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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민국을 꿈꾼 탕평군주 : 순문을 통해 백성과 소통한 군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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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백철
  • 출판사 : 태학사
  • 발행 : 2011년 09월 29일
  • 쪽수 : 384
  • ISBN : 978895966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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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백성과 소통한 군주
    왕은 문물 제도의 정비 사업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자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마지막 국정 과제로 양역변통을 설정하고 강도 높게 추진했다. 양역변통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영조 연간에만 20여 년간 끌어온 장기 과제였다. 그동안 별다른 결과가 없었으므로 국왕은 무언가 비상수단을 동원하고자 했다. 이때 처음으로 활용된 수단이 바로 순문(詢問)이었다.
    본래 순문은 일반적으로 조정의 주요 관리를 대상으로 했다. 국가적인 재난이 있을 경우, 전국의 전현직 관리나 사족들을 대상으로 구언(求言)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순문은 아직 없었다. 위의 자료는 영조가 도성의 백성을 대상으로 순문을 벌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영조 이전에는 세종을 제외하고는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의견을 청취한 예는 없었다. 세종은 공법(貢法: 田稅)을 개정할 때 수년에 걸쳐서 전국 규모의 여론 조사를 시행했다. 세종에 비하면 영조의 순문 규모가 크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이만한 것조차도 영조 외에는 시행한 적이 없었다. 또한 세종대 설문이 광범위하여 관리를 통한 전국가적 사업으로 국왕의 입장에서는 간접적인 여론 청취였다면, 영조대 순문은 직접 도성의 백성들을 모아놓고 실시하는 직접 여론 조사였다. 아마도 영조가 한참 세종대왕을 동방의 요순으로 칭하면서 따라잡기에 열중하던 시기였으므로 이러한 조치가 가능했지 않나 싶다. 이러한 전통은 고종대까지 계승되어 경운궁(慶運宮: 덕수궁) 앞에 광장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이 오늘날 서울 광장의 유래가 되었다.

    300여 년의 역사, ‘민국(民國)’의 유래를 찾아서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제국의 ‘대한’과 ‘민국’이 합쳐진 이름이다. 1919년 고종 장례식을 기점으로 3·1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저항운동으로 일어났다. 장례식에 모였던 민(民)의 함성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므로, 국호를 선정할 때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대한’이 채택되었으며, 이미 고종 황제의 서거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온전한 군주는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여 공화정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1912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수립으로 이미 공화정의 의미로 ‘민국’이 사용되고 있었기에 임정 역시 민국이란 용어를 받아들였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미 17세기부터 민국이라는 표현이 확인되고 있으며, 18세기 탕평정치기부터 뚜렷이 정치개념으로서 사용되었다. 이것이 19세기를 거쳐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표현으로 굳어졌다. 요컨대 20세기 초엽의 사람들에게 민국은 우리의 전통적인 표현일 뿐만 아니라, 여기에 새로운 민주공화정의 의미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효과적인 용어로 인식되었다.
    17세기에는 두 차례 걸친 대규모 전란과 전 지구적으로 불어 닥친 소빙기 자연 재해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존할 수 있을지 방책을 마련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의 한계상황 속에서 백성의 생활 안정을 보장해야 한다는 당위론은 비단 의례적인 수사로만 그치지 않고 국가의 존망과 연결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해져만 갔다. 백성과 나라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약 1세기 간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민국(民國)’이라는 새로운 정치 용어가 탄생하였다.
    18세기 국왕과 신료들은 국가의 정책 목표와 지향에서 한결같이 ‘민국’을 주요한 개념으로 활용하였다. 국왕은 “한 평생을 민국에 바쳐왔다”고 표현하였으며, 신료들은 “오늘날 민국의 사업이 주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17세기를 거쳐 18세기에 확립된 조선왕조의 새로운 국가상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18세기 영조는 “백성은 나의 동포”라고 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임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고 까지 극언하였을 정도였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전통적으로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는 인식보다 훨씬 더 진전된 사례이다. 이것이 바로 영조가 꿈꾸고 평생을 바쳐 이룩한 민국의 실상이었다. 결국 18세기 유교적 이상사회를 현실사회에서 구축하고자 하는 논의들은 조선왕조에서는 ‘민국’이라는 정치개념어로서 표현되었다.

