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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불빛들을 기억해 : 나희덕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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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성찰과 치유, 생성의 시간을 사색하다!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저 불빛들을 기억해』. 저자가 13년 만에 펴낸 이번 산문집은 저자의 문학적 고백과 신념, 부단한 자기 관조, 모든 존재에 대한 서정적 포옹이 살아 있는 35편의 글과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래 전 읽었던 칸딘스키의 《점ㆍ선ㆍ면》을 다시 들여다본 저자는 이 책을 점, 선, 면으로 구성하여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 사이의 축도를 보여주고자 했다. 점과 선과 면이 역동적으로 만나는 과정, 그것이 바로 삶이 아닌가 생각하며 글 속의 시간과 사진 속의 공간이 점과 선과 면처럼 역동적으로 만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10여 년간 자신이 바라보았던 삶과 사람, 환경, 생명, 문학에 대한 기억과 사색을 들려준다.

출판사 서평

“강물은 흘러가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 많은 것을 흘려보낼 수 있게 해 준다. 그동안 쓴 산문들을 정리하는 일이 내게는 시간의 강물을 바라보는 일과도 같았다. 강 저편에서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이 거기 누군가 살고 있음을 전한다. 돌아보니, 상처 많은 삶에도 온기 어린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그 기록이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3년 만에 산문집을 묶는다.”

13년 만에 엮은 나희덕 시인의 새 산문집. 시인의 문학적 고백과 신념,
부단한 자기 관조, 모든 존재에 대한 서정적 포옹이 살아 있는 35편의 글과 사진


점은 가장 간결한 존재의 형태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세계이다. 점은 다른 점과 만나 선이 되려고 한다. 점이 점에게로 움직여 간 궤적이 곧 선이다. 면은 선과 선이 어떤 각도와 방향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그 안정감과 저항력이 달라진다.
이 산문집을 점, 선, 면으로 구성한 것도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 사이의 축도를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점’이 한 개체의 내밀한 모습을 나타낸다면, 점과 점이 만나는 ‘선’은 개체와 또 다른 개체의 만남을 의미한다. 또한 다양한 선들이 만들어 낸 ‘면’은 사회 또는 공동체를 뜻한다. 물론 한 편의 글을 그 어느 하나에 귀속시키기란 쉽지 않다. 어느새 점은 선이 되어 있고, 선은 면이 되어 있고, 면은 하나의 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이란 그렇게 점과 선과 면이 역동적으로 만나는 과정일 것이다.(서문에서)

나희덕 시인은 저 유명한 칸딘스키의 《점ㆍ선ㆍ면》을 다시 꺼내 읽으며 점, 선, 면은 회화적인 요소의 분석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구도와 역학을 설명하기에도 적절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번 산문집 구성의 틀이 되었다. 지난 10여 년간 시인이 바라보았던 삶과 사람, 환경, 생명, 문학에 대한 기억과 사색을 모은 이번 산문집은 점, 선, 면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나에서 너로, 너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그들로 시선을 확장하며 성찰과 치유, 생성의 시간을 사색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에덴’이다. 평안도 용강 태생인 아버지와 전주 태생인 어머니가 객지에서 만나 처음 정착한 곳이 ‘에덴원’이라는 보육원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유년은 한 생애에 있어서 에덴과 같은 시간이다.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뒷동산에 올라 찍은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나지막한 구릉에 앉아서 아담과 이브처럼 수줍게 웃고 있는 젊은 부부. 어머니는 나를 안고, 아버지 곁에는 흰 염소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어머니가 보육원 총무로 일하던 그 시절, 아버지는 소일거리로 염소 몇 마리와 닭 몇 십 마리를 키우고 텃밭을 일구었다. 아침마다 그 염소에서 짠 젖을 마시고 그 닭들이 낳은 따뜻한 날달걀을 깨 먹으며 우리 남매들은 자랐다.
‘에덴’의 중심에는 커다란 놋쇠종이 매달려 있고, 100명이 넘는 식구들은 그 종소리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곤 했다.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100개가 넘는 숟가락들이 동시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15-16쪽)

시인의 문학적 자취와 자화상부터 시가 잉태하고 탄생한 생생한 배경과 그 깨달음까지.
상처와 고난, 그리고 그곳에서 피워 올린 축제와 회복의 이야기


1부 ‘점’의 첫 글 <에덴에서 무등까지>에서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이력과 자취를 고백하며 문학적 자화상을 그려 보인다. 작가가 유년기와 아동기를 지내온 ‘에덴에서의 10년’과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한 10대, 왕복 2시간 이상을 걸어서 통학해야 했던 길 위에서의 중고등학교 시절 6년과 문예반ㆍ백일장 이야기, 그리고 청년시절 시인의 세계에 영향을 끼친 윤동주와 정현종, 자신을 시인으로 만든 모교 뒷산의 숲길에 대한 기억, 첫 투고와 등단 이야기가 여기에 담겨 있다. 30대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을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보내며 존재의 뿌리가 고갈되는 느낌을 받았던 시인은 새로운 뿌리를 찾아 공부를 시작했고, 광주에 있는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자리를 얻으며 무등산 아래로 이사한다.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무등산은 작가에게 힘이 되어 주지만, 불현듯 모든 게 낯설고 혼자라는 느낌이 밀려올 때가 있다.

