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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연인들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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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선우
  • 출판사 : 민음사
  • 발행 : 2012년 10월 12일
  • 쪽수 : 284
  • ISBN : 9788937485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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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그 강에는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들이 흐른다

    현대문학상, 천상병시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의 세 번째 장편소설 [물의 연인들]. [나는 춤이다]와 [캔들 플라워]에 이어, 시인의 감수성은 소설의 문장과 호흡 사이를 걷는다. 그녀가 3년 동안의 지루한 의자싸움을 거듭한 끝에 만들어낸 눈물자국 같은 사랑의 기억은 어느 강가 언저리를 내내 맴돈다.

    남편을 살해한 죄로 복역 중이던 엄마 한지숙은 출소를 앞두고 자살한다. 주인공 유경은 와이강에 뿌리고 남은 엄마의 뼛가루를 가지고 스톡홀름행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서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지만, 그는 몇 년 후 목숨을 잃는다. 어느 날 유경은 와이읍의 수린과 해울에게서 도와 달라는 내용의 편지와 와이강의 물이 든 유리병을 소포로 받는다. 그리고 소설의 새로운 물줄기는 '와이강'에 댐 공사가 시작되고부터 희귀병을 앓게 된 수린과 해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물의 연인들]의 중심을 흐르는 것은 '와이강'이다. 와이강 유역에서 태어나 자란 유경과 그녀의 어머니 한지숙, 와이강에 버려진 후로 수린과 함께 오누이로 자라 온 해울, 와이강 유역에 버려진 입양아 유경의 연인.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와이강에서 생명의 원천을 느끼며, 멀리 떨어져 있을 때조차도 와이강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물의 연인들]은 지킬 수 없었던 사랑과 운명의 비극 속에서도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되는 눈부신 첫사랑의 순간을 포착한다.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도 소신 있는 발언을 해 온 작가 김선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 자연이 전하는 생의 통찰을 오롯이 담아냈다.

    출판사 서평

    여기, 강을 파괴하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에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로” 흐르는 사람들이 있다
    매혹의 정염과 관능적 미학이 살아 숨 쉬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그녀, 사랑을 노래하다


    자기 몸속을 울리는 이명을 타인이 대신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온몸 온 마음으로 사랑한 사람에게도 이명 같은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것일까.
    내 운명은 왜 끝까지 이렇게 난폭한 얼굴인가. 햇빛에 찔린 것처럼 눈 속이 시큰거린다.
    이 신음이 어디로부터 울려오는 것인가. 사랑이라 믿은 그 모든 몸과 몸짓들로부터인가.
    나를 낳은 그것들은 지금 나의 울음을 듣고 있기는 한 건가. 사랑이었던가. 그랬던가.

    현대문학상, 천상병시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의 신작 [물의 연인들]이 출간되었다. [나는 춤이다]와 [캔들 플라워]에 이은 세 번째 장편소설 [물의 연인들]은 작가 김선우가 무려 3년 동안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강한 애착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다.
    우리 모두의 생명의 빛과 근원을 찾아가는 이 뜨거운 첫사랑의 이야기는 때로는 참혹하리만큼 처절하게, 때로는 넘치는 관능과 섬세한 감각으로 독자의 오감(五感)을 자극하며 가슴속 깊이 파고든다. 김선우 문학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의 연결과 호흡은 한 편의 시인 동시에 눈앞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영상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우리 문단에서 이토록 “눈부신 첫사랑의 이야기”(문학평론가 정여울)를, “관능적인 사랑의 이야기”(소설가 김연수)를 과연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하고 매혹적인 작품인 [물의 연인들]은 이 계절, 가장 치명적인 사랑의 울림이 되어 독자들의 마음을 진한 감동으로 요동케 할 것이다.

