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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과 중국에 동시 연재된 박범신의 장편소설!

소설가 박범신의 문학적 변신을 엿볼 수 있는 작품 『비즈니스』. 중국에서 발행되는 잡지 <소설계>와 우리 문예지 <자음과모음>에 동시 연재된 소설로, 인간 내면의 탐구를 넘어 사회문제를 파고든다. 한국의 서해안에 위치한 ㅁ시는 새로운 공업단지와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 신시가지와 상대적으로 퇴락하고 있는 구시가지로 나뉜다. 남편과 함께 구시가지로 내려온 '나'는 아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비즈니스로서 몸을 팔게 된다. 그러다 고위층과 부자들의 집만 터는 '타잔'을 만나고, 그의 착한 심성에 감동한다. 또한 그의 아들인 자폐아 여름이에게 친아들보다 더 깊은 모정을 느끼게 되는데….

출판사 서평

한국의 문예지 『자음과모음』, 중국의 문예지 『소설계』 최초 동시 연재!
―박범신 『비즈니스』, 장윈 『길 위의 시대』


지난 5월 한국의 『자음과모음』, 중국의 『소설계』, 일본의 『신조』가 함께 기획하고 준비해온 ‘문학 교류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 3국의 문예지가 선정한 각국 작가의 단편소설을 동시에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이어 지난 8월, 『자음과모음』과 『소설계』는 장편소설의 동시 게재 또한 시도하게 되었다. 한국의 작가 박범신의 『비즈니스』와 국내에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중국의 대표 작가 장윈의 『길 위의 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두 작품은 한국의 계간 『자음과모음』 2010년 가을호와 겨울호, 중국의 격월간 『소설계』 2010년 5기(期)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두 책을 동시에 출간하게 되었다. 이는 아시아 문학 교류 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실이라 더욱 의미가 있으며, 앞으로 이어질 문학 교류에 있어 하나의 척도가 될 것이다. 또한 이번 교류를 통해 박범신 작가는 한국 작가로는 첫 번째로 외국 문예지에 한국소설을 연재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박범신의 문학적 변신! 『비즈니스』

소설가 박범신은 1993년 절필 후 3년여의 공백을 깨고 중편소설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 자연과 생명에 관한 묘사, 영혼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작품 세계로 문학적 열정을 새로이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작가 스스로 ‘갈망의 삼부작’이라 일컫는 세 편의 장편소설 『촐라체』, 『고산자』, 『은교』를 연이어 발표, 자신의 내면적 방황과 갈증의 여정을 한바탕 토해냈고 이로써 그의 내면을 향한 여정도 일단락된 듯 보인다. 그 시점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비즈니스』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내면화된 시선을 외부 세계로 돌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모순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본이라는 사회적인 폭력 앞에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그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 시대 사회 제도의 모순과 반인간성을 드러내고 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남의 슬픔을 이해하는 길을 잃은 사람들, 그들은 또한 남을 사랑하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작가는 이 사람들이 가닿는 곳에는 결국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묻고 있다. 이런 모습은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지만, 그보다 한층 심화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비즈니스』는 작가 자신에게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나 의미 있는 작품이다.
서해안에 위치한 ㅁ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즈니스』는 천민자본주의의 비정한 생리에 일상과 내면이 파괴되어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서늘한 만큼 날카로우면서도 가슴 저리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는 전 세계적인 자본의 폭력성에 힘없이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개발 지향에 따른 자본주의적 비애(悲哀)

