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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대방록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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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황종희
  • 출판사 : 한길사
  • 발행 : 2000년 03월 20일
  • 쪽수 : 326
  • ISBN : 978893565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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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새 시대를 갈망하는 『명이대방록』의 사상사적 의의

    1. 명말청초 격변기의 사회 상황과 신사조의 형성
    명말청초의 사회는 정치 경제적인 격변기였다. 안으로는 이자성(李自成)과 장헌충(張獻忠)의 농민봉기로 혼란스러웠고, 밖으로는 강성해진 만주족이 명조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조정 내부에서는 동림파(東林派) 대 비동림파의 대립이 극심하였는데, 이 당쟁은 위충현(魏忠賢)을 중심으로 한 환관들의 동림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정치·행정의 중심인 북경을 비롯한 행정 중심지역에서는 내분과 전쟁이 끊이지 않은 반면, 강소·절강 등 강남지역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중대형 도시가 형성되어 번창하고 있었다.
    명말청초의 대표적인 상업도시는 광동성의 광주(廣州), 호북성의 한구(漢口), 절강성의 항주(杭州), 강소성의 소주(蘇州)와 남경(南京)을 들 수 있다. 이 도시들은 중국내에서 이미 15세기초부터 30개 남짓한 비교적 큰 상업도시로 번성하고 있었다.
    도시의 발달은 수륙·해상교통의 요지인 양자강 중하류 지역에 집중되었는데, 이것은 '지소인다'(地小人多) 현상과 맞물려 있었다. 비록 중국의 땅이 넓어도 살 곳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형성과 번창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의 발달은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는 새로운 사회단계로 나갈 수 있었다.
    또한 제한된 관료사회로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일부 사대부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가 조성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기존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의식(四民意識)의 일대 전환이라는 차원에서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자본주의 맹아 발현'의 시기는 아울러 인식세계의 전환도 가져왔다. 이른바 근대적 의미의 사유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근대 지향적 사유체계란 합리주의 정신과 자본주의 정신에 입각한 ① 인식 주체로서의 개인의 자아에 대한 각성 ② 사회적 불평등 구조의 해소 ③ 사적 소유의 자유와 이윤 추구의 확대 등을 의미한다.
    이런 생각에는 몇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중국사회 '정체성론'에 대한 반성 및 전통과 근대화의 관계에 대한 검토가 그것이다.
    먼저 중국사회 정체성론에 대한 문제로, 이는 이미 수십년 간 많은 연구자들이 다루어왔던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서양중심적인 사고에 대한 반성으로 연결되면서 중국사회 나름대로의 발전 모델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전통사상과 근대화에 관한 문제인데, 막스 베버는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정치형태를 합법적인 것, 전통적인 것 등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합법적인 것은 근대 민주주의 사상을, 전통적인 것은 봉건체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합법적인 근대사상과 전통사상은 대립적일 수밖에 없으며, 전통적인 것에 대한 비판 극복이 곧, 근대화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물론 전통적인 것이라고 모두 전근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전통에 대한 비판·수정이 근대화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다만 중국사회의 경우 전통사상에 대한 반성과 수정의 요구가 외부(外因論)에 있었는가 아니면 내부에 있었는가(內因論)가 문제의 핵심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사회 근대화는 외부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부적 요인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 이 점에서 중국사회 근대화의 내적 요인으로서 명말청초의 사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황종희·당견(唐甄, 1630∼1704)을 중심으로 한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전제주의는 이른바 민주사회로 나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중국사회는 역사적으로 근대화 이전 단계까지 전제주의가 지속되었는데,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은 발전적인 측면에서 민주사회로의 길을 여는 역할을 담당했다. 반전제주의에 대한 논의는 결국 사회발전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명말 양명좌파에서 비롯된 개인의 자아각성을 꼽을 수 있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개인의 자아는 공동체(국가나 사회)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우선하는 사유체계였다. 그러나 근대화의 척도는 주체적 사유에 의한 개인의 욕망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용납되는가이다. 이것은 명말청초 양명학의 주자학적 사유체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제시되었으며,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에서 이 문제 더욱 분명해졌다.
    명말청초의 사회상황과 사상은 근대화의 전단계라는 차원에서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살아난다. 청조의 강력한 전제주의가 정치적 억압을 지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적 기반이었던 주자학적 엄격주의는 각성된 개인과 사회의 비판적 상황에 부응하지 못하고 지식인들에게 설득력을 잃어갔다.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 책이 바로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이다. 다시 말해 황종희는 정치·경제적 격변기를 살면서 그 사상의 실마리를 잡아갔고, 그것을 그의 저술을 통해 담아냈던 것이다. 그는 농민군과 청조의 명조 위협을 목도하고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을 구상하였고, 경제적인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존의 사농공상에 대한 차별의식을 비판적 안목에서 바라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명이대방록』을 통해 새 시대를 갈망하는 황종희의 정치·경제에 대한 구체적 정책대안과 철학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3. 『명이대방록』의 구성과 판본
    『명이대방록』은 1662년(청 康熙元年)부터 쓰기 시작하여 1663년에 완성되었다. 황종희가 그렇게도 애타게 갈구하던 명조 회복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시기에 완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명조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정치의 대법(大法)'을 말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다분히 현실 정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과격하다. 그런 연유로 건륭년간(乾隆, 1736∼95) 금서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간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것으로 보아 그 내용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13목(目) 2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정치·경제 등 사회 개혁사상을 담고 있다.
    『명이대방록』은 현존하는 초본(초[베낌]本)·각인본(刻印本) 등 모두 20여 종이 있다. 청조 건륭년간의 절강 여요현 이주문헌관(梨洲文獻館)에 보관된 자계(慈溪) 정씨(鄭氏)의 이로각(二老閣) 초각본(初刻本), 도광(道光, 1821∼50)년간에 전희조(錢熙祚)가 판각한 지해본(指海本), 광서(光緖, 1875∼1908) 31년(1905)의 항주군학사(杭州群學社)에서 장린진(蔣麟振)이 편찬한 『황이주유서십종』(黃梨洲遺書十種) 석인본(石印本), 1915년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설봉창(薛鳳昌)이 편찬한 『이주유저휘간』(梨洲遺著彙刊) 배인본(排印本), 1935년 상해 대동서국(上海大東書局)의 영인본, 1935∼37년 상해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의 『총서집성초편』(叢書集成初編) 배인본, 『사부비요』(四部備要) 배인·축인본(縮印本), 1955년 북경고적출판사(北京古籍出版社) 배인본이 있다.
    본 역서는 이 가운데 절강 여요현 이주문헌관에 보관된 이로각 초각본을 저본으로 1985년 출판한 『황종희전집』 제1책(浙江古籍出版社)을 참고하였고, 『연보』는 1915년 중화서국의 『이주유저휘간』을 저본으로 하였다.