    세계사 속 “조선왕조”의 재조명
    유럽에서는 약 14세기경부터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며, 15,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재인식되어 인간 중심의 새로운 문화가 도래하였듯이, 조선의 탄생 역시 고려후기부터 재인식된 고조선의 존재가 중국 고대 이상사회인 요순과 주나라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새로이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시킬 수 있는 국가로서 신왕조가 개창되었다. 조선전기 누대에 걸쳐 이룩한 각종 문물이 세종과 성종년간에 집대성되면서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는 서구의 르네상스기와 비교하면 동시대사의 산물이었다.
    17,18세기 서구사회에서는 절대왕정이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또한 계몽주의가 새로운 사조로 등장하였다. 당시 유교사상이 유럽사회에 전해지면서 관료를 능력에 따라 시험으로 뽑는 과거제는 상당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유교정치사상을 공부한 국왕과 관료들의 통치는 일견 플라톤의 철인(哲人)정치를 연상케 했다. 18세기 청과 조선의 군주는 단지 신성한 왕실의 혈통이라는 데서만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오직 학문의 수양을 통해서 군주이자 스승으로 불릴 수 있는 학자군주의 면모를 과시하였으며, 사회 전반의 개혁을 제왕이 직접 주도하였다.
    계몽주의시대 서양의 지식인들에게 학문을 매개로 정교하게 발전한 관료제를 갖춘 동양의 유교정치 모델은 이상적인 근대국가의 상으로까지 자리매김하여, 혁명기에 새로운 국가를 꿈꾸는 계기가 되었다. 서구에서는 18세기 후반에 가서야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18세기 동아시아의 평화기는 서양에서 흠모해 마지않았던 이상향이였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유교정치 문화는 서구 사회에서 마치 고대 그리스·로마에 이어서 새롭게 발굴해낸 또 하나의 이상화된 사회로 인식되었다.

    영조의 탕평 코드: 국왕, 국가, 백성
    18세기는 다방면에 걸쳐 변화가 뚜렷하였다. 사회 전반이 총체적으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만큼, 탕평을 표방한 왕정(王政)에서는 국왕의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책 추진에 주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영조는 도도(滔滔)하게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 앞에서 온몸으로 홀로 맞서면서, 이미 300여 년이 흘러버린 조선(朝鮮)이라는 오래된 나라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왕의 선택은 항상 불가능해 보이기만 했으나, 유교적 이상사회의 현실구현이라는 목표를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은 없었다.
    중앙의 정치는 붕당정치에서 점차 탈피하여 군주 중심의 탕평정치로 옮아가고 있었다. 국왕은 탕평정치를 통해서 혼란을 수습하면서 국정 주도권을 차츰 회복해 나갔다. 탕평정치가 궤도에 오르면서 국왕의 정책을 뒷받침할 관료조직을 재편성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각 붕당에 흩어져 있던 정치적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의 문물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져 [속대전]이 탄생하였다. 백성의 생활은 시장의 발달로 다방면에서 상품화폐경제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여건의 변화는 국가의 부세 운영 전반과 신분제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제 백성의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백여 년간 결실을 맺지 못하던 양역변통 논의도 마침내 균역법으로 완결되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영조의 탕평정치는 점차 범위를 확대해 나가면서 전 분야로 옮아가 국왕, 국가, 백성 모두를 새롭게 하였다. 총체적인 정국운영론은 탕평으로 표방되었고, 그 모범을 요순의 이상사회에서 찾고자 했으며, 정책 목표는 오직 민국(民國)의 안녕(安寧)에 두었다. 이 과정에서 마치 “국왕, 국가, 백성의 삼중주의 향연”과 같은 시대상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왜 양역을 주요 개혁 대상으로 삼았는가?
    양역은 역역(力役)으로, 신역(身役)과 군역(軍役)으로 나뉜다. 역역은 공공건물 건축, 도로 건설, 성곽 건축 및 보수 등 우리의 몸으로 국가가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는 것이며, 군역은 현대의 병역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남자들이 이 역을 부담하였다. 그런데 병자, 정묘 호란 및 임진란과 같은 병란, 기근, 그리고 역을 피하기 위한 도망 등으로 이 역을 담당할 양인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역 자체는 줄어드는 경우보다는 늘어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남은 자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국가 차원에서 볼 때 양역을 부담할 양인 수를 확보하는 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련되는 중요한 사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양역을 주요 개혁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서얼허통, 노비종모법 등은 양인의 숫자를 확보하는 방법이자 수단이었다. 현행 양인의 건장한 남자 수만을 기준으로 할 경우, 양인의 가계는 한 가구당 여러 명의 양정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어서 세금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밖의 다른 세제인 전세와 공납이 토지를 기준으로 했으므로, 양역에 대한 소민(小民)의 부담은 더 컸다. 하지만 이 제도가 채택될 경우, 양인들은 한 가구당 하나의 세금만을 부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부족액은 양반 호에서 채울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제도는 사실은 양반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을 에둘러 표현한 데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사족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였고, 이를 시행하는 데 100여 년이 걸리게 되었다.

    [속대전]이 지닌 의미
    18세기가 되면 조선왕조가 출범한 지 이미 3백여 년이 지나면서 수많은 판례가 축적되었고, 그 내용은 전반적인 지침을 정한 법전의 규정에 상세한 사례들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속대전]은 바로 조선왕조가 [경국대전]에서 통치의 방향을 정한 지 3백 년이 지나면서 축적된 판례들을 이제 다시 규범화하여 법전의 체계 내로 편입시키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그 내용에 백성이 가장 중요한 변수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는 법전의 편찬 목적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백성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별도의 법전마저 갖추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국법체계상 [경국대전]과 [속대전]이 하나의 틀을 이루게 되는 점을 감안해보면, 사실상 현대 헌법학에서 주장하는 최상위법으로서의 기능, 국가와 국민에 관한 규정이 모두 마련된 셈이다. 이는 바로 18세기 탕평정치기 왕정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왕조 개창시의 역성혁명에 버금가는 강도 높은 개혁이 국왕의 주도와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모든 초점은 백성에 맞추어져 있었다. 바로 백성이란 변수를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한 법전이 [속대전]이었다.

