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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동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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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절대음감’이라는 것이 있다. 음(音)과 음(音) 사이를 별다른 식별 없이 알아내는 능력을 일컫는다. 혹자는 ‘재능’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노력’이라고 하는 이 능력으로 음(音)의 비밀을 찾아내어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을 우리는 ‘음악가’라 부른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교육자로, 평론가로,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그러나 시인이다. 그렇기에 그는 보통과는 다른 ‘전력의 감각’으로, 생의 비밀을 응시하고, 여기 있으나 모르고 있는 ‘진실의 진심’을 밝혀낸다. 모든 감각으로 적어 내려간 이것이 ‘시’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시인의 조건을 혹시 ‘절대감각’이라 이를 수 있다면, 시인 박주택은 탁월한 ‘절대감각’의 시인이다.

    박주택의 신작 시집 [시간의 동공]은, 그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시감각’(視感覺)에서 출발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집 곳곳에 ‘눈[目]’이 나오고, 이 ‘눈들’ 은 모든 방향을 바라본다. 이 ‘바라봄’에 시인은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 시인 박주택의 눈은 듣고, 맡고, 맛보고, 매만지며 이따금 시간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꿈을 꾸기도 한다. 시각이 ‘시간의 전(全) 감각’이 되는 일, 박주택의 새 시집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 본다
    자정 지나 인적 뜸할 때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형
    한때는 옷을 걸치고 있기도 했으리라 [폐점] 부분

    시집의 첫 시 [폐점]에서 시인은 “문 닫은 지 오”래인 상점을 바라본다. 어둠과 마네킹이 망가져 있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순간, “불현듯 귀기(鬼氣)가 서려오고/등에 서늘함이 밀려오”([폐점])자 시인의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억으로부터 시간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곳을 처음 열 때의 여자를 기억한다
    창을 닦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옷을 걸개에 거느라 허리춤이 드러나 있었다
    아이도 있었고 커피 잔도 있었다 [폐점] 부분

    여기서 시간은 순식간에 진공 상태로 돌입하였다가 재조립되어 다시 흐른다. 앞 부분과 달리 이곳에는 ‘물을 뿌리는 여주인’과 ‘멀쩡한 마네킹’과 ‘아이’와 ‘커피 잔’이 있다. 눈부신 일상의 오전이 그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앞’과 ‘뒤’는 같은 공간이다. 단지, 그곳에 시간의 흐름이 놓여 있을 뿐. 시간의 앞뒤 관계는 필요 없다. 뒤가 앞을 낳고, 앞이 뒤를 앞지르는 순간 한 편의 시가 탄생한다. ‘기억해내기’를 넘어 과거의 것을 제자리에 가져다놓기. 이를 통해 독자들은 하나하나를 볼 뿐 아니라, ‘지금’은 없는 온기를, 소리를, 촉감을 느낀다.
    동시에 이는 “선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같은 시의 마지막에 “어느 먼 기억들이 사는 집이 그럴 것이”며 “어느 일생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이 ‘그럴 것’이라는 미래 체험에 대한 진술은 행간의 과감함을 넘어서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시간의 모든 결이 이처럼 뒤섞여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박주택의 시들은 시간마저 물화(物化)하며 생을 관찰한다. 시간 속에 들어 있을 때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을 ‘바깥’에선 ‘볼’ 수 있다. 이 ‘횡’적인 몽환적 구조를 기반으로, 눈이 내리는 거리에서 일생의 수치를 고백하거나 ([저녁 눈]) 부모님과 함께 왕릉에 가서 과거의 부모님을 조우하는([헌인릉에 가서]) 등의 시들이 쓰인다.
    이러한 박주택의 시적 행보는 지난 시집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의 시간과의 대결과 화해라는 주제로부터의 진일보라고 할 수 있다. 그 변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공간에 대한 ‘종’적 움직임이다.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시간의 동공] 부분

    만리포 바다 앞에서 시인은 꿈을 보고 있다. “꽃들이 혁대”를 내질러 “바람의 등을 후”려치고 파도의 흰 거품이 한 마리 말이 되어 내달리는 꿈. 그 위에는 별이 떠 있고 새들은 날개를 쉰다. 마치 샤갈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이 시에서 우리는 꿈/현실―현실/꿈의 경계를 한눈에 집어넣으며 그 환상적 달아오름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몽환의 시간의 교차에서 오는 어지러움과는 다르다. 착시는 더더욱 아니다. 이 ‘환상적 현상’은 공간 특유의 단단함을 내포한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만리포 앞 바다에서 달려오는 흰말과 그 말발굽 소리를 ‘볼’ 수 있다. ‘시간의 동공’을 통하여, 몽환적 시간 위에 쌓여 올라가는 환상적 현상. 박주택의 시집 [시간의 동공]의 종적 운동은 이렇게 완성된다.
    이러한 종횡의 운동을 통해 박주택은, 삶을 정화해나간다. 부당함을 폭로하고 잘못된 생애를 고백하면서 불안을 불안으로 불행을 불행으로 끌어안고 모든 것으로부터 깨끗해진다. 이는 화해가 아니다. 화해는 서로 다른 것들의 존거함을 그 전제로 한다. 이와 같이 박주택은 하나의 생을 오롯하게 하나로, 더 나은 하나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시집의 핵심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정과리(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박주택 시의 아름다움이 이 정화의 광경에 있음에 주목한다. 해설에 따르면, 이 시집은 “ ‘불행’의 계약에 수결한 ‘불행한 자(시인)’ ”의 것이며, 이 ‘불행한 자(시인)’는 약속된 ‘불행’ 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그 뛰어듬, 즉 “ ‘불행’을 노래”하고 ‘불행’을 말하는 것은 “ ‘불행’을 이겨내기 위해서이지 즐기기 위함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시집 안에선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움직임을 따라 생의 이면을 바라보는 시의 동공(시인의 동공)은 사실 “공동(空洞)”임을 지적하면서, 이 비어 있음은 “맹목적 다수성의 존재들이 실은 스스로 눈빛을 빛내는 존재들”임을, 그 존재들이 구성하는 이 세계가 폐허의 삶으로부터 구제한 것임을 깨닫는 자리임을 밝힌다.

