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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신문기자이자 여성학자인 저자의 중국 일기. 연 변에서의 생활과 중국 여러 곳을 여행한 기록을 모았 다. `내가 중국에 간대` `뒤죽박죽 북경, 몇가닥의 인상들` `역사에는 월반이 없는가` 등 33편의 글을 모았다.

[북페어 21] 제7호, 1997.10.25
마흔여덟 살 여성학자가 본 연변 이야기

여자 나이 마흔여덟. 막내는 고3이 되어 어머니의 손을 필요로 하고, 늦게 시작한 공부는 어느새 일로 바뀌어 버린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온다. 미지의 나라 중국으로의 여행. 중년의 여자는 얼씨구나 짐을 싸고 비행기에 오른다. 끝없이 구르기만 하는 일상의 바퀴를 멈추게 하기 위해.
"여성에게 있어 가정은 축복이자 족쇄가 됩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전업주부로 10년을 살았지요. 그러다가 늦게 공부도 시작했고…. 자신의 위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세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무모하다시피 도전한 1년 동안이 저를 성숙시켰습니다."
중국이라는 것이 불투명한 느낌으로만 다가오던 93년, 여성학자 박혜란 씨는 씩씩하게 연변으로 떠났다. '이화여대-연변대 학술교류 프로그램'에 따라 연변대학 초빙 교수 자격으로 가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남편의 우려, 삼형제가 불쌍하다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뒤로 하고 결단을 내린 것.
<<변경에서의 일년>>(또 하나의 문화 펴냄)은 그런 파란만장한 1년간의 연변 생활을 그려낸 책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중국과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연변은 무척이나 여성적(?)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중국 여성들은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자신감에 차 있고 솔직하다. 소극적이거나 얌전을 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생물학적 차이라는 이유로 신중국이 직업 분배시 남성을 우대하는 점이다. 여기에 여성비하의식이 개입된다. 당은 오히려 여성 스스로가 해방되려는 의식이 없다고 비난한다. 여성 문제는 없고 문제 여성만이 존재한다.
여성학자는 이런 여성들 의식 속으로 진솔하게 다가간다. 동등한 여성으로서 문제점을 찾아보고 인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북한, 중국, 한국 등 모두 다른 땅에 살면서도 조선 여성들의 의식은 아직도 가부장적인 사고에 묶여 있다는 점. 가정에서 여성을 순종하도록 길러내고, 유교적인 사회가 여성을 틀에 박힌 '착한 여성'으로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의 사고 깊은 곳에 내재된 여성에 대한 그릇된 사고들이 대인관계 문제, 더 나아가 사회적인 문제를 만든다.
중국과 연변의 풍경은 60년대의 우리 나라를 연상케 한다. 밀려드는 상품들의 홍수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좋아하는 모습들, 국가의 부당한 대우에도 무덤덤한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리고 급작스런 외국 문물의 도입은 많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킨다. 세대 차이, 청소년 문제, 더불어 환경오염 문제까지 심각하다. 우선 살고 보자는 식으로 '질'보다 '양'에 의존하다 보니 오염은 심각해져만 간다. 선진화에는 '월반'이 없는 것이다. 저자는 기름 냄새가 둥둥 떠 다니는 중국 거리와늘 느긋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속이 빤히 보이는 장삿속을 헐뜯기도 하다가 결국엔 훈훈한 인정에 감사한다. 일 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을 다양한 시선으로 중국 대륙 여기저기를 들춰낸다.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는 역시 여행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고정관념을 깨고, 사고를 자유롭게 합니다. 남을 의식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이 여성적인 사고에서 탈피하는 것이지요. 자신을 믿고, 주체적인 생각과 개성을 갖는 것이 제 생활 신조입니다."
낯선 곳에서의 일 년이 자신을 부쩍 성숙하게 했다는 저자는 참으로 여유 있어 보인다. 책 곳곳에 묻어 나는 것은 후덕하고 입바른 '누이 같은 여성'의 모습이다. 한국의 여성들이여,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적당한 때라고 하지 않는가? 삶으로의 적극적인 여행을 떠나 보자. <모경희 기자>