    4. 신시대 대망론 『명이대방록』의 사상사적 의의

    1) '명이'의 의미와 신시대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의 '명이'(明夷)는 『주역』 64괘의 하나다. 이 괘는 곤(坤)상 이(離)하로 그 내용은 "밝은 태양이 땅속에 빠져 들어간 상태"이며, 또한 "밝고 지혜로운 사람이 상처를 입고 때를 기다리는 형국으로 암흑시대를 가리킨다." 아래 이(離)괘의 초구(初九)는 "지혜롭고 양심적인 사람이지만 상층부의 음흉함이 모든 것을 좌우하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다." 따라서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육이(六二)는 "밝음이 상처받는 상황에서 왼쪽다리를 다치는 형국이니 이를 벗어나는 데 타고 갈 말이 건장하면 길하다"는 내용이다. 구삼(九三)은 "……서둘러서는 안 되고, 참고 견디며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독재로 인해 밝은 지혜가 상처받고 양심들이 핍박받는 암흑시대에 지성과 양심이 혼자서 저항하면 탄압을 받으므로 은밀히 동지를 규합하여 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내용이다.
    위 곤(坤)괘의 육사(六四)는 "독재의 결과는 파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를 떠나야 할 입장이다." 육오(六五)는 "참고 견디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다. 상륙(上六)은 "밝지 못하여 어두워졌으니 처음에는 하늘로 올라갔다가 나중에는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으로, 바르지 못한 정치는 결국 패망을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이같은 '명이'의 의미는 곧 명청교체기의 명왕조가 처한 상황을 잘 표현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황종희는 이것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며 기다린다는 뜻에서 '대방록'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명이대방록』은 '신시대 대망록'인 것이다. 신시대를 바라며 정치·경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 책에 수록한 것이다.