대중국 교역의 전진기지라는 명분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해 개발하고, 사람들에게 그 개발의 결과 잘살게 된다는 환상을 앞세워 건설된 ‘신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개발과 발전에 따라 반비례적으로 퇴락하고 있는 ‘구시가지’. 『비즈니스』에 등장하는 이 두 풍경은 한 도시에 속해 있지만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구시가지 사람들은 신시가지 사람들의 파출부, 청소부, 짐꾼, 배달부, 미장이, 페인트공, 대리운전사, 용역업체 일용직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등 온갖 밑바닥 일을 위해 매일 아침 신시가지로 출근한다. 구시가지는 오로지 신시가지 사람들의 쾌적한 문화생활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본이라는 거대한 권력이 가져온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요컨대 『비즈니스』는 물질적 풍요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계속 슬플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타락한 세계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본다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몸을 팔게 된 ‘나’는 더 이상 사랑을 믿고 살던 스무 살의 순수한 ‘나’가 아니다. ‘생계를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이 아닌, 오직 자식의 과외비를 위해 매춘을 하는 타락한 인간군상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 ‘나’의 고객으로 등장한 ‘그’는 ㅁ시의 신시가지 개발에 가장 피해를 본 구시가지에 사는 사람이다. 그는 ㅁ시를 이끌어가는 고위층과 부자들의 집만 털면서 신출귀몰하게 신시가지를 휘젓고 다녀 ‘타잔’이라 불린다. ‘나’가 몸을 파는 것이나 ‘그’가 도둑질을 하는 것은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도덕과 윤리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명분 속에 철저히 외면된다. 이 명분은 이들을 자본주의라는 감옥 속으로 가두어버린다.
그러나 ‘나’가 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계기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싹튼다. ‘나’는 ‘그’의 착한 심성에 감동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인간적 순수성을 발견하면서, 결코 비즈니스일 수 없는, 참다운 인간관계에 대한 감각을 조금씩 회복해간다. ‘나’의 변화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화시킨 것은 ‘그’의 아들 ‘여름’이다. 억눌린 슬픔과 분노를 단순한 동작의 반복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그 자폐아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는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아이에게 깊은 모정을 느끼게 된다. ‘나’의 이러한 변화 작용의 영향으로 여름이도 자폐증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된다. ‘나’는 결국 여름에게 자신의 친아들에게보다 더 깊은 모정을 느끼게 되고, 그 아이 역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게 된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비즈니스가 되는 도시에서 ‘나’와 여름이가 함께 사는 공간에는 경제만능주의와 비즈니스가 들어설 틈이 없다. 혈연 너머에서 싹튼 이 새로운 가족은, 비루한 사회의 밑바닥에서 온몸으로 고통을 맛본 ‘나’와 어머니를 잃고 자폐에 빠져 학교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의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여름이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비즈니스』, 대륙을 강타! 중국 독자를 사로잡았다

『비즈니스』는 한국 사회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눈부시게 펼쳐가고 있는 중국의 독자들에게도 뜻깊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소설계』에 『비즈니스』가 발표되자마자 이례적인 반응을 보였다. 『소설계』의 편집장 웨이신홍은 “『비즈니스』는 이야기와 주제가 중국의 현 실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대중들의 정서에 잘 부합되고 무엇보다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성취한 소설”이라 평했고, 상해문예출판사를 통해 중국 유수의 영화사들로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오기까지 했다. 웨이신홍의 말에 의하면 중국에 소개된 한국 작가들의 작품 중 이토록 급속도로 반응을 이끌어낸 건 처음이며, 책이 출간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 더더욱 놀랍다고 했다. 이에 상해문예출판사는 2011년 1월 북경에서 열릴 북경국제도서전에서 『비즈니스』를 홍보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비롯, 대대적인 전략을 계획 중이다.

