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결제, 신용카드 청구할인
인터파크 롯데카드 5% (8,470원)
(최대할인 10만원 / 전월실적 40만원)
북피니언 롯데카드 30% (6,240원)
(최대할인 3만원 / 3만원 이상 결제)
NH쇼핑&인터파크카드 20% (7,130원)
(최대할인 4만원 / 2만원 이상 결제)
Close

백범일지 애장판 [양장]

소득공제

2013년 9월 9일 이후 누적수치입니다.

공유하기
정가

9,900원

  • 8,910 (10%할인)

    490P (5%적립)

할인혜택
적립혜택
  • I-Point 적립은 출고완료 후 14일 이내 마이페이지에서 적립받기한 경우만 적립됩니다.
  • 추가혜택
    배송정보
    주문수량
    감소 증가

    출판사 서평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와 전창근 감독 영화 ‘아, 백범 김구 선생!’의 결합

    [일러두기]

    ① 이 책은 1947년 12월 15일 발행 국사원본, 김구 자서전 ‘白凡逸志 (백범일지)’를 저본으로 삼았다.
    ② 한편, 1947년 백범일지출판사업소 발행, 김구 자서전 ‘白凡逸志’와 1954년 3월 16일 고려선봉사 발행, 김구 자서전 ‘白凡逸志’ 5판본(초판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본)을 참고하였다.
    ③ 이 책에 표현된 어구 자체는 백범 선생의 체취가 풍기도록 가급적 원문대로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표기는 현용 ‘한글맞춤법’에 준하였다. ?? 이어니와, 여니와→이거니와. 또, 동일 인명 중 앞의 것과 뒤의 것이 다른 것은 많은 것으로 통일하였다.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하였다.
    ④ 제목은 대제목, 중제목은 원문대로 하고, 소제목은 차례에만 있는 것을 본문의 알맞는 자리에 달았다. 중제목과 소제목에는 각각 번호를 달았다.
    ⑤ 주는 ( ) 안에 ??으로 표시하여 달았다. ?? 표시가 없는 ( ) 안의 주는 원문에 있는 주이다. ( ) 안의 한자도 원문에 없는 것은 ??으로 표시하여 구별하였다.
    ⑥ 삽화는 1960년 중앙문화영화사 제작, 전창근 감독 영화 ‘아, 백범 김구 선생!’의 여러 장면을 본문의 내용에 알맞게 수록하여 독자들의 감상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다만, 영화에 나오지 않는 장면으로 필요한 것은 다른 사진 자료로 사용하고 그 밑에 사진 설명을 달았다.

