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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 박연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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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박연준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12년 10월 25일
  • 쪽수 : 131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54619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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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나는 사실 아빠처럼 슬프게 생긴 것을 본 적이 없어”
    -사랑하기에 더욱 슬픈 호명, ‘처제’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 안에서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하는 것은 올바른 독서가 아닐지 모른다. 작품 안의 사건이 실제 경험인지, 등장인물이 실제의 인물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한 작품을 오롯이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작가에 대한 이해가 독서를 더욱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작가의 독특한 이력이나 인생 역정이 작품을 이해하는 사전 지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 적절한 독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 마련이며, 이 선택은 독서의 즐거움을 한층 더 깊어지게 한다.
    그런데 여기, 이 두 가지 선택이 모두 무력해지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바로 박연준의 두 번째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그것. 읽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할 법한 다소 충격적인 이 제목의 시집 앞에서, 이것을 시인 자신의 이야기라고 섣부른 추측을 해도 될지, 독자들은 잠시 망설여질 것이다. 하지만 한 편 한 편의 시를 읽어나면서 담담하게 흐르는, 그러나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묻어나는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독자들은 시인의 내밀한 삶을 함께 느끼게 되고 만다. 그것은 폭넓은 독서를 위한 사전 지식과 관계가 없으며, 시에서 오롯이 느껴지는 울림의 진폭이 크기 때문일 테다. 그 울림은 시인이 살아온 시간에 켜켜이 쌓인 진한 슬픔으로부터 비롯된다.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 '뱀이 된 아버지' 전문)

    앞서 말하자면 아버지가 “나를 처제, 하고” 부른 이유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딸을 미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할 수조차 없게 된 상황. ‘처제’라는 호명은 충격에서 슬픔으로 전이된다.
    아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시인의 첫 시집 [속눈썹이 찌르는 비명](창비, 2007)에서 이미 접한 바 있다. 그 첫 시집에서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나’에겐 극진한 사랑과 끔찍한 피로가 동시에 느껴졌었다. 그리고 시인은 시인의 말에 “스물다섯 때, 시가 몸살나게 좋았다. 그랬으니 신생아처럼 하루 스무 시간 잠으로 보내는, 아버지 발아래 엎드려 자꾸만 연필을 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시든 발목, 혈관 깊숙이 빨대를 꽂아, 공들여 시를 뽑아먹었다. 시를 뽑아먹을수록 나는 통통해지고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툭, 툭, 부러졌다. 그게 마음이 아프다”라고 썼다. 고백대로, 박연준은 아버지에게서 공들여 뽑아먹은 시로 통통해져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시인의 시 때문은 물론 아니겠지만, 신생아처럼 하루 스무 시간 잠으로 보내던 아버지는 “56년 동안 ‘蘭中日記’를 써오다/ 지난 가을” 깨지 않을 긴 잠에 드셨다(이번 시집 「시인의 말」). 그 아버지에게 바치게 된 이 시집은, 어쩌면 아버지가 써오신 ‘蘭中日記’를 딸의 입장에서 쓴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분홍 슬리퍼를 신고 슈퍼에 가신다
    흔들흔들


