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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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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이준규
  • 출판사 : 문예중앙
  • 발행 : 2011년 09월 26일
  • 쪽수 : 188
  • ISBN : 97889278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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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한없이 투명한 언어들의 변용과 변주
    언어를 지우고 실재에 이르려는 "지렁이의 아방가르드"


    첫 시집에서 "이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이글거리는])는 놀랍고도 야심찬 선언을 던졌던 시인 이준규가 세 번째 시집 [삼척](문예중앙시선 009)으로 돌아왔다. 이번 시집은 제12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한 [복도]를 비롯하여, 그간 여러 문예지에 발표하거나 자신의 블로그에 등재한 67편의 시들로 모아 엮은 것이다.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하고 시집 [흑백](2006),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2010)을 펴낸 이준규 시인은, 언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지고 있으며 독특하고 명료한 색채의 시세계를 가진 "전혀 색다른"시인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는 선언은, 세상의 ‘모든 시를 기저로부터’ 재구축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며, 시인은 수차례 "실패의 구축"이라는 시어로 그가 지향하는 바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정과리 문학평론가는 "실체의 붕괴와 기미의 탄생, 혹은 무의미를 무의미가 확증되는 방식으로, 의미 있게 하기"라고 이준규의 시세계를 간명하게 요약한 바 있다. 또한 시인이 "나름대로 열심히 해온 글자놀이" 즉, 시인만의 새로운 문법은 파격적인 상상력과 언어로써 언어의 본질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왔다.
    세 번째 시집 [삼척]에도 경계와 한계를 깨뜨리는 시인만의 독특한 언어관과 시학이 담긴 시편들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한없이 투명한 언어로 불투명한 세계의 무한을, 무한한 균열을 바라본다. 끊임없이 변용되고 변주되는 시어/단어들을 고르고 배치하며 어떤 한계와 경계를 무한히 무너뜨린다. "그 투명한 누혈들이 기나긴 문장의 사슬을 엮어 "지렁이의 아방가르드"를 실천하"(강정)는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대상, 단 하나의 구절에서 촉발된 수많은 언어의 길을 작심하고 답파해간다. 그 길은 역설적으로 언어를 지우고 가려서 실재에 이르려는 단 하나의 길에 이르려는 시도다. 그래서 그의 시는 다변과 요설 너머로, 그 다변과 요설을 통해서만 건져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을 지향한다. 들끓는 사유 속에 숨은 평정심, 폭발적인 말들 속에 숨은 깨달음이 그의 시에 들었다. 저 들끓음과 고요함, 폭발함과 나직하게 속삭임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 청춘의 방황과 순결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준규 시인은 주로 자신이 본 것을 쓴다. 상상한 것들이 아니라 어떤 장소에서 어떤 시간에 본 것을 그대로 쓴다(반드시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는 아니다). 비상 층계참에서, 공원에서, 복도에서, 네모난 종이 상자를 옮기며, 인왕산을 오르며, 버스를 타고 삼척으로 가며 그가 바라본 사실들을 쓴다. 그리고 그가 보는 사실이라는 것들이 무한하다고 느낀다.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담배를 사러 나가는 일상에서도 무한을 느낀다.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 시를 쓰지만 기억은 늘 정확하지 않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이 세계’는 언제나 무한을 무한하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대개 비현실보다 불분명”(표4, 강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정확한 문장을 쓰고자 한다. 다변과 요설 너머로, 그 다변과 요설을 통해서만 건져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을 지향한다. 본래 세계는 정확하지 않으므로.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가 그렇게 불분명하고, 정확하지 않은 세계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확하지 않기 위해서 정확한 문장을 쓰는”([너는 회색이다]) 것이리라.
    그리하여 이준규 시인은 [삼척]의 여러 시편을 통해, “개로 시작하여 개로 시작했을 뿐인 끝나지 않는 무한”([개]), “벤치, 노파, 소년, 손수건, 사과, 파리…… 공원 안에서 나열할 수 있는 것들의 무한”([공원 벤치]), “봉투, 낚싯대, 물통 …… 처참, 실험, 울음, 웃음 등을 모두 들고 걸어가는, 그의 무한한 손”([그가 걸어간다]), “고래에서 고대로, 고래를 잡는 트롤선에서 트롤리, 트롬빈……. 환유와 인접성이라는 방식으로 늘어나는 단어들의 무한”([고래]) 을 그려내고 있다.