    왜 영조는 [주례]를 근본으로 삼았는가?
    국왕 영조는 유교적 이상 정치와 조선전기 문화 전통에 대한 자신만의 계승 의식이 있었으며, 이러한 계승 의식은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영조는 [주례]의 서문을 직접 쓰면서 자신에게 [주례]가 갖는 의미를 자겸(自謙), 추모(追慕), 흥감(興感), 강개(慷慨) 등 4가지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제시된 내용들은 평소 자신의 저술인 어제서에서 주장하는 맥락과 완전히 일치했다. 마치 [주례]를 자신의 어제인 양 생각하는 듯했다.
    먼저, 유교적 이상사회인 요순정치를 내세워 자신의 사업으로 삼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요순정치는 탕평 정국으로 구체화되었으며, [주례]는 요순의 상징이자 중요한 문물 제도를 간직한 경서로서 이해되었다. 국왕은 즉위 전후에 [주례]를 꾸준히 읽으면서 일찍부터 새로운 정치지형을 이끌어낼 패러다임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탕평정치의 청사진을 구체화하는 데 [주례]를 중요하게 참고했다.
    [주례]의 표방은 국왕의 왕위 정통성을 천명하는 사업의 성격도 지녔다. 이는 국왕이 점차 탕평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결과 생겨난 자신감이기도 했다. 국왕은 신임옥사(辛壬獄事)의 굴레에서 벗어나 왕위 계승의 정당성 명분을 확보하고자 평생토록 노력했다. 임금은 자신의 어제서 대부분에서 황고(皇考: 숙종)와 황형(皇兄: 경종), 사왕(嗣王: 영조)의 관계가 돈독했음을 강조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형과 함께 부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황형의 지극한 사랑 덕분에 왕위를 계승했다고 설명하고자 했다. 특히, 동일한 논법으로 [주례]의 서문에서 선왕들과 자신의 관계를 그리움[追慕]과 감정의 복받침[興感]으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주례]는 숙종, 경종, 영조, 사도세자를 잇는 왕실 가족의 상징물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주례]를 진강하면서 사도세자의 훈육에 활용하고자 한 의도였다.

    목차

    서 문 5

    제1부 정국 지형도∥

    제1장 두 개의 논점
    붕당의 유래
    난숙기(爛熟期)
    왕정의 관료제

    제2장 숙종의 치세
    선왕의 유산
    왕의 선택
    희생(犧牲)

    제3장 탕평을 향한 험난한 길
    황극탕평론
    형제애
    정통성 세우기

    제2부 조선 이데올로기의 탄생∥

    제4장 대변혁의 시대
    고조선(古朝鮮)의 화려한 부활
    단일화된 지역 세계

    제5장 조선의 이상 국가 만들기
    신성한 왕실의 탄생
    주(周)나라 관직의 등장
    방백(方伯)이 다스리는 나라
    주(周)나라의 재현

    제6장 요순이 된 임금
    잊혀진 요순
    국왕의 재해석
    세종 따라잡기

    제3부 유교적 법치주의 국가∥

    제7장 [주례]의 표상
    이단 낙인 벗기기
    예의 기원을 찾아서
    [주례]는 어떤 책인가

    제8장 주나라를 탐내다
    왕실과 인연
    경연의 [주례]

    제9장 조선의 법치주의 전통
    혁명의 유산
    꺼지지 않는 불꽃

    제10장 [속대전]의 탄생
    [경국대전] 회복 운동
    형정(刑政) 속에 백성을 담다

    제4부 백성에게 개혁의 길을 묻다∥

    제11장 백년의 숙원
    세제(稅制)의 변화
    백성, 어디까지인가?

    제12장 대경장
    순문(詢問)의 방향
    균역의 지향점

    제13장 경계인의 재조명
    서얼의 꿈이 이루어지다
    어미의 역을 따르다
    노비, 양인과의 경계를 허물다

    제5부 요순의 두 얼굴∥

    제14장 민국을 열망했던 사람들
    황극(皇極)과 민극(民極)
    국왕의 백성관
    민국 일념(民國一念)

    제15장 황혼의 군주
    을해옥사
    임오화변
    요순은 전제군주인가?

    발문(跋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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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11종
    판매수 380권

    부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조선시대 법사학 및 정치사상이다. 서울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한신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국민대학교?한국전통문화대학교 대학원 강사, 전북대학교 HK교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조선 후기 영조의 탕평정치: [속대전]의 편찬과 백성의 재인식], [두 얼굴의 영조: 18세기 탕평군주상의 재검토], [탕평시대 법치주의 유산: 조선후기 국법체계 재구축사],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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