    아빠, 신발부터 그렇게 가난하다고 분홍 혀를 내밀 건 없잖아요 자꾸 시간이 흐르니까 당신에겐 발가락도, 발바닥도, 뒤꿈치도 없어졌나봐 그냥 걸어다니는 도구일 뿐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도무지 인식하지를 못해 아빠, 나는 자꾸 문학하는 법을 잊고 화장하는 기술만 늘어요 어떻게 하죠? 이러다 눈도 코도 입도 하나씩 더 생길 것 같아 아무도 없는 방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몰래 흐느끼라고 내가 태어난 걸까요? 내가 30년이나 존재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 내 흔적을 찾으려면 어떤 자료실에 들어가야 하나요? 나는 어느 곳에 분류되어 있을까? 아빠 아빠 아빠 오래전 누가 뜨겁게 데워놓은 강물에서 내 변사체를 발견했다던데 혹시 당신이 보았나요? 아빠, 당신은 내 머리띠 같아 내 머릿속에 깊이 뿌리내린 꽃, 꽃띠 아버지, 나 거미가 된 것 같아요 자꾸 똥구멍으로 실이 빠져나오고 그 실에 목이 친친 감겨 잠이 들 것만 같아요 이빠 방바닥이나 하수구 밑을 향해 처박고 울려고, 울 준비를 하는데 실패할 때가 있어요 나는 가죽만 남은 슬픔, 슬픔이었던 옛 광장, 눈물의 유적, 아빠 나는 흔적으로서의 어둠인가봐 당신은 가끔 놀이터 그네에서 나는 쇳소리처럼 끼익끼익, 소리내어 울지만, 나는 사실 아빠처럼 슬프게 생긴 것을 본 적이 없어 아빠는 죽은 노란색을 닮아가지요 아빠, 오세요 분홍 슬리퍼를 끌고 오세요 기울어지는 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랍니다 오세요 캄캄한 나를 건너 돌아오세요
    (/ '꽃띠 아버지' 전문)

    원래는 팔이 있었다
    어느 날 이유 없이 두 팔이 잘리자
    온몸으로 한을 품은 나무의 정수리에서
    수십 개의 잔가지들이 뻗어나왔다
    팔을 돌려달라고
    바람에 흔들리다가
    정신없이 위로 뻗대다가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됐을 때
    붉은 심장을 뱉어내기도 했다

    발이 묶인 삼손들이 울부짖고 있다
    참을 것이 많은 봄밤이라고

    눈먼 나무들이
    수런거린다
    (/ '나무의 약력' 전문)

    아버지의 난중일기가 蘭中日記거니와, 시인은 아픈 아버지를 꽃과 나무처럼 식물의 이미지로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그리는 꽃과 나무는 식물보다는 동물에 가깝다.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뿌리를 뻗고, 팔을 돌려달라고 뻗대다가 심장을 뱉어내기도 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동물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한곳에 붙박여 있는 아버지. 그처럼 슬픈 것을 본 적이 없어 아버지의 뿌리는 시인의 머릿속에 와 박히고, 그 슬픔의 무게에 미래가 기운다.
    “처제”라는 호명은 아버지의 蘭中日記 마지막 페이지이자 시인의 蘭中日記 첫 페이지가 아닐까. ‘나’가 지워지고 부정되는 이 처절한 슬픔을, 시인은 아버지뿐 아니라 사랑하는 애인과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도 느낀다.

    이별이라는 아침
    우리는 밤에 돋아난 햇살
    밤이 앓는 몽유병이야
    천천히,
    곡선으로 잊혀지겠지

    붉은 체념
    다리가 생겼어
    목소리가 사라졌어
    사랑을 영영 잃었으니
    평생 손끝으로 말해야 해
    물거품이나 될걸 그랬지
    (/ '캐러멜의 말' 부분)

    아버지와 애인, 시인이 사랑하는 이들은 병이나 이별을 통해 시인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지웠고, 그것은 시인을 슬픔에 빠뜨렸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남은 것은 손끝으로 말하는 일, 즉 시를 쓰는 일이 되었다. 이 슬픈 시집이 단지 슬픔 자체로만 끝나지 않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빌리면 “시인은 죽어버리고 싶다고 쓰면서 실제 죽음을 유예할 수 있”고 “시를 쓰면서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나와 나 사이의 불화를 중재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 자신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시인이라는 것, 이것은 다행스러운 일”인 것이다.