어느 가을 저녁, 퇴근하려고 차에 시동을 거는데 갑자기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신체적인 통증은 아니었다. 눈을 들어 보니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아주 예리한 칼날로 내 가슴을 죽 그은 것처럼. … 이렇다 할 슬픔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울음의 끝은 아주 멀리 있어서, 열 살 때 처음 보았던 노을에까지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니, 길을 잃어버린 열 살의 내가 이 까마득한 시간까지 따라와 울고 있었다.
무등산 비탈에는 군데군데 붉은 돌무더기들이 흩어져 있다. 그것을 여기 사람들은 ‘너덜겅’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에서는 왠지 마음이 덜겅덜겅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너덜겅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기 때문에 멀리서는 그 부분이 커다란 화상(火傷)처럼 보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너덜겅이 더 붉고 선명하게 보인다. 거기서 나는 광주의 상처를 읽어 냈고, 때로는 내가 이끌고 온 상처들이 덧나기도 한다. 그런 날 오랜 친구처럼 시가 나를 찾아온다.(30쪽)

<저 연둣빛처럼>에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관조가 담긴다. 어느 날 시인이 오후 강의를 마치고 핸드폰을 켜니 낯선 목소리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지방 어떤 공동체에서 지내던 남편이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다. 놀랄 여유도 없이 서울역으로 달려가 기차에 몸을 싣고 간신히 숨을 돌리고 나니 종일 물 한 모금조차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손이 떨리는 게 당장 뭐라도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고, 시인은 김밥 한 줄을 사서 입속에 쑤셔 넣기 시작한다.

그건 먹는 행위라기보다는 기름이 완전히 바닥난 차를 조금이라도 굴려 가기 위한 주유(注油)에 가까운 안간힘이었다. 그런데 김밥을 씹고 있는 내 눈을 자꾸만 찔러 오는 것이 있었다. 연둣빛이었다. 연록의 벼 포기들이 저녁 햇빛을 받아 얼마나 눈부시게 일렁이던지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어둡기만 한 나의 마음 때문에 더 눈부시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연둣빛에서는 아직 상처 입지 않은 순연함이 느껴졌다. ‘아! 저게 바로 생명의 빛이지. 무릇 사랑도 저래야 하지. 그런데 내 마음은, 내 사랑은 왜 이렇게 어둡기만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연둣빛이 즙처럼 내 눈에 괴였다.(56쪽)
“그때 울음을 터뜨린 것이 절망감 때문이었는지 그 빛의 환희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남편의 실패가 결코 그만의 실패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실패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 연둣빛을 바라보며 비로소 받아들인 것 같다.”고 고백한다. 연둣빛과도 같은 사랑의 힘을 어느새 잃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시인은 오히려 조금씩 정화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하늘은 때로 나를 직접 치기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 경고와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아픈 것은 그들의 실패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내 사랑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재산은 다시 모을 수 있고, 떨어진 시험은 다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잃어버린 사랑은 저 연둣빛처럼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하다. 이런 자각과 참회를 내 마음에서 일으켜 주었으니, 그 참담했던 여름날의 기억도 이제는 실패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후로 사랑의 힘이 내 안에서 시들어 간다고 여겨질 때마다 그 연둣빛을 떠올리곤 한다.(57쪽)

<식사를 소풍으로 바꾼 저녁>에서는 시인이 차린 잊지 못할 밥상의 기억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어느 여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퇴근길에 장을 봐서 집에 돌아온 시인은 직장에서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집안일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건만, 그날따라 유난히 꼼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제비 새끼 같은 아이 둘이 식사를 기다리고 있으니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찌개를 끓이고 밥을 차리는데 갑자기 가슴 저 아래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오래 누르고 눌러 두었던 설움 같은 게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아우성에 가까웠다. 사업에 실패한 뒤로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는 남편의 초췌한 얼굴과 집으로 수시로 걸려오는 협박 전화들…. 시인은 갑자기 대접과 접시에 담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음식을 도시락에 옮겨 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아이들에게 소풍을 가자고 외친다. 아이들은 엄마의 갑작스런 제안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좋아라 따라나선다. 집 가까이 호수 공원에 도착한 시인과 아이들은 해가 지는 공원 빈터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바위를 식탁 삼아 상을 차리고, 하루살이 떼처럼 잉잉거리면서 저녁을 먹는다.