    생명의 빛을 찾아 떠나는 물방울들의 여행
    ―물이 흐르고 인생이 흐르듯 우리의 사랑은 흐른다


    작가 김선우가 넘치는 시적 감수성으로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써 내려간 이 빼어난 문장들은 우리가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사랑의 정점을 그려 낸다. 마치 타투처럼 주인공 ‘유경’의 온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연인의 흔적과 생생한 기억들. 그러나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의 이름만은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그리고 또 한 겹의 이야기, 어린 연인들 ‘수린’과 ‘해울’이 있다. ‘와이강’에 댐 공사가 시작되고부터 몸에 진물이 흐르고 각질화되면서 점점 굳어 가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수린과, 수린의 병이 강의 죽음과 관련 있다고 굳게 믿는 해울. 다른 한 사람이 이미 죽었거나 혹은 죽어 가고 있기에 결코 하나가 될 수도, 완성될 수도 없는 이 아름답고 슬픈 연인들에게 강은 생명의 근원과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강은, 강물은, 본래의 몸대로 살아야 하니까. (……) 수린에게서 물소리가 난다…… 라고 유경은 느낀다. 물의 소리로 수린이 말해 준 ‘본래의 몸’에 대해 생각한다. 강물의 본래 모습은 흐르는 것이지. 막혀 있는 것들은 썩는다. 댐에 갇힌 물처럼, 기억에 갇혀 버리면 유령이 되지. 기억도 흘러야 한다. (……) 강이 흐르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선생님? 어제보다 오늘을 더,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강은 흐르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어제보다 오늘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지 않으면 흐를 필요가 없어요. 어제에 멈춰 서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 p.257)

    자연으로부터 불어오는 따스한 생명의 온기와 이 작품만의 정제되고 세련된 언어와 목소리는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고 마침내 모든 인물들과의 진정한 교감을 불러일으킨다. 유경은 “물가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깨닫는다. “누군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누군가는 과연 누구인 걸까.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내가 모르고 있지만,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해 깨우쳐 주기 위해 있는 스승들인지도 모른다.”라고 말이다. 소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타자성의 울타리를 넓혀, 협소했던 ‘우리’의 세계는 ‘나’와 ‘너’, 이제 인간과 자연 모두를 아우르며 더 커다란 우리의 세계로 확장된다. 바로 흐르는 강물을 통해,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물방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 또 하나의 깊은 인연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탁월한 문학적 작품으로 형상화한 4대강 사업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

    [물의 연인들]의 중심을 흐르는 것은 와이강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와이강을 둘러싼 인연의 자장 안에 있기 때문이다. 와이강 유역에서 태어나 자란 유경과 그녀의 어머니 한지숙, 당골네의 손녀딸 수린, 와이강에 버려진 후로 수린과 함께 오누이로 자라 온 해울, 와이강 근처에서 발견된 후 스웨덴에 입양되어 자라난 유경의 연인. 그들은 모두 와이강에 매료되고, 와이강에서 생명의 원천을 느끼며, 멀리 떨어져 있을 때조차도 와이강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제빛을 잃고 죽어 가는” 와이강의 “비극적인 알레고리”를 그린 소설 [물의 연인들]은 “화폐가치로는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의 무서운 폭발력에 관한 아름다운 우화다. 포장해서 내다 팔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상품으로 환원해서 교환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안간힘을 다해 지켜 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라고 지적한다.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며 소신 있는 발언을 해 온 작가 김선우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들의 이토록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폭행과 강간을 일삼던 아버지, 그런 남편을 살인한 죄로 복역하다 출소를 얼마 앞두고 자살한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유경을 둘러싼 사람들의 운명은 모두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유경의 삶을 짓누르던 엄청난 상실감과 이 극적인 아우라는 결코 끝나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물의 연인들]이 잔인한 운명에 대한 복수가 아닌,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되는, 그리하여 더욱 눈부신 첫사랑을 그려 내고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듯 흘러가는 우리의 삶처럼 말이다. 작가 김선우의 관능적이고도 애끓는 순애보는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강한 흡인력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뒤흔들 것이다.

