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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세상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강문숙 시인의 긍정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강문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따뜻한 종이컵』. 10년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투병중인 시인은 따스한 삶의 풍경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답고 소박한 시들을 펼쳐낸다. 특히 그녀의 시들은 긍정 혹은 살아 있음의 기쁨을 절제되고 긴장된 균형감각을 통해 드러낸다. 또한 삶의 기쁨을 가볍거나 감상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삶에 대한 조화롭고 긍정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재치 있고 발랄한 시어로 일상의 삶을 표현해 온 여성시인 강문숙(55) 씨가 신작 시집 『따뜻한 종이컵』을 냈다. 시인은 10년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삶의 외진 모서리까지 끌어안을 만큼 부드럽고 따스하다.
199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강문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따뜻한 종이컵』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시각과 삶에 대한 긍정 혹은 살아 있음의 기쁨이다. 그의 따뜻한 시각은 절제되고 긴장된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삶의 기쁨 역시 가볍거나 감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삶에 대한 조화롭고 긍정적인 시각의 요소들은 ‘따뜻한’, ‘뜨거운’, ‘둥근’이란 형용사와 ‘햇빛’, ‘아침’ 등의 명사들, 「따뜻한 종이컵」, 「뜨거운 길을 걷다」, 「따뜻한 것」, 「성聖?아침」, 「4월 아침」 등의 시 제목들이 환기시키는 이미지들로 형성된다. 시인의 사물에 대한 날카롭고 차가운 반응보다, 대상을 부드럽고 넉넉한 시각으로 감싸안는 듯한 이런 표현들 중에서 삶의 일상을 평화롭게 바라보고 아침과 함께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시인의 마음이 엿보인다.
5년 전에 발간된, 강문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탁자 위의 사막』(2004)과 이번 시집이 다른 것은 전자의 시집에서는 ‘따뜻한’과 ‘뜨거운’이란 형용사가 거의 보이지 않고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와 함께 「혼자 가는 길」의 외로움과 「사월, 느티나무」에서 ‘죽음도 그리워지는 사월, 오후’처럼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오후의 시간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더운 여름날 오후’(「여름 홍시」), ‘여름 오후’(「붕붕 뛰어오르다」), ‘가벼운 걸음걸이를 흉내내 보는, 오후’(「외출」), ‘잠시 비, 그친 오후’(「가시」), ‘오후 3시, 병원 테니스 코트’(「휴식」), ‘석양’(「여름 일몰日沒」), ‘그림자조차 드러눕지 못하는 가파른 오후’(「분지」), ‘겨울 저녁의 스산함’(「결단교」) 등, 오후와 저녁의 시간은 시의 시간적 배경을 이루면서 시인의 시적 상상력을 작동시키고 있다.

1. 투병 속에서 피워 올린 따스한 삶의 풍경

너무 쉽게 죽음을 노래하는 이여,
죽음이 따뜻하다, 관념의 젓가락으로
뒤적이는 일은 삼가해주시기를.
둥근 무덤이 아무리 따뜻해 보인다고 한들
그 속으로 쉬이 들어가 눕고 싶은 이, 어디 있으리.

이 세상에 따뜻한 죽음이란 그리 흔치 않다.
뜨거운 길을 걸어온 맨발에게는
부풀어오른 물집처럼 성가신 기억.
진실로 따뜻함이란,
너와 내가 살 비비며 살아가는 일이다.
--「따뜻한 것」 끝부분

이 시의 인용되지 않은 앞부분에서 시인은 “죽음이 따뜻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감동을 읽는다”는 어느 시집의 해설 한 구절이 얼마나 허위에 가까운 것인지를 말한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는 죽음의 절실한 체험이 없으면서도 죽음을 멋진 수사적 표현 속에 과장되게 말하는 시인도 많고, 그런 시인의 시를 무책임하게 옹호하는 글을 쓴 비평가도 많다. 그러나 ‘너무 쉽게 죽음을 노래하는’ 것은 체험의 진실성이 결여된 관념적 사고의 결과이거나 감상의 과잉일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시인은 “둥근 무덤이 아무리 따뜻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따뜻한 죽음’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이며, 진실로 따뜻한 것은 “너와 내가 살 비비며 살아가는 일”임을 강조한다. 이 부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삶의 따뜻함이란 결국 ‘나’와 ‘너’의 나눔과 부딪침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적인 따뜻함을 의미하는 점이다.
고통 속에 시인의 상상력은 소멸의 미세한 기미들을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보면서 그것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꿔놓는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으로까지 나아간다. “나의 병은 깊고 깊어, 치유 불가능 / 어떤 진료 과목에도 없는 희귀병이다”(「노래하는 여자」), “사막에서도 잘 살아 남는다고 / 끈질기게 살아 있으라고, / 수술 끝난 어느 날 한 식구 된 선인장”(「선인장」), 등의 구절에서 확인되는 치유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시인은 “아직도 병이 / 지배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게 / 눈물겹도록 기쁘다”(「나는 리모컨을 잘 쓰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표명하기도 한다. 또한 “나는 지금 병甁과 놀고 있는 것일까, 병病과 놀고 있는 것일까”(「병과 놀다」)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병을 치유하기 위해 먹어야 할 무수한 알약의 약병들을 견딜 수 없어 하기보다 함께 놀 수 있는 친구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탁자 위의 사막』에서 느껴지는 외롭고 암담한 일상과 무미건조한 오후의 시간을 힘겹게 통과하면서, 혹은 투병과 절망의 시간을 극복하면서 시인은 비로소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감동을 느끼고, 사물에 대한 깊고 따뜻한 시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파고들면서 죽음까지도 가깝게 받아들이는 관조의 세계에 이른다.
시집 『따뜻한 종이컵』에서 제일 먼저 주목되는 시는 「우울한, 꼭 그렇지만도 않은」이다. 이 시는, 수술을 마치고 이십여 일 식이요법 끝에 화자가 처음으로 밥상 앞에서 숟가락을 들다가 떨어뜨렸을 때 듣게 된 아버지의 말씀을 아주 인상적으로 적어놓고 있다.