아이들의 입에 구운 고기를 넣어 주며 나는 그것이 내 살점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엄마의 복잡한 심사를 알 리 없는 아이들은 해맑은 눈동자로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 눈동자 속에도, 우리가 먹어 치운 빈 밥그릇 속에도 붉은 노을이 곱게 담겨 있었다.

얘들아, 꼭꼭 씹어 삼켜라.
그게 엄마의 안창살이라는 걸 몰라도 좋으니.
언젠가 오랜 되새김질 끝에
네가 먹고 자란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너도 네 몸으로 밥상을 차릴 때가 되었다는 뜻이란다.
그때까지, 그때까지는
저 노을빛을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소풍〉부분

소풍을 끝내고 우리는 어둑해진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언젠가 자라 스스로 밥상을 차리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삶의 고단함을 알게 되었을 때, 이 바위에 둘러앉아 먹었던 밥을 기억하기 바라면서. 먼 훗날 그 기억이 삶의 근원적인 허기를 달래 주고 고단함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면서.(59-61쪽)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살다 보면 이처럼 눈물 어린 축제가 필요한 저녁이 불현듯 찾아오기도 한다. 하루 또는 한 끼도 거르고 비껴갈 수 없는 것이 ‘밥’이라는 엄숙한 사실을 삶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시간 - 그러나 그 일상적 행위를 축제로 바꿀 수 있는 힘 또한 우리 내부에 있다. 밥은 번번이 우리를 무릎 꿇게 하지만, 그 무참함은 때로 황홀한 취기를 베풀어 주기도 한다.”고. 산문집 여러 곳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가 잉태되고 탄생하는 순간과 관련된 생생한 이야기들도 함께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부 ‘선’에서는 저자가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저 불빛들을 기억해>에는 아이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만난 환아들과 그 엄마들에게서 받은 위로와 동병상련의 애틋함이 펼쳐진다.

퇴원을 하루 앞두고 나는 병실을 먼저 떠나는 게 미안해 다른 엄마들과 밥이라도 한 끼 나누고 싶었다. 병동 휴게실로 중국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하고, 밖에 나가 소주 한 병을 사왔다. 병동에서는 술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마지막으로 위로의 술 한 잔을 간절하게 건네고 싶어서였다. 우리는 소주병을 검은 비닐봉지로 싸서 물인 것처럼 종이컵에 따라 마셨다.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잠시나마 그 말간 술에 적시기라도 하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잔을 건네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따금 종합병원 근처를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불 켜진 창문들을 한참 올려다본다. 저 불빛 중 하나로 위태롭게 깜박이던 때를 기억하면서, 그 불빛 속에 함께 있었던 아이들과 엄마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다들 잘 있겠지. 어두운 거리에서 불 켜진 창을 바라보는 일이 쓸쓸한 노릇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 불빛들을 향해 두 손을 가만히 뻗어 보기도 한다.(111-112쪽)

반달의 형상을 닮은 도시 경주, 팔레스타인 작가 자카리아 모함마드, 아름다운 농부 원경선, 이사한 집의 전 세입자가 남긴 편지, 새터마을 수녀님, 네 밤 자면 집에 갈 수 있다는 부활의집 아이 등등, 작은 점으로서의 저자가 살아가는 동안 함께 선을 이루게 된 대상들이 그리움 묻어나는 따스한 필치로 소개된다.

3부 ‘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서울 광주 간 고속도로를 달린 다음 날 아침, 저자는 차 앞에 잔뜩 엉겨 있는 푸르죽죽한 풀벌레 잔해들에 기겁한다.(<풀비린내에 대하여>)

그것을 닦아 내려다 나는 지난밤 엄청난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손발이 후들후들 떨려 도망치듯 세차장으로 갔다. 그러나 세차 기계의 물살에도 엉겨 붙은 풀벌레들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풀 비린내는 몸서리치는 기억으로 남았고, 나는 손을 씻고 또 씻었다. … 운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걷기 예찬자였고, 인공적인 공간보다 자연 속에 머물기를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러나 차를 소유하고부터는 생태적인 어떤 발언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차를 소유하되 그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날 아침의 풀 비린내가 원죄 의식처럼 운전대를 잡은 내 손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195-197쪽)

자동차뿐 아니라 텔레비전이라든가 인터넷 서점, 도량형과 미터법, 첨단 의학, 자본주의, ‘웰빙’ 열풍에 이르기까지, 지금 우리가 편하게 누리고 앞서간다는 만족을 느끼게 하는 현대 사회의 여러 요소들에 대해 저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와 관련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진정 인간다운 삶은 어떠한 것인지 되돌아본다.