    이 시집의 특징 중 하나가 반복이다. 도감에나 나올 법한 새 이름, 나무 이름 등이 시 속에서 반복된다. 반복되는 시어는 의미와는 상관없이 리듬감을 가지며 음악적인 언어를 완성한다. 또한 하나의 주어와 결합될 수 있는 술어들을 고르고 배치하며 한 편의 시를 완성해나간다. 하나의 술어를 다른 하나의 술어로 끊임없이 변주/변용하면서 환유의 시학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이는 두 번째 시집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이었는데, 이에 대해 허윤진 문학평론가는 "반복의 문제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또 다른 이율배반과 맞물려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바 있는 사건, 과거에 있었던 상태를 현재의 시간 속에서 재생하는 것이다. 기억을 통해 인간의 시간이 서사화될 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반복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준규는 자신이 ‘했던’ 것을 기억함으로써 어쩔 수 없는 반복의 구조에 편입된다. 동시에 그는 현대의 시인으로서 전통을 갱신하겠다는 의지 또한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문학사를 망각하고 자신의 시를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게 된다.”(해설 [체스],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중에서)고 밝히고 있다. 즉, 반복은 기억과 망각의 문제에 닿아 있다. 시인이 동일한 것을 반복하더라도, 그것은 ‘기억과 망각의 문제에 닿아’ 차이를 만들고, 더 이상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이 보는 세계는 정확하지 않으며, 장악할 수 없는, 불투명한 세계다. 그러나 삶은 무수히 반복된다. 그러한 세계는 무수히 무한한 것들의 무한한 균열을 가지고 있다.

    해설을 쓴 소설가 김종호는 이 시집 전체의 특징적인 요소로서, 시인/귀신이 ‘보는 것과 부르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시인/귀신이 주변의 온갖 사물과 사람들을 보고 부르지만(이름을 부여하지만), 그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는 데는 실패한다. 김종호 씨에 따르면, “귀신은 언제나 그 자신이 어떻게 존재가 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비상 층계참에서 집 주위의 돌담과 놀이터와 아이들과 산책로를 보고 공원에서 사과와 노인과 파리 등을 보는 것, 혹은 이인성, 정영문, 박지혜, 이두성, 김종호 등을 부르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기 위함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다. 우울해서다. 그러니까 그의 힘겨운 (언어) 반복 놀이는 “자신으로부터 우울과 침잠과 고독과 분노를 떼어내 보잘것없는 세계의 기표 위에 덧대놓는”(강정) 행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시집 전반에 흐르는 ‘장광설에 가까운 이 시들’에 대해 김종호 소설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차이들은 반복된다고 말한들, 그 차이가 무엇이고 반복되는 단어와 글귀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여러 가지 전거들로 아귀를 맞춘다 한들 그 아귀들에서 이탈되는 무언가는 항상 존재한다. 의미는 탈구되고 형식은 단순해지며 남은 것은 표현뿐이다. 그는 의심한다. 그러나 의심한다고 해서 그 자신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 귀신은 단 한 문장만을 무한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를 테면, 바라보니 즐겁고, 부르면 온다. 그러니 우울하군."

    추천사

    세상의 햇빛이 끝내주게 맑다. 요망한 살의가 느껴질 정도다. 그가 만국의 기표, 만상의 이름들을 드리블해나간다. 그는 혹시 이른 치매를 걱정하고 있는지 모른다. 햇빛 아래 사물들이 너무 선명해 되레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보는 현실은 대개 비현실보다 불분명하고, 요상한 작전과 비열한 협잡질투성이인지 모른다. 그는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름다운 문장들에 현혹되는 자신을 먼발치에 두고 그저 강가를 서성이거나 언젠가 읽었거나 선망했던 지명들을 맨몸으로 답사하면서 세계의 모든 기억을 지우려 한다. (이를 앙다물고 첫 번째 슛! 골대를 살짝 비껴간다.) 그가 바라는 모든 건 세계의 요원한 희망이요, 다시 맞닥뜨리면 욕지기가 올라올 부끄러운 추억에 불과하다. 그는 삶도 죽음도 아닌 지점에서 “미치느라 바쁘다”. 그는 “영원한 고립의 척후”에 자신을 두고 힘겨운 반복놀이를 한다. 문장의 궁극이 그의 목표는 아니다. 온전한 삶도 경원할 만한 죽음도 그의 몫이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으로부터 우울과 침잠과 고독과 분노를 떼어내 보잘것없는 세계의 기표들 위에 덧대놓을 뿐이다. (그리하여 두 번째 슛! 적의 골키퍼가 의외로 날래다.) 이제 더 울 일도 웃을 일도 없으니 그저 한 번 더 웃고 그보다 더 여러 번 울 일만 남았다. 그 투명한 누혈들이 기나긴 문장의 사슬을 엮어 “지렁이의 아방가르드”를 실천한다. 그는 어쩌면 치매보다 각성을 더 두려워하는 건지 모른다. 그는 내게 참 나쁜 친구다. 그가 울 때, 나는 그보다 더 울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감춘 채 성을 낸다. 울음을 그친 그의 표정엔 ‘조까라마이싱’이라 쓰여 있다. 그가 상복하는 항우울제 이름이다. 아무나 먹어선 안 된다.
    -강정 (시인)