    2) 정치개혁론
    『명이대방록』이 드러내고자 했던 신시대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황종희는 이 책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군주론」(원군) 편에서 인간의 자사(自私)와 자리(自利)를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 자사·자리는 개인적·주관적 이기심의 발로이기 때문에 공해(公害)를 제거하거나 공리(公利)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공동사회를 기반으로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이런 자사·자리를 공리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리의 추구는 결국 개개인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성인(聖人)과는 달리 당대의 군주들은 사리(私利)에 눈이 어두워 공리를 진작시키지 못한다고 하였다. 공리가 진작되지 않는 한 일반 백성들의 삶은 곤경에 빠진다. 군주가 천하만물을 자신의 사유물로 생각하고 전횡하게 되면 개개인의 삶은 초개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황종희에게서 백성이란 존재는 정치의 핵심이다. 『맹자』 이후 계승된 민본의 정치 형태를 황종희는 더 극명하게 표출하였다. 그는 민주군객(民主君客)이란 표현으로 이를 말하였다.
    객인 군주가 천하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면서 주인인 백성은 평안할 날이 없다고 말한다. 군주가 정치를 농단하면서 관리와 신하는 군주의 몸종이 되었고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하론」(원신) 편에서 말한다. "내가 벼슬하는 것은 천하 인민을 위해서이지 군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벼슬아치는 백성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위치에 있는 자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후대 학자들은 황종희의 사상을 군주 중심의 지배 체제를 비판하고 민리민복(民利民福)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의 루소' '유교의 루소'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같은 해석은 그 이전의 중국의 정치행태를 놓고 보았을 때 과장된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정치적으로 중국의 군신(君臣)·군민(君民) 관계는 주종관계였다. 송대에는 대신이 황제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고, 늘 서 있어야만 했다. 명대에는 정장(廷杖)이란 제도가 있어서 황제가 관료들에게 직접 체형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같은 황제의 전횡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비판하는 논리를 전개한 것은 민권신장 차원에서 큰 의미를 지니며 그런 점에서 루소의 민약론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지적인 것이다.
    법(法)이 존재하는 것도 군주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이다. 군주가 법 집행을 남발하면 백성들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전횡하는 군주는 법 집행을 마구잡이로 한다. 법제정의 목적은 한 개인의 독단과 사욕을 제어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황종희는 「법제론」(원법) 편에서 "치법(治法)이 있은 뒤에야 치인(治人)이 있다"고 한 것이다. 중립적인 법의 엄정한 적용을 말한 대목으로 인치(人治) 이전에 법치(法治)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칫 유교적 친친(親親)의 논리가 감정에 치우쳐 올바른 법집행을 해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온갖 인연으로 얽힌 인간관계로 공정한 법 집행이 어렵고, 공적 질서가 무너진다. 이같은 문제는 유교적 전통이 깊은 중국과 한국의 오랜 관행이었고 지금도 고질병처럼 남아 있다. 명말청초 시대에 이미 이런 문제를 인식한 황종희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면서 엄정한 법치를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정책결정을 하는 데에도 여론·공론을 중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비 판단의 문제를 어느 특정 개인에게 맡길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시비 판단의 장으로 학교를 내세웠다. 그는 「학교」 편에서 "천자가 옳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고, 천자가 그르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그른 것이 아니다. 천자도 또한 감히 시비를 결정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그 시비를 공론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학교는 양식있는 선비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도덕적으로 가장 올바른 이들이 모여 학문하는 곳이 학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주요 사안에 대한 시비 판단은 학교의 공론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과거 왕조사회에서 일반 저잣거리의 여론보다도 학교의 여론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은 그만큼 양심과 양식을 지닌 지식인들의 여론이 정치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지식인들의 동향이 곧 일반 민중의 여론 동향을 가늠하는 지름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황종희의 주장을 두고 '구민주주의적 의회정치'(舊民主主義的 議會政治)라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황종희의 민본정치 사상은 기존의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선진시대 이래로 유교의 정치사상은 '절어구민'(切於救民)의 민본적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민본의 의미는 군주로부터 내려지는 '은혜의 산물'의 형태에 가깝다. 그래서 때로는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정치논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 때 민본이라 하더라도 민은 어디까지나 대상적 존재이지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종희의 '군객민주'(君客民主)의 논의와 시비 판단의 주체로 학교「士人階層」를 선정한 것은 근대적 민주정치 형태에 근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황종희의 정치 사상은 기존의 민본정치 사상과 구별된다.
    나아가 황종희는 이같은 정치형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재상제도의 활성화(「재상론」), 관리선발의 엄정함과 인재 발굴의 중요성(「관리선발」 「서리」), 환관의 정치 간섭 배제(「환관」) 등을 골자로 한 제도개혁론을 개진하였다. 특히 송대 이후 기승을 부리던 환관의 횡포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차대한 문제였다. 부친 황존소를 비롯 더가까운 이들이 환관의 횡포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환관은 군주의 몸종이라는 원래의 본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환관들은 황제를 보좌하면서 전횡을 일삼았고, 대신 관료들은 오히려 그들 비위나 맞추는 한심한 일들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것은 군주의 다욕(多欲)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군주의 여자관계를 정리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환관」(엄환) 편에서 "군주는 삼부인(三夫人) 외에는 모두 두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환관으로 잔심부름하는 사람도 불과 수십 명이면 충분할 것이다"고 하였다.