    '다시 보는 ‘백범일지' [문학박사·(사)인하역사문화연구소] - 양윤모

    1. 김구와 ‘백범일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백범 김구만큼 ‘민족 독립’이라는 명제에 초지일관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의 일생은 시간적으로는 1870년대에서 1940년대를 포괄하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무대로 전개되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김구의 삶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가 있다.
    그것은 첫째, 시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중요한 역사적 계기 내지는 사건들과 김구의 삶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동학사상과 동학농민운동, 위정척사사상과 의병운동, 기독교의 수용과 구국계몽운동, 경술국치와 3·1만세운동 이후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후 자주통일국가수립운동 등 한국 근현대의 중요한 사상적 · 역사적 전개와 그의 궤적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개인적인 지식과는 무관하게 그의 자서전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그에 대한 ‘개인적 차원’에서의 견해 내지는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그의 사상적 면모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관점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간적으로 김구의 삶은 40대 중반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와 중국으로 분리되다가 70세가 되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김구 일생에서 이러한 공간적인 ‘분리와 통합’은 그의 현실 인식이나 사상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하나의 포인트로 지적될 수 있다. 특히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고수파들은 고국에서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무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그들의 이념적인 성향을 결정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임시정부(혹은 임시정부 요인들)가 지향한 국가의 이념적인 목표가 대단히 진보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의 공간적 조건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김구의 정치·사상적인 측면을 이해하고자 할 때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 준다. 좀더 분석적으로 본다면, 중국 망명 이전까지 김구의 활동 무대는 주로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1894년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종람하면서 의병활동에도 참여하는 등의 활동이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활동은 안악과 장연 지역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중앙이 아닌 이른바 변방에서의 활동은 그의 사상 형성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사회의식이 그 이전까지의 경험에 의지하여 표출됨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망명 이후 김구는 이른바 ‘정부’에 참여하면서, 그의 표현대로 일개 ‘김 존위(金尊位)의 아들’에서 일국의 원수(元首)가 되었다. 이 사실은 비록 임시정부이기는 하지만, 김구가 처음으로 정치적 중앙 무대에서 행동과 사고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유의 폭이 망명 이전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외연이 넓어졌다고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김구의 회고록은 바로 그러한 시기에 작성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백범일지’는 김구의 세계관과 현실인식의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특히 ‘백범일지’는 한 개인의 자서전으로서는 드물게 한국 근대사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위정척사(衛正斥邪), 의병, 동학, 애국계몽운동, 105인사건, 그리고 장기간의 독립운동 등―에 대해 포괄적으로 기술하고 있어,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해 온 터였다.、
    그런데 김구(金九) 유족에 의한 ‘백범일지’ 완본(完本)의 공개 이후, 지금까지 연구자들에게 제공된 ‘백범일지’가 사실은 완본이 아니었으며, 번역과 윤문, 철자법, 그리고 용어의 구사에 있어서 완본, 곧 김구의 친필본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다. 물론, 이러한 측면은 이미 1989년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토대로 하여 ‘원본 백범일지’가 출간되면서 부각되기는 하였다. 그런데도 이 책이 출간된 이후에도, 김구의 전기(傳記)라든가 본격적인 연구 논문에서는 계속하여 1947년 판 ‘백범일지’를 기본 사료로 제시, 인용하여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백범김구전집(白凡金九全集)’이 발간되어 김구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갖게 하였다. 특히 여기에는 김구의 친필본과 그 동안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백범일지’ 필사본들, 그리고 1947년 간행된 ‘백범일지’가 모두 실려 있다. 따라서 ‘백범일지’의 이른바 ‘원본(原本)’ 문제를 비롯하여 ‘백범일지’ 필사본과 간행본 상호간의 비교를 통한 차이점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2. ‘백범일지’의 원본 문제
    사전적인 의미에서 ‘원본’은 첫째, 베끼거나 고치거나 한 것에 대한 근본이 되는 문건이며, 둘째, 등사, 초록, 개정, 번역 따위를 하기 전의 본디의 책, 셋째, 작성자가 확실한 문서 등으로 일반적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전적 정의에 작자의 ‘의도’를 포함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를 ‘일지’에 대입시켜 볼 때 일차적인 원전은 물론 친필본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일지’의 경우 문제가 단순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김구의 의도를 고려할 때 ‘일지’의 원본은 최소한 두 가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1929년과 1942년에 각각 완성된 것으로 김구 자신의 친필로 기록되어 있다. 둘째는 김구가 광복 후 귀국해서 1947년 간행한 국사원본이다.
    그런데 기존 영인된 친필본의 기록에 대해서, 김구의 필체가 아닌 부분도 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특별히 어떤 부분이라고 지적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주장은 ‘일지’ 친필본의 여러 문제 중 하나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원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연구자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가 있다. 만약 김구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견해 내지는 의도가 친필본에 들어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원본’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주장을 한 이는 친필본 중 어떤 부분이 김구의 친필이 아닌지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필자는 영인된 친필본이 김구의 친필로 시종했다는 점을 전제로 하였다. 왜냐하면, 누차 지적한 바 있지만, 친필본 상·하권은 김구 자신 필체로 몇 차례에 걸쳐 수정되고 보완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원본의 개념을 김구의 친필 작성 여부보다 작성 ‘시기’에 우선권을 둔다면, 아마도 친필본 중에서 많은 부분, 특히 상권의 첫 부분과 하권의 경우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친필본 상권의 1~2쪽은 용지와 기록한 도구, 그리고 필체에 있어서 1942년에 썼다는 친필본 하권의 많은 부분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때 친필본 상권의 나머지 부분이 씌어진 시기(1929년에 완성됨)와 상권 1~2쪽의 기록 시기가 다르다고 해서, 상권 1~2쪽의 내용을 과연 ‘원본’으로 볼 수 없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친필본과 필사본1의 다음과 같은 부분을 보도록 하자.