줄거리

이 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서해안에 위치한 ‘ㅁ시’이다. 중국과의 교역을 지향하며 전개된 서해안 개발사업의 붐을 타고 ‘비즈니스맨’을 자처하는 ㅁ시의 시장은 드넓은 개펄에 방조제를 건설하여 인공 담수호를 만들고, 새로운 공업단지와 초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 신시가지를 건설하고, 구시가지에는 쓰레기 매립장과 소각시설을 들여놓으면서 그곳을 ‘짐승의 마을’로 전락시켰다. 새로 건설된 ‘신세기대교’를 사이에 두고, ㅁ시에는 외형과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나’는 남편과 함께 ㅁ시로 내려오면서 신시가지로 가지 못하고 구시가지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나’는 아들의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게 되고 그 과정에는 주리라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대학 시절부터 철저하게 사랑을 배재한 비즈니스로서 남자를 만났다. 또래의 대학생 남자친구가 아니라 돈 많은 유부남, 잘나가는 사업가 등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은 그녀의 ‘스폰서’를 자처하는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들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주리의 설득과 그녀의 행동방식을 모방함으로써 몸 파는 일을 어렵게 시작하지만, 그 일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부터는 자신의 일을 비즈니스로 여기며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게 된다. 이렇게 몸을 팔게 된 ‘나’와 주리의 고객으로 ‘타잔’이란 남자가 등장한다. ‘타잔’은 구시가지의 몰락과 함께 횟집을 잃어버리고 자신도 몰락해가는 인물이다.
‘나’는 쓰레기장에서 오염되어 비슬거리는 게 한 마리를 보고도 눈물을 흘리는 ‘그’의 착한 심성에 감동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인간적 면들을 발견하면서 진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해나간다. 이 과정에는 ‘그’의 아들 ‘여름’이 있다. ‘여름’은 선천적 자폐아로 엄마가 죽은 뒤 그 증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여름’을 보고 ‘나’는 아픔과 동시에 깊은 모성애를 느끼게 된다. ‘여름’이도 차츰 ‘나’에 대해 마음을 열고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그러던 중 ‘그’가 시장을 납치한 사건으로 인해 ‘그’와 ‘나’의 행적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나’는 결국 가족을 떠나게 되고, 그는 작은 배를 타고 ㅁ시를 탈출한다. ‘나’는 음식점에서 잡일을 하며 지하 단칸방에 여름이를 데려와 새로운 삶을 일구어간다. 남편과 아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간절한 그리움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서울에서 이른 바 ‘강남(江南)’과 ‘강북(江北)’의 경제 문화적 편차는 이미 정상 수준을 벗어나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달려온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가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던가. 어떤 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됐으면서 예전보다 오히려 훨씬 더 가난해졌다고 느낀다. 서울만 그런 게 아니다. 보편적인 현상이다. 전국 어느 도시를 가든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양지와 음지처럼 선연히 분리, 계급화된다. 사람들은 그래서 오늘도 ‘신시가지’만을 향해 기능적으로 뚫린 대로를 불철주야 달려간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고 꿈이며 이상이다.
(……)
사실, 이런 식의 현실 비판적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 ‘문학판’에서도 거의 실종 상태에 놓여 있다. 현재진행형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삶의 사회구조적 문제들을 ‘문학판’에서 오히려 유기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래도 좋은가. 우리네 삶을 몰강스럽게 옥죄는 전 세계적 ‘자본의 폭력성’에 대해, 문학은 여전히, 그리고 끈질기게 발언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지난봄 나는 ‘갈망의 삼부작’으로 명명한 마지막 작품 『은교』를 펴낸 바 있다. 최근작 『촐라체』, 『고산자』, 『은교』에서는 삶의 본원이라 할 존재론적 슬픔이 우선적으로 고려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어스레한 골방에서 존재론적 슬픔과 만나고 있을 때에도 우리를 둘러싼 반인간적 세계 구조는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었다. 피 튀기는 ‘저잣거리’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내가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반응은 중국에서 먼저 왔고, 또 뜨거웠다. 10월엔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소설계』 편집자는 뜨겁게 손을 잡아주었다. 마치 동지처럼.
(……)
연재 지면을 마련하고 동시에 출판까지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와 중국문학이 육친의 마음으로 직접 스킨십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자음과모음』, 중국 『소설계』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것이 어쩌다 한 번 스쳐 지나는 사례가 되지 않기를 진실로 바라면서.

추천사_ 장윈, 황광수

박범신 작가는 『비즈니스』에서 도시의 가장 밑바닥에 사는 하층민들의 장렬하고 비장한 ‘오디세이아’를 그렸다. 박범신 작가의 진실함과 용기, 예리함과 강인함, 책임감과 번민, 온유함과 양심을 향해, 그리고 인성이 사라지고 물질이 지배하는 이 시대를 향해,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그의 애정과 존중심을 향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 장윈 (소설가)

‘갈망의 삼부작’을 통해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근원적 욕망을 탐색한 박범신은 어느덧 자본주의 사회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일구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비즈니스』는 독자들에게 뜻깊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 황광수 (문학평론가)

[책속으로] 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일찍이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라고 말했다. 그 잠언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진예술의 조류를 설명하던 노교수가, 현대에 들어와서 사진예술은 완전히 자본의 감옥에 들어가고 남은 것은 사진을 빙자한 산업뿐이라고 설파하면서 인용했던 잠언이었다. 자본의 감옥에 들어간 것이 어디 사진예술뿐이겠는가. 정치가 들어가고 문화가 들어가고 사람들의 꿈과 이상도 다 그곳에 들어갔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그녀도 일찍부터 그 감옥에 들어갔으며, 나 또한 이제 그 감옥에 수감되었다.
(p. 70)

전사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전선은 이미 침대 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오욕이 가득한 화류항(花柳巷)으로 나가는 어미들이 있는 유례없는 나라가 내 조국이고, 그 어미의 채찍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세습되는 ‘귀족’들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오진 약육강식의 정글 속을 헤쳐 나가는 전사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나라가 내 조국이었다.
(p. 136 ~ p. 137)