다이아몬드의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가 ‘캐럿’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캐럿’이라는 단위가 원래 캐럽나무 열매 하나를 기준으로 다이아몬드의 무게를 잰 것에서 유래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무 열매와 보석. 돈으로 환산할 때 둘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캐럿’이란 단위를 처음 사용했던 사람들에게 상품성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한 캐럿의 다이아몬드와 캐럽나무 열매 한 개가 비슷한 존재의 무게로 느껴졌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그 단위가 생겨난 아름다운 연원은 잊히고 재화로서의 다이아몬드만이 중요해진 세상이 되어 버렸다. 나무와 사람을 구분해서 셀 수 있다는 것이, 나무 열매와 보석이 지닌 상품적 차이를 알게 되는 것이 과연 진화라고만 볼 수 있을까. 창밖의 나무를 열심히 세고 있는 아이를 보며 문득 떠올린 질문이다.(233쪽)

나와 우리를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성찰,
그리고 보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시인의 순순한 질문과 대답.
“저 불빛들을 기억해.
저렇게 수많은 방 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목차

머리말

1부. 점
에덴에서 무등까지
518호라는 방
구름과 수풀
말벌 이야기
저 연둣빛처럼
식사를 소풍으로 바꾼 저녁
무릉은 사라졌어도
건천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피아노가 있는 풍경
돌멩이가 묻고 있는 것
나는 너를 듣고 싶다

2부. 선
저 불빛들을 기억해
반달 모양의 칼과 길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스스로 멈출 수 있는 힘
아름다운 농부에 대한 기억
뒤주와 굴뚝
이사, 집의 기억을 나누는 의식
수녀님 어디 계세요?
영혼의 감기
네 밤 자면 집에 갈 수 있어요
피어나지 못한 목숨을 위하여
쓰러진 회화나무의 말

3부. 면
풀 비린내에 대하여
무엇을 줄일 수 있을까
플러그를 뽑는 즐거움
어리석은 자가 산을 옮긴다
가지취 냄새 나는 책을 찾아서
팔 권리와 사지 않을 권리
나무 열매와 다이아몬드
삶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영양과 뱀잡이수리
통증과 치유의 주체는 누구인가
폭설이 우리 곁을 지날 때

본문중에서

운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걷기 예찬자였고, 인공적인 공간보다 자연 속에 머물기를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러나 차를 소유하고부터는 생태적인 어떤 발언도 할 운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걷기 예찬자였고, 인공적인 공간보다 자연 속에 머물기를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러나 차를 소유하고부터는 생태적인 어떤 발언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차를 소유하되 그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날 아침의 풀 비린내가 원죄 의식처럼 운전대를 잡은 내 손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198-199쪽)

이처럼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이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장 큰 힘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정작 위험한 것은 그것의 결핍이 아니라 과잉이라는 것을, 그 과잉을 몇 숟갈이라도 덜어 낼 때 삶은 좀 더 맑아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입속에는 말이 적게, 마음속에는 일이 적게, 밥통 속에는 밥이 적게, 밤이면 잠을 적게”라는 《현관잡기(玄關雜記)》의 한 구절을 자주 떠올리지만, 그런 간소함이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는 복통으로 한 주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말을 줄이려고 마음먹었던 것처럼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또한 무언가 줄여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곡기가 끊어지자 기운은 없어도 오히려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아졌다. 말소리가 낮아지고, 몸을 움직이는 속도도 느려지고, 불필요한 곳에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지나치게 건강하게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4-205쪽)

시인이 백지의 공포와 싸우지 않고 한 장의 백지와도 같은 땅을 들여다보는 것은, 펜 대신 삽이나 호미를 들고 있다는 것은 직무 유기에 가깝다. 그러나 시집을 묶어 내고 다시 정신의 빈터를 찾아 기웃거릴 때 그 낮은 톱밥산은 좋은 일감이 되어 주었다. 그 산을 옮기면서 나는 모처럼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마음껏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얻어진 대여섯 평의 땅 위에는 푸른 것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유난히 비가 내리지 않는 봄에 흉작을 두려워하는 일 또한 그 푸른 것들을 심은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218쪽)

과연 헌책은 새 책보다 낡은 것인가. 과연 50대는 3,40대보다 낙후된 사람일 뿐인가. 헌책방은 인터넷 서점보다 시대착오적인 공간에 불과할 뿐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 역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지원하는 데 우리 사회가 너무 인색하고 단속적이기 때문이다. 근대 천문학의 기초를 마련한 케플러도 점성술사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고 하지 않는가. 문제는 점성술이라는 깨지기 쉬운 달걀에서 어떻게 천문학이라는 병아리를 부화시켜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22-223쪽)

저자소개

나희덕(羅喜德)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660208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저자 나희덕은 1966년 2월 8일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등을 발표했으며,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출간했다. 김수영문학상 · 김달진문학상 ·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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