    줄거리

    남편을 살해한 죄로 복역 중이던 엄마 한지숙은 출소를 불과 얼마 앞둔 채 깨진 칫솔 조각을 삼켜 자살한다. 주인공 유경은 와이강에 뿌리고 남은 엄마의 뼛가루를 가지고 스톡홀름행 비행기를 탄다. 북유럽에 가 보고 싶다는 엄마의 꿈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유경은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 불같은 사랑을 나누지만, 그는 몇 년 후 목숨을 잃고 유경은 그 충격으로 인해 연인의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 죽음의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엄청난 상실감 속에서 유경은 결혼을 하고 또 이혼을 한다.
    유경은 어느 날 와이읍의 수린과 해울에게서 도와 달라는 내용의 편지와 와이강의 물이 든 유리병을 소포로 받는다. 수린과 해울은 7년 전, 유경이 연우와 함께 귀국했을 때 와이읍 여름학교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이다.
    와이강의 생태계가 공사로 인해 점차 파괴되고 있는 것처럼, 수린 역시 온 몸이 각질화된 채 뻣뻣하게 굳어 점점 죽어 가고 있다. 수린을 사랑하는 해울은 강 공사가 중단되고 강과 자연이 살아나면, 수린의 몸 역시 회복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해울은 필사적으로 댐 공사를 막으려 하는데…….

    추천사

    생명의 원천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파괴 앞에서도 이 사실을 지켜 나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에도 나오듯, 우리는 파괴에 파괴로 맞서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 실수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김선우의 주인공은 인간적인 실수보다는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주인공 유경이 선택하는 사랑은 물의 사랑인 동시에 관능적인 사랑이다. 우리는 이 물의 사랑, 이 관능적 사랑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건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굴복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쇄골이 사랑하는 남자의 심장을 찢어 놓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쇄골을, 사랑 안의 파괴를 안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리라.
    ― 김연수 / 소설가

    목차

    프롤로그
    1부 유령의 시간
    2부 가면을 쓴 달
    3부 붉은 물 자국
    4부 흐르는 사람들
    에필로그

    작가의 말
    작품 해설 사랑이 끝난 후, 비로소 시작되는 사랑_ 정여울(문학평론가)

    본문중에서

    작품 해설 중에서

    [물의 연인들]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또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첫사랑의 이야기다. 이 세상을 한 바퀴 돌아, 이 생을 한 바퀴 돌아, 그 모든 고통과 원한과 복수와 절망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되는, 그리하여 더욱 눈부신 첫사랑의 이야기다. 상품으로 팔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상품으로 환원하려는 그 모든 권력을 향해,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속삭인다. 그래도 우리는 흘러가야 한다고. 이 끈질긴 흐름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언젠가는 바위를 뚫는 물방울의 힘으로 끝끝내 다시 흘러갈 와이강처럼. 우리는 흘러가야 하니까. 살며, 싸우며, 사랑해야 하니까.
    ―정여울 / 문학평론가

    본문 중에서

    유경이 그 문장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한 글자 한 글자 점을 찍듯 읽어 간다. 오른손 검지의 담쟁이 잎이 문장에 긁히는 듯한 느낌…… 동시에 오른쪽 발바닥의 담쟁이 잎들이 꿈틀거리는 느낌…… 이 선명하게 끼쳐 온다. 나도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내 주변은 백색소음으로 꽉 차 버린 듯하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않는 소리가 늘 귓전에 존재해 왔음을 깨닫는 순간의 당혹스러운 역난청. 안 보이는 소리의 경계가 휘우듬히 휘어지며 경계를 떠도는 이들의 슬픔이 오래된 필름 긁히는 소리처럼 팃팃거린다. 유령의 슬픔……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니? 그거라면 좀 아는 것 같은데, 나도,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유령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나도 나에 대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싶다, 7년째 허깨비처럼 살고 있는, 내가 지겹다, 나는, 나를, 나는, 그만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살아 있지만, 누구에게도 도와 달라고 할 수가 없다, 나는,