    ①“(今日토록基洞주위에世居하는)晉州姜氏와德水李氏等土班들의게賤待와壓制를代代로받아온것이다그實例를略擧하면우리金門處女를姜李氏門中으로出家하는것은榮光으로알지만은姜李氏處女가우리金門으로시집오는것은보지못하였으니婚姻의賤待요姜李氏들은代代로坊長(今面長)을世襲으로하지만은 우리金哥는代代로尊位의職外에一步難進(尊位는坊長命令을受하여內各戶에 稅金을收捧하는職任이니라)하니就職卽政治的壓制요姜李氏들은兩班의淫威를施하여金門의土地를强?하고金錢을强奪한後農奴로使用하엿나니經濟的壓迫이요姜李氏들은비록編髮小我라도우리金門에七十八十老人을對하면劣等語를使用하여이랫나저랫나이리하게저리하게의賤待를받는反面에우리집老人들은姜李氏의子孫들의加冠한童子라도반드시敬語를◎◎하엿나니此는言語의 賤待이다”[친필본, 상권, 2쪽] (밀줄-필자)

    ②“(到今것周圍에世居하는)晉州姜氏와德水李氏等土班들의게賤待와壓制를世世받아온實例를略擧하면一婚姻이니우리집딸을姜李氏의게出家는하엿어도姜李氏의딸을迎來하긴難天上이엇고二所任이니姜李氏들은坊長(今面長)을世襲으로하되우리祖先들은代代로尊位(各戶의稅金받는任者)가되어坊長의命令을服從하엿고三經濟이니姜李氏들은兩班의淫威를施하야金錢을强奪하고土地를强占하난◎農奴로使用하엿고四使用語이니姜李氏들은編髮小我라도우리집老人들을面對하면◎◎나저랫나이리하게저리하게의下等語를使用하는反對로 우리祖先은겨우姜李氏의게는갓치이랫나저랫나를하나加冠만하엿으면세살을 먹은者에게라도반듯이恭待를하◎◎”[필사본 1, ‘전집’2, 31~32쪽](밑줄-필자)

    ③“이리하여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압제를 받아 왔다. 우리 문중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을 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드는 일은 없었다.”[국사원본, 4쪽]

    위 기록은 양반 집안인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 집안을 비교하면서 김구가 자신 집안의 사회·경제적 처지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①은 친필본 상권에 있는 내용인데, 김구가 하권을 정리하면서 나중에 다시 정리한 부분이다(1942년 이후). ②는 친필본 상권을 완성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측근에게 필사시킨 필사본 l의 내용이다(1929년). 그리고 ③은 국사원본의 해당 부분이다(1947년). ①과 ②를 비교해 보면 첫째, ①에는 ‘존위(尊位)’에 대한 설명이 부가되어 있다. 둘째,①이 ②에 비해서 구사되고 있는 용어가 좀더 세련되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예컨대, 혼인의 천대←혼인, 취직, 정치적 압제←소임, 경제적 압박←경제, 언어의 천대←사용어 등). 셋째, 전체적인 문맥이 상당히 정돈되어 있다. 그리고 친필본과 필사본 1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신분적 차별에 대한 기술이, ③의 국사원본에서는 대폭적으로 삭제가 되었는데, 신분적 차별의 구체적 내용이 빠져 있다. ①과 ②의 내용이 보여 주는 이러한 차이는 1929년과 1942년(혹은 그 이후, 1947년 이전)이라는 시간적 간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본’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울 만큼 큰 차이가 있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영인된 친필본의 모든 내용은 ‘원본’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국사원본을 과연 ‘원본’으로 볼 수가 있는지에 대해서이다. 국사원본의 경우 너무 많은 부분이 윤문, 삭제, 축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친필본과 틀린 내용이 발견되고 있어서 불안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록 부분적으로 국사원본이 친필본의 내용을 잘못 번역한 곳이 있다고는 해도, 국사원본의 간행에 김구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는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김구는 국사원본의 간행에 임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나는 내기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서 이 책을 출판할 것은 몽상도 이니하였 었다. 나는 완전한 우리의 독립국가가 선 뒤에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 의 눈에 비추이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이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어놓게 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김구, ‘저자의 말’, 국사원본 2쪽]

