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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석 첫번째 시집 『순비기나무』. 이 책에서 시인은 소외당한 생명을 호명하는 방법으로 시적 화자에게 가면을 쓰게 한다는 평을 받았다. 이처럼 의인화시킨 대상은 비로소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고, 그 대등성 위에서 인간과 소통한다.

인천의 한 섬학교에 재직 중인 유병석 시인의 첫 시집이다. 유병석은 사회 또는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나 생명체들이 쓴 가면에 주목하는 시 쓰기를 하고 있다. 그 가면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적절한 자기 의지일 수도 있고, 동물이나 식물이 세계 속에서 기후나 환경 그리고 인간 사회에 적응하여 진화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유병석이 페르소나를 드러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찾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참다운 페르소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추천평]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사유 속에는 신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없었다. 이러한 도도한 인간의 관념은 현재 각종 포스트주의자들로 인해 도전받기에 이른다. 그들은 추방당한 이 땅의 생명체를 호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병석 또한 소외당한 생명을 호명하는 방법으로 시적 화자에게 가면을 쓰게 한다. 이처럼 의인화시킨 대상은 비로소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고, 그 대등성 위에서 인간과 소통한다. “겨울에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말하지”가 가능한 것은 화자가 쓴 가면으로 인해서다. 페르소나는 유병석의 시에서 생명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서 모든 생명체들을 하나가 되게 한다. 로저스가 대화의 원칙에서 중요하게 거론하고 있는 성실성이 “죽은 넝쿨이야?/말라빠진 줄기인가?”로 발화되어 주체와 객체의 간극을 좁힌다. 유병석은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활용하여 “벌과 나방은 꿀을 따느라 정신없”게 만들어 놓는다. (해설 발췌)

-고광식(시인)

1부 대청도
섬사람들
뱃멀미
대청도 보름달
순비기나무
해초무늬 돌
우체국 가는 길
쥐노래미
고사리
가을이 오는 소리
농여 해변
기르마가리
타조
모래사막
겨울바람
물 내린 골
흑염소
해피
노랑부리백로
섬 아이들 1
섬 아이들 2
검은왜가리
동백나무 자생 북한지에서
농어를 찾아서
시름도 때로는 미끼가 된다
꺽주기
바늘
기린도
도장골
절망의 바다를 바라보며
방공호 속에서

2부 생명
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로드킬과 만나다
사육제
바코드처럼
구제역
수평아리
친구인 줄 알고
무단횡단
가물치
그 빠름이 독이다
검은 바닥을 바라보며
천장
도축장 옆 안마시술소
작약 한 뿌리
바지락 칼국수
새우도둑
제국의 역습
카멜레온
선인장

3부 인생
개나리
오래된 향나무
불거지
일제 전자계산기
나쁜 피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용궁사
방글라데시인의 눈동자
돌개바람
뿔 세우기
창 속에서
율곡기념관
블로그
오이도역에서
상사화
아카시아

해설/고광식
페르소나, 가면 쓰고 살아가기

순비기나무

나는 대청도의 순비기나무
미아동 모래언덕이 내 집이지

나는 옆으로 크는 나무
친구들과 손잡고 언덕을 가득 메운다네.

겨울에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말하지
죽은 넝쿨이야?
말라빠진 줄기인가?

그 소리에 모두가 폭소를 터트리면
그 바람에 모래들은 옥죽포로 날아가지

늦봄, 도톰한 잎들을 피워내면 우리를 보고 말하지
웬 풀이야?

여름에 우리를 보면 모두가 깜짝 놀란다네.
이제 미아동은 보라색 꽃밭
벌과 나방은 꿀을 따느라 정신없지

언제든 나를 찾아오면 슬며시 발 걸어 줄게
내 곁에 앉아 모래 속 내 손을 잡아봐
굽이굽이 감춰진 천 년 바다의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