    3) 경제개혁론
    「토지제도」(전제)와 「회계제도」(재계) 편은 경제개혁 문제를 다룬 내용이다. 그는 백성을 가치판단의 중심에 놓고 경제문제를 다루었다. 정전제(井田制)의 회복을 통한 부의 균등한 배분은 올바른 정치의 기본이고, 일반 백성들에 대한 세금 경감은 부민론(富民論)의 구체적 방법이라 생각했다. 일조편법(一條鞭法)의 시행은 현실적 여건을 감안한 조처였다. 일조편법의 '편'(鞭)자는 원래 '편'(編)자 였는데, 시행상 백성들에게 가져다준 고통 때문에 변형된 글자이다. 민리민복을 개진한 황종희의 입장에서 이같은 일조편법의 폐지를 주장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은(銀)이 일부의 권력층(대개는 환관층)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은본위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백성들에게는 부담만 가중시키는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자금의 흐름을 막는 요인이다. 여기서 황종희는 그 대안으로 전과 지폐의 활용을 주장하였다. 전과 지폐를 사용하면 무엇보다 백성들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시장원리에 입각해서도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은은 귀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사용하거나 세금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자면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은 주조하기 쉽고 고갈될 염려가 없기 때문에 시장에서 사용하든 부세방법으로 사용하든 유통수단으로 편리하며, 그것도 오랫동안 원활히 사용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장의 논리에서나 설명 가능한 혁신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것과 더불어 공상개본(工商皆本)의 주장은 기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의식에 대한 차별적 이해를 넘어선 매우 획기적인 발언이다. 이것은 명청대 싹트기 시작한 자본주의 맹아 문제와도 관련된다. 다시 말해 화폐유통을 활성화시키자는 주장과 기존의 직업에 대한 차별의식을 비판하는 논의가 담겨 있는 『명이대방록』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급자족의 자연경제가 수천년 동안 지속되면서 중국사회는 농업문화가 정착되었다. 그런데 농업문화는 사회 발전에는 능동적이지 못하다. 더욱이 폐쇄적 농업문화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갖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황종희가 주장한 공상(工商)문화에 대한 의식 전환은 중국사회의 변화라는 차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농업문화적인 사고방식에서의 공상문화는 위선일 수밖에 없다. 농업사회의 정직한 도덕 윤리가 공상문화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록 황종희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공상문화를 농업과 함께 본업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중국사회의 발전적 전환이란 차원으로 그 의미를 확대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그가 정전제를 주장한 것은 단순히 고대 이상사회의 모델을 따르자는 망상이 아니다. 중앙집권적 전제정치가 가져온 폐단을 직시하고 정권을 분산시키자는 일종의 지방자치를 주장한 것이다. 이미 앞에서 전제왕권으로 인한 수많은 폐단을 지적하였다. 그 폐단을 해결하는 방법을 정전제에서 찾자는 것이다.
    군주는 전국토의 유일한 소유자이면서 전횡의 대명사였고, 그 측근세력이었던 환관들은 온갖 부정부패의 주범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봉건제는 문제 해결의 대안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분권통치는 개선된 민(民) 의식, 자각된 개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황종희의 정전제 주장은 당시 개선된 민의식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전제는 선진(先秦)시대의 정전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선진시대의 정전제는 단순 경제논리, 즉 효율적인 토지관리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황종희의 정전제 논리는 정치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개혁논리와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5. 『명이대방록』이 후대에 미친 영향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명이대방록』이 추구하는 정치 경제적 형태는 매우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다. 전제왕권하에서 개혁과 혁신을 주장한 것은 그만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아마도 황종희는 이미 회생 불가능한 명조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새로운 왕조---물론 그가 바랐던 새로운 왕조가 만주족 정권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지만---에 대한 강한 집념과 의지를 이 책을 통해 표현했던 것이다. 그 왕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회의 제도와 형태는 매우 분명한 어조로 그리고 있다.