    위의 내용으로 보건대, 김구가 이 책의 간행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면 과연 국사원본의 출간이 감개가 무량한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김구는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에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임으로써이다.”[국사원본 6쪽]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자신이 관여하지도 않은 책의 간행에 동의를 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윈본’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 기존 영인된 친필본을 원본으로 본다. 그 이유는 김구의 친필본이기 때문이다. 비록 친필본 하권의 경우 광복 후 수정, 삭제되어 다시 편집한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작업에 김구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이상 그것은 김구의 친필본인 젓이다. 이러한 점에서 광복 전 김구가 남긴 가장 체계적이며 또한 비교적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작성한 ‘백범일지’는 김구의 의식구조라든가 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그 어느 자료보다 우선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둘째, 1947년에 간행된 국사원본도 원본으로 인정한다. 그 이유는 국사원본 역시 김구의 당시 관점에서 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국사원본이 출간될 때, ‘번역과 한글철자법 수정으로’ 여러 친구들이 수고하였다고 김구가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출간에 김구의 의사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친필본이나 국사원본은 모두 동일한 조건과 이유로 ‘원본(原本)’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저술의 시기적 차이로 인해서 문헌의 해석적인 차이점과 김구 자신의 관점 등이 변화하는 모습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으며, 이러한 것은 오히려 김구의 현상에 대한 인식 변화를 구명케 하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젓이다.

    3. ‘백범일지’의 가치
    현재 ‘백범일지’는 대략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김구가 귀국한 후 간행한 ‘백범일지’(곧 극사원본)이고, 두번째는 1989년 출간된 ‘원본백범일지’인데 이것의 대본이 된 것은 김구의 측근에 의해서 원래의 ‘백범일지’를 필사한 필사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백범일지’의 완본(完本)이 아니었던 관계로 그 동안 자료로서의 신빙성과 인용의 의문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세번째는 근래 영인 공간된 김구 친필본 ‘백범일지’이다. 이 세 가지는 1999년도에 간행된 ‘백범김구전집’에 모두 영인되어 실려 있다. 특히 ‘전집’에는 김구가 귀국 후 구술한 것을 정리했다는 ‘백범일지’ 하권의 후속편에 해당한다고 보는 ‘계속(繼續)’이라는 문건도 함께 실려 있다. 또한, ‘전집’에는 김구 친필본을 필사한 등사본 두 가지가 실려 있다(‘전집’ 2에 실려 있는 ‘필사본’ 1과 ‘필사본’ 2가 그것이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여러 형태와 내용으로 존재하는 ‘백범일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친필본과 두 종류의 필사본, 그리고 1947년에 간행된 국사원본의 내용을 상호 비교하면서 각각의 선후 관계와 결락(缺落) 부분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특히 친필본에 보이는 수정과 가필, 그리고 삭제 부분을 중심으로 필사본들과의 비교를 통해 특히 필사본 2의 필사 시기와 그 목적을 추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백범일지’의 ‘원본’에 대한 문제까지 다루게 되었다. 그 결과 필사본 2는 아마도 1947년 ‘백범일지’의 최초 간행본, 즉 국사원본의 간행을 위한 준비로 필사되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추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친필본이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과 가필, 삭제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이 친필본의 ‘원본’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국사원본의 경우 비록 친필본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잘못 독해했다거나 대대적인 윤문과 축약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 역시 김구의 새로운 ‘백범일지’로서 권위를 갖는다고 보았다. 김구가 국사원본의 간행에 어떠한 형식이든지 관여를 했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원본’의 성격을 갖는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현재 완본에 가까운 형태로 남아 있는 ‘백범일지’는 모두 김구 자신의 관점을 거친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백범일지’ 자체에 대해 모든 것이 해명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이 더욱 치밀성을 갖게 되고 김구에 관한 주변 기록과 면밀하게 비교된다면 ‘백범일지’와 역사적 인물로서의 김구에 대해 좀더 많은 사실들을 밝혀 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범일지’에 대해 ‘텍스트’의 완전성을 복원한다든가, 혹은 ‘백범일지’의 결정판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충분한 의의가 있겠지만, ‘원본’으로서의 친필본과 ‘국사원본’과의 상호 관계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는 것 역시 중요한 연구 방향일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모, ‘김구와 백범일지’, ‘한국학보’ 제106집, 일지사]에서

    목차

    저자의 말

    [상 편]