    목차

    삼척 0

    이것은
    그것은
    동그라미
    무엇이
    무언가

    여기
    너와 나
    이 비
    그곳에는
    겨울
    결코
    강으로
    아무
    그 사람
    그가 걸어간다
    그것의 끝
    공원 벤치
    개회나무

    산책의 가능성
    박색

    네모난 종이 상자
    너의 두 번째 책
    너는 문을 나선다
    소란
    산행
    너는 회색이다
    고래
    바람이 불었다
    바다
    언덕이 반복되는 벌판
    복도
    너의
    비가 내리고
    이발
    어떤 날
    문장과 슬픔
    어떤 충동
    여름과 의자
    우울
    구름과 낫
    매미와 나
    일요일 오전

    참여
    책상
    태풍
    나의 우울
    그친 비


    80%
    da
    파상
    계단

    놀이터와 고양이와
    오늘의 날씨
    하루
    흐르는 너
    삼척

    해설
    이생, 규장―귀신론·김종호

    본문중에서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지금 빗살무늬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너를 향하고 있다. 이 비는 지금 좋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지금 너를 향해 내리고 있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탄천에 내린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다리를 꼬고 있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순록이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겨울이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너를 위해 세운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지금 중랑천을 때린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관사를 버리고.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허기를 향한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향기인가.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지금 울고 있는가.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그치지 않는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너를 향한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너를 향했을 뿐이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좋다.
    (/ '이 비5' 중에서)

    공원이 있다. 한 공원이 있다. 공원은 작다. 한 공원은 작다. 작은 한 공원에는 벤치가 있다. 작은 공원의 벤치 위에는 손수건이 있다. 작은 공원의 벤치 위에 있는 손수건 위에는 사과가 한 알 있다. 작은 공원의 벤치 위에 있는 손수건 위에 있는 사과에는 흠집이 있다. 작은 공원의 벤치 위에 있는 손수건 위의 사과에는 흠집이 있고 그 흠집 위로 파리가 와서 앉았다. 작은 공원에 있는 벤치 위의 손수건 위의 사과의 흠집에 앉은 파리의 몸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작은 공원에 있는 벤치 위의 손수건 위의 사과에 난 흠집 위에 앉은 파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한 소년이 파리가 앉은 사과가 손수건 위에 놓인 벤치로 다가간다. 작은 공원에 있는 파리가 앉아 몸을 빛내고 있는 흠 있는 사과가 놓인 손수건이 있는 벤치로 다가서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노파가 파리가 앉아 몸을 빛내고 있는 사과가 놓인 벤치의 맞은편에 있는 벤치 위에 앉아 있다. 작은 공원에는 두 개의 벤치가 있는데 한 벤치 위에는 노파가 앉아 맞은편 벤치 위에 놓인 손수건 위의 사과로 다가서고 있는 소년을 바라본다. 노파의 눈에 파리는 보이지 않는다. 노파의 눈에는 사과의 흠집도 보이지 않는다. 소년의 눈에 사과의 흠집과 그 위에 앉은 파리의 모습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많은 것이 있다. 공원은 무한을 닮았다.
    (/ '공원 벤치' 중에서)

    복도는 복도다, 복도는 걸어갈 수 있고, 복도는 서서 끝을 볼 수 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복도는 말이 없고, 겨울밤의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복도에는 달빛이 흐르지 않고, 가로등빛이 흐르지 않고 복도의 불빛이 흐른다, 그것들은 흐르는 것들이다, 나는 복도의 끝에서 복도의 끝을 본다, 문을 열면서, 복도의 끝을 바라보면, 그 끝은, 어떤 아가리 같다, 용광로, 조금 떠서 날아가면 그 용광로에 삼켜질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나는 그를 생각한다, 조금 미쳐서, 고개를 숙이고, 어떤 감동이 있는가,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복도에는 창이 있고,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의 밖에는 세상이 있고, 세상의 밖에는 망설임이 있고, 망설임의 밖에는 황당함이 있고, 황당함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 말고는, 내가 너에게 이 시를 줄 것 같으냐, 나는 조금 미쳐 있고, 조금 미쳐서 겨울밤의 이 누추한 시를 쓰고 있다, 복도는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나는 복도에서 무언가 망설였다, 창을 열면서, 너를 사랑했다, 창을 닫으면서, 너를 사랑했다, 복도는 망설이는 곳이다, 우주처럼, 복도는 우선 복도다, 복도는 하나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두 개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세 개의 지평을 가진다, 복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도에 신문이 떨어질 때, 복도에 아이들이 뛰어갈 때, 복도에 세탁부가 지나갈 때, 복도에 손님이 지나갈 때, 복도는 여전히 복도다, 복도는 우울하다, 복도는 조금 휘어 있다, 복도는 정확한 직선이 아니다,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조금 미치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복도는 조금 미친 복도다, 복도는 깨끗하지 않다, 복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도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마루로 진입해야 한다, 나는 복도에 문득 서 있었다, 복도의 다른 끝에 당신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복도, 우리의 시.
    (/ '복도' 중에서)