목차

오래된 도시
비즈니스우먼
비즈니스맨
이팝나무
무국적자들
대파와 쪽파
떠난 자 남는 자
바다가 돌아눕는 소리

작가의 말

본문중에서

이 나라는 학연과 지연으로 맺어져 굴러가는 나라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의 인생은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서 그 행방이 뒤바뀌었고, 여자의 인생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 하는 데 따라 그 성패가 결판나는 세상이었다. 옛날에 비해 세계는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차라리 독재의 그늘에 덮여 있던 시대가 나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이제 세상의 주인은 ‘자본’이었고, 삶의 유일한 전략은 ‘비즈니스’였다.
사랑과 결혼조차 일종의 ‘비즈니스’에 불과했다.
자본의 압제는 그 경계마저 불분명하니, 화염병을 들고 나간다고 해도 던질 데가 없었다. 간교하고도 잔인한 독재자인 자본의 품 안에서 사람들은 단지 실패한 자와 성공한 자, 두 종류만으로 구별됐다. 교육도 일종의 ‘비즈니스’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사실이었다. 백그라운드가 없는바, 정우를 성공시키려면 학연으로 맺어질 인맥도 미리 고려해야 했다. 실패한 자들이나 남아 있는 구시가지에서 학교를 다닌다면 무엇보다 성공한 집안의 아이들을 친구 삼을 기회가 전혀 없을 게 뻔했다. 가짜로 주민등록을 옮기면서까지 정우를 신시가지 중심가의 학교로 보낸 것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그 때문이었다. “당신, 잔 다르크 같아.” 남편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조소를 한다고 느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조소는 실패한 자들이 둘러쓴 비열한 자기방어 수단이었다. 비록 실패해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해도, 아이 하나 있는 것을 남편이나 나처럼 살게 할 수는 없었다.
(p. 53 ~ p. 54)

사진기자가 된 것도 사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류사회의 남자들을 더 만나기 위해서였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아무리 가난한 남자라도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나와 달리, 그녀는 대학 시절부터 이미 ‘사랑’조차 자본주의의 요람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본의 세계에선 당연히 사랑도 자본재(資本財)였다. 남자들을 통해 삶을 수직 이동 시키고자 했던 그녀의 전략은 주도면밀했고 끈질겼으며, 마침내 성공했다. 시댁에서 생일 선물로 BMW 5 시리즈를 사줬을 정도였다. 시댁에서는 사진작가로 행세해서 친정의 불민함을 커버했다. 사진전도 가끔 열었고 엉터리 공모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돈 많은 속물 꼴통들한테 멸시당하지 않으려면 내 입장에서 문화예술밖에 없거든.” 그녀가 말하는 ‘속물 꼴통’들은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p. 59)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이란 누구나 볼 수 있는 데 걸어놓는 문패 같은 거야. 문패는, 지금 걸던 대로 걸어. 그 대신 남몰래 돈 벌어 정우 뒷바라지라도 잘해. 요즘 애들이 진짜 싫어하고 혐오하는 부모는 실패한 부모야. 아이 뒷바라지 못해주는 부모 말야. 나중에 정우가 좋은 대학도 못 가고,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무엇을 주었느냐고 너한테 물으면 뭐라고 할래? 과외조차 안 시키고 외국어고 갈 것 같아? 어림없어 얘. 신시가지 아파트 사는 애들은 주말이면 서울에 있는 영어 학교까지 엄마들이 실어 나르고 있어. 넌 정숙한 좋은 어머니상(像)이니, 그걸 계속 네 문패로 사용해. 그 대신 눈 질끈 감고 다른 각도로 세상을 봐. 처음만 지나면 모든 게 쉬워져. 정우를 네 신랑처럼 살게 하지 않으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니. 자식을 두곤 결과적으론 남는 장사를 해야 한다 그거야. 안 그러면 너, 정우한테 나중에 원망받아!” (p. 62 ~ p. 63)

정우를 원하여 마지않던 좋은 학원에 보냈으며, 투자한 보람이 있어 성적은 금방 올랐다. 뿌듯하고 행복했다. 이대로 가면 외국어고등학교를 쉽게 보낼 터이고, 외국어고등학교만 가면 서울대학교도 쉽게 입학할 수 있을 터였다. 대학이 평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세상이었다. 작은 수고로 정우의 ‘성공’을 보장받는다면 윤리적으로도 꼭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생각할 때도 있었다. 오늘날의 윤리란 효용성의 보장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고객’들을 상대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이 도시에 몸을 팔아 자식의 과외비를 대는 게 나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어머니도 ‘매춘’에 뛰어든 걸 보았다는 ‘고객’이 있었다.
(p. 65)

저자소개

박범신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1946

저자 박범신은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여름의 잔해〉 당선으로 데뷔했다. 초기에는 주로 소외계층을 다룬 강렬한 사회 비판적 중ㆍ단편소설들이 담긴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덫〉〉을 펴냈고, 이어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 중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1993년 작가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돌연 절필을 선언, 히말라야로 떠나기도 했다. 1996년 인간영혼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한 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로 다시 문단에 돌아와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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