    머리말-인, 신 두 어린 아들에게
    1. 우리 집과 내 어린 적
    (1) 선조와 고향
    (2) 어리신 어머니의 난산으로 태어난 나
    (3) 아버지의 가난과 불평
    (4) 나의 글공부
    (5) 과거 보다가 낙제
    (6) 동학에 입도
    (7) 해주성 싸움의 패전
    (8) 청계동 안 진사와 고 선생
    2. 기구한 젊은 때
    (1) 압록강변의 망명과 강계성 습격의 패전
    (2) 약혼과 파혼
    (3) 치하포 사건
    (4) 인천감옥에서의 사형 언도와 탈옥
    3. 방랑의 길
    (1) 숨은 지사들과의 사귐
    (2) 마곡사에서 중이 됨
    (3) 평양의 술 먹고 시 짓는 파계승
    (4) 효 도
    (5) 혼 인
    (6) 교원 생활
    4. 민족에 내놓은 몸
    (1) 을사신조약과 상동회의
    (2) 교육 운동
    (3) 나석주, 노백린, 이재명과 나
    (4) 신민회와 나
    (5) 안명근 사건과 양기탁 사건과 나
    (6) 나의 체포와 17년 징역 언도
    (7) 왜의 악형
    (8) 애국 지사들의 운명 148
    (9) 서대문감옥과 인천감옥의 내 생활
    (10) 출옥과 농촌 생활
    (11) 기미 3월 1일과 상해에 탈주

    [하 편]

    머리말

    1. 3·1운동의 상해
    (1) 상해에 모인 인물들과 나
    (2) 경무국장 시대
    (3) 왜적의 밀정을 처치
    (4) 이동휘와 공산당
    (5)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지키던 일
    (6) 이봉창 사건과 윤봉길 사건
    (7) 피치 박사 부처와 가흥 저씨 집의 신세

    2. 기적장강만리풍
    (1) 가흥의 망명 생활
    (2) 장개석 장군과의 회견
    (3) 낙양군관학교
    (4) 남경의 망명 생활과 왜의 폭격
    (5) 장사 이주와 내 가슴에 박힌 탄환
    (6) 광동, 유주를 거쳐 중경에
    (7) 독립당, 공산당의 옥신각신
    (8) 광복군 조직과 서안, 부양에서의 특별 군사훈련
    (9) 중경의 7년 생활
    (10) 귀 국
    (11) 삼남 순회

    3. 나의 소원
    (1) 민족 국가
    (2) 정치 이념
    (3)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해설] 다시 보는 ‘백범일지 : 양윤모
    ‘백범일지’ 관계 학술 논문
    김구 선생 연보
    전창근 감독 약력

    본문중에서

    이 책은 내가 상해와 중경에 있을 때에 써 놓은 ‘백범일지(白凡逸志)’를 한글철자법에 준하여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끝에 본국에 돌아온 뒤의 일을 써 넣었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尹奉吉) 의사 사건 이후에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基地)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내 나이 벌써 70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로 주로 미주(美洲)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회(所懷)를 고하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었다
    나는 내가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서 이 책을 출판할 것은 몽상도 아니하였었다. 나는 완전한 우리의 독립 국가가 선 뒤에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치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이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어놓게 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나를 사랑하는 몇몇 친구들이 이 책을 발행하는 것이 동포에게 다소의 이익을 드림이 있으리라 하기로 나도 허락하였다. 이 책을 발행하기 위하여 국사원 안에 출판소를 두고 김지림 군과 삼종질 흥두가 편집과 예약 수리의 일을 하고 있는바, 혹은 번역과 한글철자법 수정으로, 혹은 비용과 용지의 마련으로 혹은 인쇄로 여러 친구와 여러 기관에서 힘쓰고 수고한 데 대하여서 고마운 뜻을 표하여 둔다.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이 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 철학의 대강령을 적어 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 주셔서 저마다의 민족 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 주시기를 바라는 바다.
    내가 이 책 상편을 쓸 때에 열 살 내외이던 두 아들 중에서 큰아들 인은 그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연전에 중경에서 죽고, 작은아들 신이가 스물여섯 살이 되어서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아직 홑몸으로 내 곁을 들고 있다. 그는 중국의 군인인 동시에 미국의 비행 장교다. 그는 장차 우리 나라의 군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 대부분은 생존하여서 독립의 일에 헌신하고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최광옥, 안창호, 양기탁, 현익철, 이동녕, 차이석, 이들도 다 이제는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하릴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이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3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 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에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임으로써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면, 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자와 여자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거니와, 그와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凡人)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기원 4280년(??1947년) 11월 15일 개천절 날
    (/ 저자의 말 중에서)