    박주택은 시를 온몸으로 받아내 적는 시인이다. 시를 쓰기 위한 감각은 그런 것이다. 숨조차 쉬기 어려운, 수치로 점철된 생을 고백하는 일. 그리고 그 고백 위에 탈 시공간의 아름다움을 세우는 일. 시인은 말한다. 시인이란 “순백한 영혼을 닦으며 추격해오는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그것을 옮겨 적는” 자. 그렇다면, 시란 “순백한 영혼을 닦으며 추격해오는 고통”과 진배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은 단 하나의 희망으로 견딜 수 있다. 그 희망을 무어라 부르겠는가. 참된 생은 가지 않은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다. 이곳의 의미를 분해 재조립하며 읽어낼 때 우리의 삶에 가치가 부여된다. 이것이 박주택이 이번 시집을 통해 보려주려는 단 하나이자 전부이다.

    목차

    제1부
    폐점
    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저수지에 비친 시
    자작나무 숲은 여기서 멀고
    물방울들의 후예
    강남역
    그때 우리는 네거리에 있었다
    배경들
    시간의 동공
    여름 말 사전
    촉(觸)
    가을 말 사전
    건물들
    붉은 책
    그러므로 바람의 수기를 짓는다
    여름들
    사형수들의 공작품

    제2부
    이별가 1
    헌인릉 가서
    문양
    허공
    독신자들
    명태
    배들의 정원
    저녁 눈
    봉선사
    강남역 사거리
    감옥의 왕국
    영산홍
    망각을 위한 물의 헌사
    이별가 2
    염천, 시베리아, 유형
    문틈에 바침
    자정에 내리는 눈

    제3부
    이별의 역사
    깊은 곳, 깊은 눈
    점자
    묘지
    저토록 저무는 풍경
    주름의 수기
    그림자
    그림자들의 도시
    강과 나무
    대전 교도소
    새로 시작하는 밤
    소년이었을 때
    목련
    머나먼 나라
    유전하는 밤
    혼혈의 성좌 아래
    어둠 속에서

    제4부
    여기 먼 곳의 벌판에서
    추억
    바람의 맹지
    하루에게
    먼 밤의 저편
    고양이
    검은 피부
    가을 기도문
    작은 배
    살아 있는 웅덩이
    깊은 강
    그늘이 질 때
    수염

    기억제
    저 석양
    먼 곳의 들판에서
    저녁의 음악회

    해설,눈동자의 모험·정과리

    본문중에서

    이 거리, 노래가 되다만 빛들이
    갈 곳을 잠시 잃어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과 섞인다
    천천히 길들 나무들의 눈빛에 힘입어 길게 뻗어 있음을
    자랑한다, 길을 노래하는 자 불행했다
    기적을 기대하는 자 나무 그늘 아래 잎사귀에 덮이고
    무엇이 되고 싶었던 자 모자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자신의 차례에도 입을 다문다, 저녁 눈 내리고
    함부로 어깨를 부딪는 저녁 눈 내리고 이제 더 없이
    자신을 불러줄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어느덧 이것이 생의 하루가 아니라
    생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길은 구부러진다, 이제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는 것은
    길이 시작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시 돌아가는 그 길로 걸어갈수록
    자신이 가야 할 곳과 가까워졌음도 깨닫는다
    저녁의 함박눈 내리고 헤매임 가운데 만난
    빛 하나 호흡을 불어 만든 눈빛을
    물 위에 풀어 놓는다
    (/ 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황혼이 붉게 벽을 물들일 즈음
    바람은 열쇠가 채워져 있는 저녁의 문 앞에 서서
    잠시 침묵에 섞인다 어렴풋이 평온의 편지인 벽은
    글자들을 떨어뜨리고

    봄은 어금니를 느리게 움직여
    잎사귀를 갉는다 사람들 사이로 글자들이 떠다닌다
    그러나 바람 때문에 그 글씨는 크게 일그러졌다

    공기가 금빛 즙을 흘리는 저녁을 보라,

    이따금 사람의 그림자들 사이로 거품이 일고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에 서로의 말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턱도 있다

    그리하여 바람 부는 날이면
    말들은 그림자의 심장을 향해 따뜻한 손을
    집어넣고 고여 있는 구름들은 황혼에서 피워
    올린 사람을 향해 뻗는다 적막에
    황혼의 그림자들 서로에게 섞이며 침묵의 편지를 읽는다
    (/그림자, 본문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59
    출생지 충남 서산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시인 박주택은 195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이동건축]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꿈의 이동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사막의 별 아래에서]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시간의 동공], 시선집 [감촉], 시론집 [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서의 복원], 평론집 [반성과 성찰] [붉은 시간의 영혼] [현대시의 사유 구조] 등을 펴냈다. 편운문학상 평론부문(2000), 경희문학상(2004), 현대시 작품상(2004), 소월시문학상(2005), 이형기 문학상(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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