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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희망 없이, 사랑하라!

윤영수 소설집『사랑하라, 희망 없이』. 한국일보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1990년대 한국 소설의 가능성으로 평가받았던 작가 윤영수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통해 그동안 보편성에 가려 보이지 않던 존재들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1994년에 출간되었던 책의 개정판이다.

등단작 〈생태 관찰〉에서 교육자였던 아버지는 정실부인을 놔두고 제자를 첩으로 맞이한다. 〈올가미 씌우기〉에서 주인공 영석의 어머니는 쌀 다섯 가마에 몸을 빌려준 씨받이다. 〈바람의 눈〉에서 큰아들은 존속살해 미수 혐의의 정신질환자이고, 그 부모는 아들을 피해 살아간다. 〈봄 뜰〉에는 양딸과 불안한 관계를 지속하는 어머니가 나타난다.

이처럼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정상적인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단절된 가족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의 우울한 실존 형식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말라고 강조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에 좌절하는 대신,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사랑의 힘에 희망을 걸라고 이야기한다. [양장본]

한국일보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1990년대 한국 소설의 가능성이자 성과로 평가받은 작가 윤영수
삶과 사랑의 지축을 흔든 그의 첫 소설집

“우리 소설계에 있어 하나의 희망의 지렛대”(문학평론가 우찬제)요, “최근 우리 문학이 거둔 최대의 수확”(문학평론가 최원식)이란 평가를 받은 소설가 윤영수의 첫 번째 소설집 『사랑하라, 희망 없이』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한번 선보인다.
인간 존재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을 보여 준 이 작품들은 발표 당시인 1990년대 중반의 문학적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이전 한국 소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고유한 역사지리지를 구축하였다. 1980년대의 거대 담론과 이를 거부하는 1990년대의 거대 담론에서 비켜나, 그것에 가려 보이지 않던 “존재들에 대한 관심”을 촉발한 소설집이기 때문이다.
윤대녕, 신경숙, 장정일 등과 더불어 한국 문학 전반의 전환의 계기로 기능하였던 윤영수의 『사랑하라, 희망 없이』는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무너지는 부권과 와해된 가족의 텍스트
-‘절망’과 ‘희망’의 두 얼굴을 지닌 사랑 노래

『사랑하라, 희망 없이』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들은 인간 존재의 우울한 실존 형식을 단절된 가족관계를 통해 그려 낸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정상적인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등단작인 「생태 관찰」에서는 교육자였던 아버지가 구식 결혼을 한 정실부인을 놔두고 제자를 첩으로 맞이한다. 그 결과 정실부인은 무당이 되고, 그들 사이에서 난 딸은 70 넘은 일본인의 현지처가 되어 방탕한 삶을 산다. 첩실로 들어온 아내는 존경받는 교육자의 아내인 양 행세를 하고, 그 딸은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이렇듯 얽히고설킨 관계의 중심에 선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남편은 물론 아버지 노릇조차 제대로 해 내지 못한다. 이런 어긋난 가족 관계는 소설집 곳곳에서 나타난다. 「올가미 씌우기」에서도 주인공 영석의 어머니는 쌀 다섯 가마에 몸을 빌려 준 씨받이로, 아들을 낳자마자 밤도망을 쳐 첩실로 눌러앉는다. 그런 까닭에 아들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어머니를, 영석은 평생을 걸머져야 하는 짐으로 여긴다. 이 소설 속의 아버지 역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영석의 어머니 앞에서는 아내를 향해 발길질을 서슴지 않는 폭력적인 남편이지만, 부잣집 딸인 정실부인 앞에서는 눈치를 보기 바쁘다. 「바람의 눈」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큰아들은 존속살해 미수 혐의의 정신질환자이고, 그 부모는 큰아들을 피해 길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옥상의 가건물에 살며 매달 적은 돈을 통장에 넣는 것으로 부모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작은아들은 찾을 수 없게 된 형의 돈을 가로채고 새벽마다 전화를 하는 등 부모를 위협한다. 「봄 뜰」에서는 양딸과 불안한 관계를 지속하는 어머니가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는 그나마 미약하게 나타나던 아버지의 존재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여인 입상」에서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이 죽은 뒤 세상과의 소통에 문제를 겪는 여인이, 「도묘」에서는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이, 「잔일」에서는 가족을 잃은 채 양로 아파트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듯 와해된 가족의 존재는 흔들리고 있는 사회의 반영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강한 자들의 욕망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지만, 타인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얽매여 좌절하는 대신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사랑에, 정형화되지 않은 힘에 희망을 걸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절망의 땅에서 피어난 사랑을 노래하며 「사랑하라, 희망 없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희망이라곤 전혀 없는 상처투성이 연인들의 이마에 슬며시 그어 주는 하늘의 축복 같은 것.…… 사랑하라, 희망 없이. 눈 감은 채 마주 선 연인들이여. 가장 깊은 진실은 눈을 감아야 보이나니, 사랑하라, 희망 없이, 사랑하라.

