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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 장편소설『숨은 시간』.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이 소설은, 미국 보스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내막을 추적하는 추리소설적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스콘신 대학의 연구원인 정서진을 총으로 살해했다고 자수한 한국 여성 한설형. 현지 경찰관 정준, 현지 변호사 로렌 송, 한국인 변호사 박일규가 사건의 진위여부를 파헤쳐나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우리 시대의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그 대답으로 내놓은 이 소설은, 미국 보스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내막을 추적하는 추리소설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한국여성 한설형이 위스콘신 대학의 연구원인 정서진을 총으로 쏴 죽였다고 캠브리지 경찰서에 자수해오지만, 살해용의자가 왜 피살자를 죽였는지 그 범행 동기나 이유가 분명치 않은데다가 뭔가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거짓자수를 해왔을 가능성으로 인해, 현지경찰관 정준, 현지변호사인 로렌 송 그리고 한국인 변호사 박일규가 사건과 연관을 맺게 되면서 사건의 진위여부를 파헤쳐나가는 과정이 스토리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개성 강한 문체로 속도감 있게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우리 시대의 삶의 문제를 물고늘어진 이 소설은, 이야기가 두 축으로 전개된다. ‘나’라는 화자 홍강희의 이야기를 통해 한설형과 정서진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그 한 축이고, 정준, 로렌, 박일규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살인사건의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 다른 한 축이다. 이러한 전개 과정에서 각각의 인물들의 삶의 내력 또한 자연스럽게 조명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는 각각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디테일이 삶의 구체성이 되어 산다는 것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한다.

“나”가 소설 곳곳에서 자신과 한설형을 두고 거론하고 있는 “새끼악마”나 “마성” 나아가 “우리들 악마란 그런 것이다!”라는 표현은, “숨은 시간”의 요체를 암시해보여주는 것이다. 이때의 “악마성”이란, 끔찍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할 수도 있다는 것, 나아가 불확실성시대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느껴볼 수도 있다는 것, 그리하여 각각의 인물들이 거짓 욕망을 뚫고 자존감을 회복할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그럼으로써 산다는 것의 본질을 꿰뚫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정체성으로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물들이 한설형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가는 과정이란 곧 “악마성”을 지닌 한설형의 “숨은 시간”을 찾아내는 것이 된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들의 “악마성”과 더불어 자신들을 둘러싼 삶의 문제를 재인식하게 되고, 나아가 자신들의 “숨은 시간”을 재발견함으로써 결론적으로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보이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80년대와 90년대를 다 흘려보내고 이제와 소설을 쓰겠다고 덤벼든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한설형들”은 10년도 더 전에 예비 되었다고 한다. 80년대 말 대학동아리에서 만나고 있는 인물들 간의 엇갈린 사랑을 통해, 각 인물들의 정서 심층에 잠재된 연애감정의 음영을 절묘하게 포착해내고 있는 가운데, 꿈도 열정도 덧없이 사위어버린 듯한 90년대와 다변화된 2000년대의 한국사회를 로펌 대표 등의 직업적 시선으로 디테일하게 조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준은 매사추세츠 주 경찰청에 소속된 경사로서 그 사건을 접하게 되지만, 자신이 한때 머물렀던 썸머빌의 한인하숙집에서 설형과 시간을 보냈던 인연으로 사건을 추적해간다. “인간에게는 늘 각각의 인간에게 어울리는 사건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마천의 지론을 제시함으로써 사건의 성격을 암시해주고도 있는 정준은, 같은 수사팀의 일원인 배트남계 경찰관 탄과 동거하는 가운데 성 정체성의 갈등을 겪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로렌 효인 송은, 예일대학에 하버드로스쿨을 나와 자신의 한국어를 선택한 로펌에 타협해 들어가 미끈하게 상승가도를 타기도 하지만 자괴감을 떨치지 못하던 끝에, 트레일러하우스에서 이민노무자들에게 무료법률상담을 해주는 일을 택한 인물이다. 로렌이 한설형 사건의 의미를 짚
어가는 가운데 미국사회에서의 정체성 문제와 유대계 남편과의 비교적 성공적인 결혼생활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 다문화 가정 문제 등 묵직한 삶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소설의 주제를 구체적으로 환기시킨다.

한편, 정준 시점에서의 문체가 쿨하다면, 로렌 시점에서의 문체는 다소 격정적이다. ‘나’ 홍강희와 박일규 시점에서의 문체 또한 인물의 성격과 밀접한데, 이는 인물의 시점과 성격에 따라 문체를 달리 구사함으로써 이야기가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리얼리티를 확보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또한, 모든 인물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썸머빌의 한인하숙집, 이야기 전개의 각 장을 이루고 있는 내곡동은 살아있는 공간으로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갖게 한다. 소설의 인물들이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유형을 넘어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탄탄한 서사를 구축했다고 본다면, 우리 시대의 현재적 관심사를, 이러한 시공간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잡아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장 낙화에서부터 14장 옥잠화까지 내곡동 텃밭에서 농사짓는 과정은 곧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관련되는 것으로, 계절과 시각에 따른 자연풍광의 변화를 묘사해보임으로써, 인물들이 사건을 풀어나가고 있는 시간의 추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공간 구조는 말하자면, 저자가 의식적으로 모색한 창작 기법으로, 무엇보다 독자와의 의사소통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1장 낙화
2장 전정
3장 묵은지
4장 파종
5장 밭갈이
6장 모종
7장 제초
8장 <파란들>
9장 아이들
10장 보리수
11장 매실
12장 자주달개비
13장 살구
14장 옥잠화

작가의 말
삶의 비밀을 물어요, 당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