    언덕이 반복되는 들판. 그는 언덕 하나를 오르고. 그는 언덕 둘을 오르고. 그는 언덕 셋을 오르고. 그는 언덕을 잊는다. 언덕이 반복되는 들판. 그는 구름 하나를 쳐다보고. 그는 구름 둘을 쳐다보고. 그는 구름 셋을 쳐다보고. 그는 구름을 잊는다. 버려진 신발 하나. 버려진 우산 하나. 버려진 인형 하나. 그리고 나무 한 그루. 나무 두 그루. 나무 세 그루. 그는 지워진다. 언덕이 반복되는 들판.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 거품 하나. 거품 둘. 거품 셋. 그는 파도를 잊는다.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 갈매기 한 마리. 갈매기 두 마리. 갈매기 세 마리. 그는 파도를 잊는다. 버려진 등대 하나. 버려진 방파제 하나. 버려진 손수건 하나. 그리고 돌멩이 하나. 돌멩이 둘. 돌멩이 셋. 그는 지워진다.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 기침이 반복되는 실내. 기침 한 번. 기침 두 번. 기침 세 번. 그는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신음이 반복되는 실내. 신음 한 번. 신음 두 번. 신음 세 번. 그는 창밖의 검은머리방울새를 본다. 버려진 책상 하나. 버려진 기억 하나. 버려진 키스 하나. 그리고 눈물 하나. 눈물 둘. 눈물 셋. 우리는 천천히 지워졌다. 세상의 끝에서, 검은머리방울새를 기다리며.
    (/ '언덕이 반복되는 들판' 중에서)

    상자가 있다. 네모난 상자가 있다. 둥그런 상자는 없다. 상자가 있다. 네모난 상자가 있다. 네모난 상자는 종이상자다. 네모난 종이상자가 있다. 네모난 종이상자가 여러 개 네모난 방에 쌓여 있다. 둥그런 방은 있다. 둥그런 방은 많지 않다. 그건 드문 경우다. 나는 드문 경우에 있지 않고 흔한 경우에 있다. 네모난 방에 네모난 종이상자가 여러 개 있다. 상자는 나무로 되어 있을 수도 있고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네모난 방에는 네모난 종이 상자가 쌓여 있는데 그 중에 세 개를 나는 옮기려고 한다. 네모난 방에 있는 네모난 종이상자는 꽤 크다.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줄자를 가지고 재어본 후에 여기다 쓰면 되겠지만 대충 백과사전 반 질이 들어갈 정도라고 해두자. 반 질이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써본다. 꽤 큰 종이상자임에 분명하다. 종이상자에는 모두 BLUE BIRD라고 써 있다. 자세히 보니 재봉틀을 담았던 상자다. 이렇게 많은 재봉틀이 집에 있을 리는 없고 어떤 재봉틀 대리점이나 재봉틀 공장에서 얻어온 상자일 것이다. 이 네모난 재봉틀 종이 상자에는 옷이 가득 들어 있다. 나는 네모난 방에 있는 옷이 가득 들어간 많은 네모난 재봉틀 상자 중에 세 개를 옮기기로 한다. 나는 상자를 하나씩 들어 엘리베이터 앞에 놓는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 상자를 놓는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상자를 꺼낸다. 나는 상자를 차에 싣는다. 둘은 트렁크에 싣고 하나는 뒷좌석에 싣는다. 나는 앞좌석에 타고 이동한다. 운전은 다른 사람이 한다.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차가 멈춘다. 나는 차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낸다. 나는 네모난 상자를 하나씩 들고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걷는다. 나는 상자 세 개를 문 앞에 쌓는다. 나는 열쇠로 문을 열고 상자를 집안으로 옮긴다. 나는 상자 두 개를 포개어놓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곳에 놓는다. 나는 네모난 커다란 재봉틀 종이 상자를 어떤 집에서 어떤 집으로 옮겼다. 아침을 먹은 후에, 커피를 여러 잔 마시고 담배를 피운 후에, 책을 조금 읽은 후에, 오전에.
    (/ '네모난 종이 상자'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70~
    출생지 경기도 수원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1970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200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자폐]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흑백]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삼척] [네모] 가 있다. 제6회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 제12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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