    새로운 사회의 주체는 비록 구체적 언급이 없다 하더라도 다음 세 가지 방향에서 추론할 수 있다. 첫째는 이미 멸망한 명왕조 회복을 통해서, 둘째는 새롭게 들어선 청조를 통해서, 셋째는 제3의 세력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첫째, 둘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황종희는 잘 알고 있었다. 『명이대방록』의 저술시기로 볼 때, 그가 명조 회복의 불가능함을 알고 썼다는 것과 극렬한 반청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명조를 비롯한 역대 전제왕권이 『명이대방록』의 정치 경제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전 왕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마지막 세번째가 아마도 황종희가 기대를 걸고 추구했던 사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황종희 자신의 구체적 언급이 없는 부분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명이대방록』이 신시대에 대한 열망과 과거 잘못된 사회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자못 강렬하다는 점에서 과연 신시대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두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황종희가 갈망했던 신시대는 『명이대방록』 내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특정 왕조가 주체가 되는 사회라기보다는 '군객민주'에 보이듯 백성이 주인이 되고, 정치의 주역으로 사대부 지식인 출신의 재상과 관리들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근대적인 민주주의 사회와는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기존의 전제왕조사회에서 논의되던 '군주민본'(君主民本)과는 분명 다른 차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이대방록』은 신시대·신사회를 갈망하는 청말 지식인들에게는 유용한 교과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손문(孫文, 1866∼1925)은 일본 망명중 혁명결사체 '흥중회'(興中會)를 결성하면서 이 책을 선전품(宣傳品)으로 휴대하였고,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에서 이 책을 루소의 『사회계약설』에 비유하고, 황종희를 '중국의 루소'라고 명명하였다. 『청대학술개론』에서는 『명이대방록』이 인쇄 반포되면서 "청말 사상의 급속한 변화에 대단히 큰 영향력이 있었다"고 하였고, 이 책이 비밀리에 반포되면서 "혁명사상을 선전하고 신봉하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고 하였다.
    한편 담사동(譚嗣同, 1865∼98)은 삼대 이후 군권 배척과 인권 존중의 차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명이대방록』이라고 극찬하기도 하였고, 장개석(蔣介石, 1887∼1976)도 그의 『중국의 운명』에서 『명이대방록』을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비유하며, 황종희가 더 위대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명이대방록』을 『송원학안』(宋元學案)·『명유학안』(明儒學案)과 더불어 필독서로 꼽았다.
    물론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을 비현실적인 것이라 비판한 이도 있는데, 장병린(章炳麟, 1869∼1936)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장씨총서』(章氏叢書) 「비황」(非黃)이란 단편에서 황종희의 논의를 '양심적 영웅주의'로 강하게 채색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황종희는 오랑캐의 지배에 자문을 기대함으로써 명왕조에 대한 충성을 저버렸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황종희는 청조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관직도 수여한 적이 없다. 다만 명사(明史)를 편찬하는 데 간접적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명사 편찬에 참여한 것은 단지 정복 왕조가 피정복 왕조의 역사를 폄하하거나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고, 그것도 자기 대신 제자 만사동을 보냄으로써 자신은 명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가열찬 반청운동으로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고, 이 운동에 가담했던 이들의 신도비(神道碑)와 전기를 작성하며 그들을 칭송하였다.
    이같은 의지는 명조 회복이 불가능한 것을 깨닫고 저술한 『명이대방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전제왕권에 대한 강한 비판이 그것이다. 이 비판은 결코 이전 왕조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하튼 『명이대방록』은 수백년 간의 전제정치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시도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발현하였는데, 이것은 손문·양계초·담사동·장개석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정치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황종희의 공리적(公利的) 민본 정치사상은 청말민초 변화된 사회의 요청과 요구에 적합한 논리로서 당시 환영받던 이론이었던 것이다.