숟가락은 생의 바다를 저어 가는 놋대인 거라
놓쳤더라도 겸손하게 다시 잡아야 되는 거라

사는 게 가장 진실한 것임을 목메이게 하는 아침.
누가 이런 날 있을 줄 알았을까
우울한,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은.
--「우울한, 꼭 그렇지만도 않은」 끝부분


2. 겨울나무처럼 아름답고 소박한 시편

둥근 저녁이 왔다.
길이 지워지고, 앙상한 겨울나무들
잔가지 활짝 펼치고 시린 하늘 버팅기다가
스며드는 어둠 온몸으로 껴안는다.

[…]

나무들마저 지워진 유리창 밖
허공에 동그란 불빛 걸릴 때,
안 보이는 눈빛 하나, 따스하게
내 안에 떠 있다.
--「둥근 날의 기억」 일부

겨울 짧은 해 성급하기도 하여라
산새 꽁지 따라온 노을은 따스하여라
--「안부」 일부

「둥근 날의 기억」에서 시인은 어둠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 ‘앙상한 겨울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나무들이 어두운 허공 속에서 지워지는 모양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어둠’을 ‘온몸으로 껴안는’ 느낌의 풍경화를 그린다. 또한 어두운 유리창 밖의 ‘동그란 불빛’을 바라보면서는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의 눈빛을 떠올리고, 그 여운을 길게 이끌어간다. 겨울날의 노을빛을 따뜻하게 표현하는 「안부」에서도 시인의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겨울날 저녁의 차갑고 쓸쓸한 풍경을 둥글고 따뜻한 풍경으로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에서는 깊은 체험이 축적된 연륜의 힘이 느껴진다. 이러한 풍경의 표현이 앞의 시집과 다르게 보이는 것은 결국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고 삶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은 사람만이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침의 풍경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아침은 성聖스러운 깨달음을 갖게 하거나, 생명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게 하고, 생활의 소음과 분주함이 정겹게 느껴지게 하는 시간으로 표현된다.

[…]
잎 틔우고 꽃 피었다가 조롱조롱
솔방울도 달았건만, 진실로 내가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건
맨살 위에 떨어지는 햇살이다.
백자와 상아도 있어 번드르르한
거실이 아니라 이름 없는 야산이다.
[…]
한 백 리 밖까지 향기가 번지는
진짜 송이 하나 키우는 일이다.
종내 촉촉하고 향긋한 톱밥 한 입 물고
뜨거운 목수 손에 거두어지는 일이다.
--「분재」 일부

‘나무의 꿈’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이 시에서 화자는 ‘분재’의 시각으로 자신의 꿈을 노래한다. 그가 꿈꾸고 그리워하는 것은 이름 없는 야산에서 자라고 햇살을 온몸에 받을 수 있는 곳, 근처에는 ‘쇠똥 무더기’ 위에 피어오르는 민들레가 있고, 개똥지빠귀가 날아와 앉고 청설모가 자유롭게 지나다니는 곳이다. 그곳에서 살다가 향기로운 ‘송이’ 하나 키우고, ‘목수 손에 거두어’져서 목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나무의 꿈’을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간절한 희망을 노래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있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꿈꾸는 시인의 언어는 헐벗은 겨울나무처럼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 많은 상처와 고통을 치열한 의지와 따뜻한 희망으로 극복한 시인의 내면적 토양에서는 이제 품위 있고 건강한 언어의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1
망개 열매 /성聖·아침 /자루 속에서 /4월 아침 /곡우 무렵 /풀잎 /말하려다 말았다 /장마, 질긴 문장들 /겨울 주산지 /소래포구 /동점역에서- 눈꽃열차/환절기 /둥근 날의 기억 /안부

2
쇠똥구리 /세금 내는 나무 /왜가리, 외다리로 서다 /그 집을 엿보다 /분재 /따뜻한 종이컵 /고등어를 추모함 /까치둥지 /매듭, 혹은 낮달 /소포들 /그 길 /부재 중 /뜨거운 길을 걷다

3
청동우물 /엄마를 쪼개니 /그녀, 그녀들 /광장의 무늬들 /웅크린 여자 /목련 할매 /뻐꾸기 /영산홍 /할머니 생각 /꽃병 /우리 동네 송림서점 아가씨 /손을 씻다 /길모퉁이 사진관 /꽃밭에서

4
우울한, 꼭 그렇지만도 않은 /손등 /거대한 병동 /지하 주차장에서 /몸에게 /그들이 있었기에 /혼자 먹는 밥 /이팝나무 아래로 /따뜻한 것 /안과 밖 /요즘 어떠냐구요? /모서리에 대하여 1- 책상 /모서리에 대하여 2- 쌀통 /모서리에 대하여 3- 방사선 전신촬영

해설 | 오생근
따뜻한 아침과 삶의 경이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