■ 추천의 글

윤영수의 첫 소설집 『사랑하라, 희망 없이』는 1990년대 소설사를 빛낸, 의미 있는 개성의 하나이다. 1990년대 현실 및 미의식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성찰적 문제의식과 탄력적 스타일로 윤영수만의 서사적 가능 지평을 열어 보였다. 동시대의 어설픈 존재의 둥지를 헤아리는 섬세한 눈 그물과 그것을 문제적 개성으로 빚어내는 능란한 서사 그물로 인하여, 독자들은 대화적 공명음 속에서 행복한 독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정작 문제적인 것은 그의 소설이 1990년대 소설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미와 감동의 자장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윤영수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다.
-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국문과 교수)

『사랑하라, 희망 없이』는 이전 한국 소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고유한 역사지리지를 구축하며, 그동안의 보편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무시무시하고도 매혹적인 실존들을 충격적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윤영수에게는 “우리 소설계에 있어 하나의 희망의 지렛대” 혹은 “최근 우리 문학이 거둔 최대의 수확”이라는 찬사가 뒤따랐거니와, 이는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니다. 그만큼 윤영수의 소설들은 밀도가 높고 그 열도가 대단하다.
-류보선(문학평론가?군산대 국문과 교수)

생태 관찰
올가미 씌우기
봄뜰
잔일(殘日)
사랑하라, 희망 없이
도묘(都墓)
여인 입상(女人 立像)
모든 벽은 문이다
바람의 눈

개정판을 내며

아, 이것이었다, 그들의 정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명령하고 요구하는, 그 지치지도 않는 기계 덩어리, 말간 피부로 위장된 가식의 미소들. 그들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에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가.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했던가.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오, 구하라, 얻을 것이니. 온몸을 결박하던 겹겹의 올가미가 하나씩 하나씩 끊겨 나가기 시작한다. 가슴이 뻐개질 듯 숨이 가쁘다. 주체 못할 정도로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는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내 눈앞에는 화려하고 육중한 문이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처음 대하는 문이었으나 결코 낯설지 않은 문. 옛날부터 보아 온, 바로 이 자리에 분명히 있었던,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문이었다. 양 날개를 펼친 듯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나는 조심스레 한 발을 들여놓는다. 가슴께로부터 무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있다. 웃음이다.
웃음은 이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열어젖히고 터진 눈구멍과 콧구멍과 입을 통하여 비어져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가슴에 굽이굽이 접었던 웃음을 다 끄집어낼 때까지 아무래도 입은 쉬이 다 물리지 않을 모양이다. 대책 없이 땅바닥에 게워 놓는, 이 끅끅대는 소리를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지 참으로 나는 오래간만에 행복한 고민에 휩싸인다.
눈물이 절금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본 문 안의 하늘은 쾌청이다.
-「올가미 씌우기」 중에서

의사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할 줄 아는 얘기는 빤하다. 수면제가 든 약을 정시에 맞추어 복용하고 죽은 듯이 늘어져서, 그저 아무 생각도 말고 눈을 감아 버리라는 것뿐이다. 천지에 진동하는 봄의 광기, 땅속 밑뿌리까지 들쑤셔대는 정염들, 이 세상의 산 것들 모두가 미친 듯이 발악을 하는 이때에. 봄, 공기에서 문득 싸구려 향수 내가 난다고 느껴지던 그 순간에 두드러기들은 소름처럼 일제히 솟아났다. 그것들을 어찌 하릴없는 잠으로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춘화라더니. 봄이 벌이는 추태로부터 비겁하게 눈을 돌릴 생각은 없다. 부릅뜬 두 눈으로 그들의 유치한 행태를 낱낱이 꿰뚫어 하나씩 하나씩 맞서는 수밖에 없다. 만물이 저마다의 해괴한 소리로 상대를 부르고 교접의 음란한 몸짓을 끝낸 후에야 소름은 서서히 가라앉아 갈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핀 두드러기는 그 추잡한 기운들에 대처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마치 갑옷의 미늘과 같은 것이다.
-「봄 뜰」 중에서

질식하려는 현재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어떤 추억을 상기하게 되면 그 추억이 가진 신선한 공기로 말미암아 또 한동안은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파다가 단념해 버렸던 통로의 한 구간, 격리되었던 공간에 우연히 닿은 것처럼.
끊임없이 통로를 팔 일이다.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통로가 뻗어 간다 할지라도. 다른 이의 공법과 맞지 않아 개통의 마지막 순간에 등을 돌리게 되더라도. 중도에 단념해 버린 구간조차 그녀의 것임에 틀림없으며, 그 구간은 또 미래의 어느 중요한 순간에 그녀와 맞닥뜨려 새로운 의미를 안겨 줄지 모른다.
마음먹은 것이 중요하지, 그녀는 다시 중얼거린다. 지하철 자동 매표기에서 떨어지는 노란색 표를 집는다. 그녀는 개찰구로 다가선다.
-「여인 입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