    모호한…… 존재의………… 계산법이다……………… 유경은 생각한다.
    여기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난 그게 맘에 들어.
    그의 목소리가, 유령 같은 유경의 몸 어디선가 튀어나온다.
    (/ p.38)

    아무튼 넌 내 거야. 네가 지옥에 떨어져도 난 널 찾아갈 거니까. 날 떼어 놓을 생각 따윈 하지 마.
    아, 맞아.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이곳에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대. 쥘 베른은 이곳에 지구의 입구가 있다고 생각했다던데.
    멋지군. 유경이 짧게 반응했다. 어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자욱하게 끼는 어두침침하고 적요한 거리였다. 엘프와 트롤과 도깨비와 유령 들이 카페테리아 사이를 배회하며 인간의 말을, ‘아직’ 인간인 존재들의 말을 엿듣고 있는 것 같은 백야.
    밤이 너무 희어서 이상해.
    유경이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 그가 커피의 마지막 모금을 마신 후 유경의 말에 이어진 말줄임표처럼 천천히 말했다.
    시간이 얼크러지고 난폭해질수록…… 세상은 조용해져서…… 옷자락을 끄는 유령들의 고독이 선명해져…… 고독이 좋아…… 고독해지면……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 같거든…….
    (/ p.450

    그랬다. 죽은 척하고 있었던 거, 스스로를 닫아 놓고, 걸어 잠가 놓고, 간신히, 그렇게 간신히 존재하던 거, 닫아거는 데도 여는 데도 그렇게 시간이 걸렸는데, 당신이 그랬잖아, 함께 보자고 그랬잖아, 그런데 뭐야, 이게! 젠장, 이름도 생각 안 나는 너라니! 다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다 망가져서 기억 따위도 다 사라져서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어.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나, 죽은 척하고 있었는데, 간신히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 보려고 했는데, 죽은 척하고 살아 보니까 안 살아져. 그래서 미치겠어. 내게도 네게도 엄마에게도 있는 이 악착같은 담쟁이덩굴 따위, 징그러워, 징그럽다고! 유경이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빠르게 중얼거린다.
    너의 이름을 그만 잊고 싶은, 내가 모르는 내가 있는 거라고?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었던 거라고? 지랄! 만약 그렇다면 ‘네 이름을 찾아야만 살겠어.’라고 내가 작정하면 떠올라 와야 할 것 아냐. 왜, 도대체 왜! 유경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화장실로 막 들어선 순간이었다.
    (/ pp.73~74)

    죽은 유령들, 춤추는 유령들, 고개를 돌려 유경을 바라보는 유령들, 손짓하는 유령들을 지나, 기억의 밑바닥, 결국 모든 기억의 종점은 그에게 와서 끝나고 만다. 유경의 바닥인 그.
    사람들은 말하잖아. 사랑만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그런데 우리는 조금도 치유되지 못했던 거야. 나는 내 상처로부터. 너는 너의 상처로부터.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뭐였을까.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는데도! 너 하나만을 사랑해서 너 하나만을 원했지만, 죄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는 칼리의 헤드라이트 앞으로 날벌레들이 날아들며 퍽, 퍽, 터진다. 앞 유리에 끈적한 즙을 점점이 남긴 채.
    와이읍에 접어들었다. 쏟아질 듯 별이 총총하다. 오래전 죽은 별들의 빛이 이제야 간신히 여기에 닿기도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여기서 바라보는 저 별들 중 어떤 별들은 이미 그 별의 사후 세계다. 유경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마를 찌푸린다. 나의 사후에는 어떤 눈동자가 나로 인해 먼 별을 올려다보며 죄책감 같은 것으로 탄식하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 가계의 담쟁이덩굴은 나라는 잎이 지고나면 그걸로 깨끗이 사라지는 거다.
    (/ pp.104~105)