    (1) 선조와 고향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王建太祖)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8세손이 충렬공(忠烈公),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金自點)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 텃골 팔봉산 양가봉((白雲坊基洞八峰山楊哥峰)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後浦)에 있는 선영에는 11대 조부모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그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세를 하는 일이었다. 텃골에 처음 와서는 조상님네는 농부의 행색으로 묵은장이(??묵정밭)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軍役田)이라는 땅을 짓게 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때에는 나라에서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압제를 받아 왔다. 우리 문중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을 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 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 적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 대사(??婚喪大事)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李貞吉)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의 종으로서 속량받은 사람이라 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를 상고하여 보면 글 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어사(??假御使)질을 하다가 해주 영문에 갇혔다가 서울 어느 양반의 청편지(청질을 하는 편지)를 얻어다 대고 겨우 형벌을 면하였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었다. 암행어사라는 것은 임금이 시골 사정을 알기 위하여 신임하는 젊은 관원에게 무서운 권세를 주어서 순회시키는 벼슬인데, 허름한 과객의 행색으로 차리고 다니는 것이 상례다.
    증조 항렬 네 분 중에 한 분은 내가 대여섯 살까지 생존하셨고, 조부 형제는 구존(??俱存)하셨고, 아버지 4형제는 다 살아 계시다가 백부 백영(伯永)은 얼마 아니하여 돌아가셔서 나는 다섯 살 적에 종형들과 함께 곡하던 것이 기억된다.
    (/ '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중에서)

    1.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 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 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이었다.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 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 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 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과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 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나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오 내오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고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 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 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 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 알륵(??알력), 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 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 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의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 하면 그것은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희랍(??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로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으라운(??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 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 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댄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 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 '3. 나의 소원' 중에서)

    관련이미지

    저자소개

    생년월일 1876.07.11~1949.06.26
    출생지 황해도 해주
    출간도서 51종
    판매수 42,743권

    본명 김창수, 金九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가난과 양반들의 횡포를 경험했기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에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대적 교육사업과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에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때 백정, 범부들(평범한 사람들)의 애국심이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백범(白凡)이

    펼쳐보기

    저자의 다른책

    전체보기
    펼쳐보기
    양윤모 해설 [기타]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해설 [백범 김구]

    민병덕 엮음 [기타]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해당작가에 대한 소개가 없습니다.

    이 책과 내용이 비슷한 책 ? 내용 유사도란? 이 도서가 가진 내용을 분석하여 기준 도서와 얼마나 많이 유사한 콘텐츠를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비율입니다.

      리뷰

      8.0 (총 0건)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북피니언 지수 최대 600점

      리뷰쓰기

      기대평

      작성시 유의사항

      평점
      0/200자
      등록하기

      기대평

      0.0

      교환/환불

      교환/환불 방법

      ‘마이페이지 > 취소/반품/교환/환불’ 에서 신청함, 1:1 문의 게시판 또는 고객센터(1577-2555) 이용 가능

      교환/환불 가능 기간

      고객변심은 출고완료 다음날부터 14일 까지만 교환/환불이 가능함

      교환/환불 비용

      고객변심 또는 구매착오의 경우에만 2,500원 택배비를 고객님이 부담함

      교환/환불 불가사유

      반품접수 없이 반송하거나, 우편으로 보낼 경우 상품 확인이 어려워 환불이 불가할 수 있음
      배송된 상품의 분실, 상품포장이 훼손된 경우, 비닐랩핑된 상품의 비닐 개봉시 교환/반품이 불가능함

      소비자 피해보상

      소비자 피해보상의 분쟁처리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따라 비해 보상 받을 수 있음
      교환/반품/보증조건 및 품질보증 기준은 소비자기본법에 따른 소비자 분쟁 해결 기준에 따라 피해를 보상 받을 수 있음

      기타

      도매상 및 제작사 사정에 따라 품절/절판 등의 사유로 주문이 취소될 수 있음(이 경우 인터파크도서에서 고객님께 별도로 연락하여 고지함)

      배송안내

      • 인터파크 도서 상품은 택배로 배송되며, 출고완료 1~2일내 상품을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출고가능 시간이 서로 다른 상품을 함께 주문할 경우 출고가능 시간이 가장 긴 상품을 기준으로 배송됩니다.

      • 군부대, 교도소 등 특정기관은 우체국 택배만 배송가능하여, 인터파크 외 타업체 배송상품인 경우 발송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배송비

      도서(중고도서 포함) 구매

      2,000원 (1만원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음반/DVD/잡지/만화 구매

      2,000원 (2만원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도서와 음반/DVD/잡지/만화/
      중고직배송상품을 함께 구매

      2,000원 (1만원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업체직접배송상품 구매

      업체별 상이한 배송비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