    날이 무디어진 칼
    등이 굽은 파초라고 생각한다

    지나갔다
    무언가 거대한, 파도가 지나갔나?
    솜털 하나하나 흰 숲이 되었다

    문장을 끝내면 마침표를 찍고 싶은 욕구처럼
    생각의 끝엔 항상 당신이 찍힌다

    나는 그냥 태연하고,
    태연한 척도 한다

    살과 살이 분리되어 딴 길 가는 시간
    우리는 플라나리아처럼 이별한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매 순간
    흰 숲이 피어난다
    (/ '푸른 멍이 흰 잠이 되기까지' 전문)

    꽃은 자신이 왜 피는지 모른다.
    모르고 핀다.

    아버지는 戰場이었다.
    나는 그가 뽑아 든 무딘 칼.
    그는 나를 사용할 줄 몰랐으므로
    나는 빛나려다, 말았다.
    (/ '시인의 말' 부분)

    아버지가 쓰신 蘭中日記는 시인의 시에 이르러 흰 숲으로 피어난다. 난에 꽃을 피우는 일은, 그것이 숲을 이루게 되는 일은 보통의 정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전사가 아닌 전장이었고, 시인은 사용되지 않아 빛나려다 말았지만 그 전장 속에서 저 스스로 꽃이 되어 피어났다. 왜 피는지 모르고 피었지만 그 꽃은 그 자체로 값지다. 하여 “다른 세상에서, 아버지는 그녀를 시인, 이라고 부를 것이”(신형철)고, 우리는 이곳에서 역시, 그녀를 시인, 이라 부를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실은 너무 많이 해서 눈 감고도 하는 일
    뒤집어진 게가 있는 정물
    환청
    눈감고, 푸르뎅뎅한 1분
    빨간 구름
    수화(手話)
    그늘
    보라색 자물쇠
    뱀이 된 아버지
    그러다 고인 빛
    몰라요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걸어다닌다면
    가벼운 역사
    위험한 기류
    빙하기
    물빛, 정오
    나무의 약력

    2부 창백한 잠
    이게 다예요
    일요일
    창백한 잠
    사과의 고단함
    환절기
    소혹성 B612호에 혼자 남은 꽃
    겨울의 고도(高度)
    웅크리다
    봄, 우아한 게임
    겨울의 중심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서른
    빈센트
    기억은 청동빛으로 굳는다
    봄비가, 차마, 귀(耳)가 되어 내리는

    3부 푸른 증발
    가장 맑은 늪
    푸른 멍이 흰 잠이 되기까지
    하품
    융단, 모르핀, 매니큐어에게
    노란 꼭대기
    한 송이 사자가 시들었다, 질두하듯이

    유난히 파란
    꽃집
    두 마리 물고기
    돌아보면 뒤가 파란
    예감
    마음 얼레를 푸는 밤
    산책
    긴 잠
    연애의 그늘

    4부 소문들
    꽃띠 아버지
    나무
    캐러멜의 말
    가벼운 숲
    앰뷸런스
    아네모네
    매스미디어
    사라진 얼굴
    마지막 페이지
    가느다랗게 붉은
    여름의 끝
    새끼 고양이
    잠든 호리병
    바지를 벗다가
    마음 이사

    해설

    본문중에서

    꽃은 자신이 왜 피는지 모른다.
    모르고 핀다.

    아버지는 戰場이었다.
    나는 그가 뽑아 든 무딘 칼.
    그는 나를 사용할 줄 몰랐으므로
    나는 빛나려다, 말았다.

    56년 동안 ‘蘭中日記’를 써오다
    지난 가을 잠드신
    나의 아버지께 삼가, 시집을 바친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경기도 파주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경기도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기분이, 그리고 기운이 불안정할 때가 많아서 “나는 아직 시간이 많고, 사랑하는 남자와 살고 있으며,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써놓고 안심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 이따금 글쓰기 강의를 하고, 매사에 늦장을 부리며, 대부분 쓰고 읽고 멍 때리며 보낸다. 마감이 코앞이더라도 서두르지 않는 성격이다. 느긋하게, 촘촘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물다섯에 등단해 세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산문집을 냈다. 시집 제목은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이고, 산문집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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