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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수필(隨筆)은 희필(戱筆)이어야 한다. 흔히 지적하듯, 수필은 일인칭 문학이기에 ‘수필 속의 나’는 곧 ‘작가의 인격’ 그 자체이다.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작품 속에 작가의 인격이 투영된 ‘가공의 인물’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모든 문학작품에 그 나름의 격(格)이 있지만, 수필작품에는 엄연히 인격(人格)이 있다. 이것이 수필이 타 장르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렇기에 수필작가는 작품을 쓰기에 앞서 자신의 인격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 그 인격을 형성하는 특질 중 첫째가는 건, 역시 ‘겸손함’이다. 높지만 낮출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고소공포증에 걸린 이 시대의 많은 작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겸손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명수필’로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수필을 ‘희필’로 부르는 작가, 그저 ‘어쩌다 쓴 글 장난’이라 이르는 작가. 그가 바로 제 6회 현대수필문학대상 수상(’93년)에 빛나는 모헌(慕軒) 박규환 선생(1916-2003)이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평가받는 그의 복문(複文)은 구조적으로 서로서로 업고 걸린 채 위태한 균형을 이루며 흘러가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듯 그 문장들을 따라 읽어 내려갈 때의 그 흥미진진함은, 이야기의 고비 때마다 터져 나오는 유머러스함과 어우러질 때 통쾌함으로 바뀐다. 문장의 예술성을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그래서 이 책은 추천할 만하다. 수록된 작품 중 ‘분(粉)꽃’, ‘유비유환(有備有患)’, ‘찐찐의 입원’, ‘오줌싸개 제자’ 등을 읽어보길 권한다.

’92년 아내와 사별한 이후, 선생의 글은 보다 중후한 빛깔을 낸다. 상실의 아픔을 겪으며 ‘노인의 고독’과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사색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노인의 고독을 ‘무인도’에 비유한 절묘함(작품 ‘고독의 변’), 붐비지 않는 정류장이 사실은 노인에게는 더 불편하다는 노인만의 비밀(작품 ‘불안한 노인들’), 실은 자신의 외로움보다 어린 소녀도 언젠가 늙어서 겪어야 할 외로움이 더 안쓰럽다는 풍부한 감성(작품 ‘마지막 잎새’), 공공장소에 가면 노인 옆에 언제나 스페어 자리 하나쯤이 확보된다는 슬픈 유머(작품 ‘늙지 않고도 오래 살 수 있다면’)는 노인을 둔 가족들이, 그리고 노인사회로 접어드는 우리 사회가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될 주옥같은 표현들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한국전쟁과 이 사회의 민주화를 겪어 21세기 초까지 이어진 그의 삶이 녹아든 작품들에는 그 때 그 시절의 단면들이 언뜻언뜻 보이기도 한다. 이 또한 감상의 포인트가 될 수 있겠다.

이 수필선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헌 선생의 수필 중 문학적 가치가 높은 스물네 편을 고른 것이다. 수필집을 내기 위해 억지로 작품을 쓴 바 없고, 그 흔한 수필단체 어느 한 곳에서도 활동하지 않았던 작가로, 자신의 명성을 위해 뛰어본 일 없는 겸손한 작가. 다작(多作)의 수필가는 더더욱 아니었던 그에 대해 한국수필문단이 아는 사실은 그저 생활 속에서 격이 다른 수필을 빚어낸 참수필가라는 것뿐이다.

Essay Club 이 종 화

1부

분꽃
잃어져 가는 것들
유비유환
불안한 노인들
입춘
불광천변의 산책로

2부

마지막 잎새
찐찐의 입원
붉은 깃대 이야기
봉변기
오줌싸개 제자
캉 할머니

3부

커피자판기
고독의 변
젊은 날의 일화
늙지 않고도 오래 살 수 있다면
난청기
낙서

4부

아내의 무덤
이사
기다림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끝없는 기다림(생에 마지막 작품, 편집인)
마지막 남기는 말遺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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