른바 ‘운명’의 행로는 신들의 자의적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들의 상호작용의 벡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에우리피데스가 신을 불러낸 까닭은' 중에서)

잔혹한 처형은 혐오스럽다(repulsive). 하지만 구경꾼들은 그 잔혹함에 강박적으로 끌린다(compulsive). 이 은밀한 매혹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매력은 아마도 우리의 삶을 구조화하는 금령들을 위반하는 데서 나올 것이다. 한때 우리는 죽음, 즉 무기물이었다. 하지만 문명 속에서 그 사실은 망각되고 억압된다. 일상에서 잔혹한 짓을 하는 것이나 보는 것은 금지되지만, 공개처형은 성스러운 국가의 이름으로 그 금지된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 '에로티즘의 성(聖)과 속(俗)' 중에서)

사실 인간은 시각의 주체이기 이전에 대상이었다. 선사시대에 인류는 아마도 늘 어디선가 맹수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갖고 살아갔을 것이다. (......) 이 맥락에서 라캉은 모든 응시는 사악하다고 말한다. "사악한 눈은 마력(fascinum)이다. 그것은 움직임을 구속하고 문자 그대로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힘이다." 이 사악한 응시를 진정시키는 방법이 있다. 동물이 응시의 힘에 의태로 대응한다면, 인간은 그림이나 회화로 거기에 대응한다. 라캉은 "동물 수준에서 관찰되는 의태 현상이 인간의 예술이나 회화라고 하는 것과 유사함"을 확신한다. 한마디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연합으로 응시를 진정시키는 것이 회화라는 것이다.
(/ '죽음의 충동' 중에서)

베르그송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지나치게 기계를 닮으면 졸지에 ‘우습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인간 같은 기계는 섬뜩하나, 기계 같은 인간은 우습다. 섬뜩함과 우스움. 둘은 서로 대립되는 듯하지만 중세와 르네상스까지만 해도 이 두 감정은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 묶여 있었다. 가령 중세 무아사크 수도원의 기둥에 조각된 기괴한 괴물들, 그리고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에 묘사된 괴상한 형상들을 생각해보라. 그것들은 무시무시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희극성’이라는 근대적 감성은 ‘섬뜩함’과 함께 그로테스크라는 공통의 혼합감정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 ‘우스움’과 ‘섬뜩함’은 시대착오적 이념을 반복하는 기계적 경직성의두 효과다. 두 효과는 하나로 합쳐져 그로테스크를 이룬다.
(/ '기계를 닮은 인간, 인간을 닮은 기계' 중에서)

진보와 개혁을 말하고자 하는 자라면 낡은 질서를 고집하는 이들보다 지성과 미감과 도덕성 측면에서 우월해야 한다. 하지만 감히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우리는 지성, 감성, 도덕성 면에서 사회적 평균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으면서 그저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근거 없는 ‘우월
감’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바로 그 얄팍한 위선에 대한 반감이 민주적 에토스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것은 우리 바깥의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에토스인지도 모른다. 그 추위에 지팡이를 짚고 투표장에 나서 는 노인들은 경멸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비록 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은 우리와 다르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그 열정만큼은 우리의 것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비천한 자들(les miserables)’이다. 왜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협력자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중에서)

이 사회에 팽배한 진영 논리도 마찬가지. 동일한 사안이라도 네 편이냐, 내 편이냐에 따라 판단이 180도 달라진다. 그 결과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로마인들은 ‘취미에 대해 논쟁할 수 없다’고 했지만 논쟁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취미뿐이겠는가? 오늘날 이미 많은 이들이 ‘정의에 대해서는 논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에 팽배한 정치적 환멸은 바로 이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물론 사적 이해를 배제한 무관심성의 상태에서, 칸트가 말하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의 위치로 올라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사회는 이른바 ‘상식(common sense)’을 갖게 된다. 사실 우리 사회에 결여된 게 바로 그것이 아닌가.
(/ '상식의 부재 속에서 소통하기' 중에서)

오늘날 ‘네오’라는 접두사를 달고 중세주의가 부활한 것 역시 대중이 이 사회에 뭔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이는 중세가 부활한 이유를 "현대의 헷갈리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사건들을 간단하게 해명해주는 낭만적인 역사물에 대한 필요"에서 찾는다. 현대사회는 한 사람의 영웅적 행위로 바꾸기에는 너무나 거대해졌고, 한 사람이 이성으로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여기서 이 사고와 행위의 무력감은 어떤 보충물을 요구한다. 그 허구적 보충물로 나타난 것이 중세적 환상과 서사라는 얘기다. (......)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정보 전달의 플랫폼이 바뀌면서 대중의 의식에도 변화가 생긴다. 계몽의 시대에는 대중에게 책을 읽혔지만, 오늘날 정보는 더 이상 읽는 것(text)이 아니라 보거나(image) 듣는(sound) 것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라틴어 성경책을 못 읽는 대중에게 성화를 그려 보여주고, 탁발승단이 무지한 대중에게 구술체의 설교를 들려주던 중세와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이다.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시대에 텍스트의 신성함을 고집하는 인문학 연구자들의 집단이 중세의 수도원과 비슷해질 거라 말했다.
(/ '마술을 믿습니까' 중에서)

박물관을 죽음의 장소로 본 것은 발레리와 같은 문화보수주의자만이 아니었다. 가장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도 박물관을 무덤으로 간주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들. 그들은 "박물관을 파괴하라"고 외쳤다. 예술의 미래를 과거에 묶어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프루스트에게는 ‘아직’ 새로운 제도로 보였던 박물관이 미래주의자들에게는 ‘이미’ 낡은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미술관에 변기를 들여놓은 뒤샹을 생각해보라. 당시 이 작품(?)은 전시가 거부되었고, 전시장 한쪽 구석에 놓여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의 변기는 박물관이라는 제도에 대한 분변적(scatological) 조롱, 말하자면 박물관으로 상징되는 예술 제도에 대한 공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물관은 예술을 원래 그것이 속해 있던 생활에서 떼어낸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그 예술을 다시 생활로 돌리기 위해 박물관의 벽을 허물려 했다.
그 뒤로도 여러 작가들이 박물관을 뛰쳐나갔다. 가령 작품을 직접 등에 짊어지고 파리의 거리를 활보했던 다니엘 뷔랑. 하지만 기세 좋게 미술관을 떠났던 탕자들은 얼마 뒤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미술관으로 되돌아왔다. 뒤샹의 변기는? 오늘날 그 변기는 전 세계 박물관에서 가장 탐을 내는 아이템이 되었다. 한마디로, 박물관을 조롱했다는 그 이유로 박물관이라는 무덤 속에 박제되어 들어간 것이다.
(/ '박물관은 견고하다' 중에서)

저자소개

진중권(JUNGKWON CHIN)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63~
출생지 서울
출간도서 59종
판매수 73,876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현재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로 있으며, 기술미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인문학과 게임, 디자인, 공학 등 타분야와의 융합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미학 오디세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이미지 인문학],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진중권이 사랑한 호모 무지쿠스], [미디어 이론]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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