    바위 옆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유경이 귓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귓속의 이명은 오직 그 자신밖에는 느낄 수 없다. 사랑이라고 믿은 것에도 이명 같은 부분이 있고야 마는 것일까. 자기 몸속을 울리는 이명을 타인이 대신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온몸 온 마음으로 사랑한 사람에게도 이명 같은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것일까. 그는 간혹 북극의 곰이나 여우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북극에 직접 가겠다는 이야기 따위는 유경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북극이라니! 도대체 왜? 북극은 그에게 이명 같은 자기만의 방이었을까.
    (/ p.112)

    엄마…… 와 나누고 싶다, 라고 유경은 생각했다.
    그를 받아들일 때 유경은 엄마의, 한지숙의 알몸이 되려고 했다. 자신의 육체 속에 엄마가 있기라도 하듯이. 자신을 소중히 안고 천천히 침대로 옮겨 가는 남자의 심장 뛰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한지숙. 그녀가 되길 유경은 간절히 바랐다.
    살살 움직여 줘. 아프지 않게. 상처가 많으니까. 물처럼 흐를 수 있게. 여기로 와. 내 옷은 버려 두고. 유경의 옷을 어디에 놓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던 그가 유경의 발등을 적신 강물이 마르기 전에 부드럽고 여린 혀로 유경의 발가락 사이를 지나간다. 간지러워……. 유경이 허리를 비틀며 웃는다. 모래톱 위에서 엄마가 허리를 비틀며 웃는다. 잘록한 허리에 비해 큰 가슴을 가졌던 엄마. 젖꽃판이 넓게 퍼진 엄마의 유방에 혀를 대 본다. 쿡, 엄마가 웃는다. 입속 가득 엄마의 젖꼭지를 문다. 달큰하고 비릿한 젖내가 흘러든다. 너 낳고 젖몸살이 심했지. 앞섶이 늘 젖어 버리곤 했어. 너는 젖을 참 세차게도 빨았단다. 먹어야 산다는 걸 미리 배운 아기 같았어.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를 핥으며 올라온 그의 혀가 거웃을 헤치고 있다.
    (/ pp.138~139)

    비가 오면 세상이 느리게 움직여. 느리게 움직이면 다른 것들이 잘 보여. 비는 입이 많아. 비는 아주 다른 많은 언어로 말해. 여러 대륙을 흐르다 오늘 여기 내리는 비. 빗방울 속엔 수많은 언어가 녹아 있어. 나는 말이야, 엄마, 다음에 태어나면 비로 태어나고 싶어.
    유경이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든다. 약속다방 창밖으로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남자가 보인다. 군복 색깔 점퍼를 입은 남자는 노쇠하면서도 비장한 느낌이 드는 뒷모습이다.
    이 투명한 빗방울 속에는 누군가의 시체로부터 솟아난 물방울이 있을 것이다. 파리 떼, 구더기들, 파헤쳐진 내장 같은 것에서 생겨 나온 물방울도 있을 것이다. 구름이 빗방울로 떨어져 강으로 가고 바다로 가고…… 지구상의 물방울들은 일주일이면 지구를 한 바퀴 순환하게 된다고 했다. 간혹 중간 정체가 길어지는 여행도 있겠지.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몇 년씩 머무는 빗방울. 깊은 지하로 흘러들어 1000년 동안 꼼짝 안 하는 물방울. 해류를 타고 대양의 해저로 내려가 3000년 정도를 쉬다 나오는 물방울도 있다고 했다. 눈송이가 되어 극지방의 빙원에 떨어졌다가 얼음덩어리 깊숙한 바닥까지 내려가 수십만 년씩 기다린 다음 물이 되어 나오는 것들도 있다고 했다. 그 모든 물방울들의 여행…….
    유경의 이명 속에서 이제 자신의 목소리가 된 그의 목소리가 방금 도착한 물방울처럼 생생하다.
    (/ pp.149~150)

    저자소개

    생년월일 1970~
    출생지 강원도 강릉
    출간도서 32종
    판매수 8,532권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부상당한 천사에게], 장편소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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