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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한 주종환 시집. 결코 이길 수 없는 자본주의의 성채 안에서 온몸으로 겪는 불안과 불면과 소외와 좌절 등을 견뎌내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래들을 총 3부로 나누어 담았다.

주종환 시인의 시편들은 “마르크스, 니체, 푸코가/결코 이길 수 없는 자본주의의 성채”(「도화」) 안에서 온몸으로 겪는 불안과 불면과 소외와 좌절 등을 견뎌내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래들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한편으로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새로운 삶을 위해 살아라, 그 불가능과 싸워라!”(「죽음과 청춘과 그리고 시」)라고 이전에 보여주었던 파토스적 열정을 여전히 불태우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있다면/나는 달님의 뒤편에 눕겠네.”(「달의 여신」)라고 대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어느 경우든 불 같은 외로움과 피 흘리는 짐승의 눈빛 같은 절실함으로 지향한 것이기에 진정성이 있다. “부싯돌 같은 빛 하나”(「끝이 없는 길」)를 내는 일이 시인의 운명이자 희망이라는 사실을 삶이 사선(死線)처럼 범람하는 이 시대에 감동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맹문재(시인, 안양대 교수)


봄 햇살 꽃그늘 속 봄 나비가 풀쩍 날아올랐다가 내려앉는다. 작은 나비의 팔랑거림과 주종환.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만남과 함께 다시 목격하게 되는 것. 빗속에 갇힌 불타는 영혼, 죽음과 청춘과 그리고 시, 그 뛰는 말(言)의 갈기들. 그는 홀로 깨어 있는 부엉이의 눈처럼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자신의 시가 자리잡아야 할 이 속악한 세상을 향해 한 발 내딛으려는 순간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우울과 외로움과 분노. 그리고 그가 발견한 사랑. 이러한 변화. 그러니까 그는 “서로의 기억을 뒤섞어 함께 아파하고/새로운 꿈을 짜내어 함께 웃고/모두가 지혜로워지는 것”에 대해 낮게 읊조린다. 어쩌면 과거의 자신을 배반하고 새로운 생의 혁명을 위해 선전포고를 하는지도 모른다. 이 시집의 궁극적 아름다움은 결국 사랑의 발견, 그것이다. 반달과 반달이 수많은 가지 사이에서 보름이 되는 것을 시인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장석원(시인, 고려대 강사)

_시인의 말


1부 _
끝이 없는 길
감각의 초경
달의 여신
새떼의 저편
어머니의 손거울
메아리
아이의 깊이
봄처녀나비
어느 하루 좋은 날
사마귀의 춤
아프리카 식 다도
귀뚜라미
달팽이의 달관
거미
불타는 영혼이 빗속에 갇히다
너의 발견

2부 _
폐허
눈물
거울 만들기
도화
저수지의 피아노
단비의 소송
시, 그 뛰는 말言의 갈기들
죽음과 청춘과 그리고 시
각성
마침내 다다른 경지
나는 관리자가 아니기를
인생
아이 그리고 ‘I'
바다
토끼 이야기






매화
기개
무인도
월식
부엉이의 눈

3부 _
백학
첫눈
우리는 모두 잊혀질 것이다
겨울
할머니의 유산
달님에 비춘 사생활
담배, 핑 돈다
숨을 곳이 없구나
불사조를 기리는 노래
님을 향한 소견
구름 아래의 인생
시설詩設
‘心’자 하나 붙들고
벼랑 위에서
인기척을 내다
달과 태양
기억
새
외로움 혹은 자유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거지
보름
두려움에 대하여
시간의 발견
어떤 기도
남몰래 흐르는 눈물

시인의 산문

폐허

낡고 붕괴 직전 같은 아파트,
시커멓게 그을린 공장들,
몇 푼의 부동산 자금으로 파헤쳐진
산야와 언덕들,
새들조차 적을 버린 하늘처럼
막막한 공해의 무한대,
시커멓게 그을린 뜬구름 하나,
두둥실 떠가는 지옥 같은 평화
강심장이 아니라면
펼치기 힘든 공포의 연하장 같은 세계

도대체 무엇이 폐허냐고?
바로 당신의 눈,
녹슨 악몽의 사슬에 맺힌 이슬 같은,
죽은 꽃과 녹지 않는 눈사람의
영원한 계절, 아무도 살고 싶지 않은
그 무한한 살아짐의 착각 같은 낙원.
폐허를 모르는 이들에게, 폐허를 가르치는
그 모든 전달방식도 폐허 같은,
멈추지 않는 눈물의 업적 같은 문명.


눈물

불경(佛經)과 토정비결
십자가와 처세술 사이에

시와 무사의 길
정한(情恨)의 강물과 비즈니스의 사막 사이에

그대와 나
우리를 갈라놓은 그 모든 것 사이사이에

눈이 펑펑 내려 쌓이면
그 디뎌지는 처녀성이 서러워.......

사슴의 한 무리가 지나는 겨울 숲 한가운데서
우리는 울리라

티 없이 맑은 눈물 한 방울조차
결례가 되는,

이 땅의 설욕(雪辱)을 축복하는 눈송이들의
그 영원한 생일날에

우두커니 바보처럼
서있는 폭포,

동장군의 서슬 푸른 치하에
온 누리에 얼어붙어 있는 그 눈물의 장군들처럼.


끝이 없는 길

끝이 없는 우주가 있었다,
그 우주 속에 부싯돌 같은 빛 하나 반짝인다면
이 우주전체는 그 빛을 향해 달려간다

희망의 기원이다.

부싯돌 같은 빛 하나, 그 소리 하나가
이 우주의 한바퀴를 관음한다

그대의 삶이 바로 그 부싯돌 같은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