    목차

    1. 새 시대를 갈망하는 "명이대방록"의 사상사적 의의
    2. [명이대방록]
    3. 머리말
    4. 군주론
    5. 신하론
    6. 법제론
    7. 재상론
    8. 학교
    9. 관리선발
    10. 수도건설
    11. 국경수비
    12. 토지제도
    13. 병사제도
    14. 회계제도
    15. 서리
    16. 환관
    17. [황종희 연보]
    18. 옮긴이의 말
    19. 찾아보기

    본문중에서

    나는 항상 맹자(孟子)의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해 진다"(一治一亂)고 한 말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어찌하여 삼대(三代) 이후에는 혼란만 있었고 다스려지지는 않았을까? 호한(胡翰, 1307∼81)의 이른바 십이운(十二運)을 보면 주나라 경왕(敬王, 기원전 519∼476) 갑자년(甲子年, 기원전 477)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모두 혼란한 운세에 해당한다. 이후 20년간은 '대장'(大壯)에 해당되어 비로소 다스려질 것이기 때문에 삼대의 융성했던 시기와 같아 아직 절망할 것은 아니다.
    이전 임인년(壬寅年, 1662) 여름에 정치의 대법(大法)을 조목조목 나열하면서 아직 몇 장 끝내지 못했는데, 그만 화재를 당해 중지한 적이 있다. 금년 남수(藍水)에서 고향집으로 돌아와 남은 책들을 정리하는데, 이 책이 짐꾼들이 짐을 나르고 선실 바닥에 그대로 쌓아두었는데도 아직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자 아들 황백가(黃百家)가 완성하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겨울 10월, 비오는 창가에서 붓을 들고 원고를 수정하면서 탄식하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였다. 옛날 왕면(王冕, 1335∼1407)이 {주례}(周禮)를 모방하여 저서 한 권을 내고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아직 죽지 않았으니 이 책을 가지고 현명한 군주를 만난다면 이윤(伊尹)·여상(呂尙)과 같은 사업을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지만, 마침내는 조금도 시험해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었다. 왕면의 책을 아직 구해보지 못하여 그것이 잘 다스릴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참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난세의 기운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또한 어찌 '대장'의 운수가 오겠는가!

    내가 비록 늙었어도 기자(箕子)에게 주나라 무왕(武王)이 질문한 것과 같은 기회가 혹 있을지 기대한다. 어찌 "태양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빛이 아직 대지를 비추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이 말을 감추어두겠는가!

    계묘년(癸卯年, 1663), 이주(梨洲) 황종희 씀.


    [題辭]

    余常疑孟子一治一亂之言, 何三代而下之有亂無治也? 乃觀胡翰所謂十二運者, 起周敬王甲子以至於今, 皆在一亂之運. 向後二十年交入'大壯', 始得一治, 則三代之盛猶未絶望也. 前年壬寅夏, 條具爲治大法, 未卒數章, 遇火而止. 今年自藍水返於故居, 整理殘帙, 此卷猶未失落於擔頭艙底, 兒子某某請完之. 冬十月, 雨 削筆,  然而歎曰: 昔王冕倣{周禮}, 著書一卷, 自謂 "吾未卽死, 持此以遇明主, 伊呂事業不難致也", 終不得少試以死. 冕之書未得見, 其可致治與否, 固未可知. 然亂運未終, 亦何能爲'大壯'之交! 吾雖老矣, 如箕子之見訪, 或庶幾焉. 豈因"夷之初旦, 明而未融", 遂비[감춤]其言也!

    癸卯, 梨洲老人識.

    저자소개

    생년월일 1610
    출생지 절강성 여효현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명말청초의 대학자 황종희(黃宗羲, 1610∼95)는 절강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 사람으로 자는 태충(太沖), 호는 남뢰(南雷)이며, 사람들이 이주(梨洲) 선생이라고 불렀다. 황종희의 어릴 적 이름은 린(麟)으로, 그의 어머니가 태몽에서 기린을 보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명말 성경(誠敬)과 신독(愼獨)을 위주로 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유종주(劉宗周, 1578∼1645)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것은 그의 부친이 환관 위충현(魏忠賢) 일당에게 체포되면서 남긴 유언에 따른 것이다.
    한편,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어울려 학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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