책 머리에 : 마음 한 구석이 늘 아려와
내가 중국에 간대
막상 떠나려니, 발목을 잡는 것들
뒤죽박죽 북경, 몇 가닥의 인상들...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나라라더니
북경에서의 첫 편지
기차역마다 흘러 넘치는 사람, 사람, 사람...
불신의 일상화, 믿을 건 권력과 꽌시 뿐?
연길로부터의 첫 편지
심장처럼 펄펄 뛰는 시장, 바가지와의 전쟁
"거저 딱 새끼 서이 껑지겠다는 게 목적이죠"
"부자가 되어 돌아 온 바람 난 아버지?"
내가 본 두만강은 푸르지 않았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짙더라
몸으로 부딪치면서도 느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경계 허물기는 역시 여성 쪽이 더 쉽지 않을까요.
역사에는 월반이 없는가
"우리 중국도 한때는 그렇게 어리석었지"
화려해 가는 외모에 떨어져 가는 사기
누구나 문제를 볼 줄은 안다, 다만 표현할 기회가 없었을 뿐
뒤섞인 형식, 정다움이 남아 있는 결혼식 문화
언제나 수레를 끌어야 하는 팔잔가 봐요
생존 위기의 곤혹이 존재하는 한 여성 해방은 허상이다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그런 결혼, 어디 없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돌이켜 보게 만드는 신앙의 힘
여섯 달만의 귀국 길에서 생긴 일들
"시번, 시번!" 진시황릉 앞에서 들리는 우리말
중국 스님에게는 '한국 중', 한국인에게는 '신라 스님'
땅은 넓고 볼 것도 많더라만, 스물 넷의 그! 젊음이 나를 울리다
나의 아내 노릇은 몇 점이나 될까
"이런 이야긴 난생 처음 합니다."
무거운, 너무나 무거운 삶의 무게
어린이날처럼 보낸 연변의 3.8 부녀절
우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에필로그 : 나를 찾아 떠났던 먼 길

책 머리에
마음 한구석이 늘 아려와

워낙 세상 일이 변화 무쌍하다 보니 어제도 옛날 같은가 하면 30년 전 일도 바로 어제 같이 느껴지곤 한다. 이제부터 슬슬 치매에 대한 걱정이 고개를 드는 나이에 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길을 걸어가는 남녀 노소를 붙들고 물어 봐도 다 그렇다고 하는 걸 보면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세월이란 게 아이들 말대로 정말 장난이 아닌가 보다.
중국에서 보낸 한 해도 어떨 때는 아주 옛날 일인 듯 싶다가도, 또 어떨 때는 바로 어젯밤에 연길역을 떠난 것만 같은 기분이기도 하다.
나는 1993년 6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연변에서 살았다. 이화여대 한국 여성 연구원(당시에는 여성 연구소)이 추진중이었던 이화여대-연변대 학술 교류 프로그램에 따라 연변 대학의 초빙 교수로 중국에 갔다.
따져 보면 겨우 만 4년 전밖에 안된 일이지만 지금처럼 한중 관계가 복잡하고 밀접해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중국에서 1년이나 되는 기간을 여자 혼자 머문다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 본능적인 불안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마디로 중국은 무언가 투명하지 않은 느낌을 주는 나라였다. 10억이 넘는 인구가 40년 동안을 죽의 장막을 쳐 놓고 저희들끼리 복닥거리더니 어느날 갑자기 개혁 개방을 한다고 호떡집에 불난 듯이 들끓어대며 세계를 휘젓고 있지 않은가. 오랜 세월을 중국과 부대꼈던 우리로서는 선뜻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웠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욕구를 심하지 앓고 있던 마흔 여덟 살의 여성, 나는 아이들 셋에게 살림을 맡겨 놓고 중국 길림성 연길시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음식을 먹고, 많이 느끼고, 그리고 조금 일했다. 내가 여성학을 한다는 사실을 이때처럼 행복하게 느껴본 적도 또 없다. 여성학을 했기 때문에 그나마 나의 꽉 막힌 가슴에 틈새가 생길 수 있었으며, 또 너무나 신기하게도 중국 사람들에게 여성학은 신선함과 호기심을 함께 일으키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남의 땅에 와서 주눅 들지 않아도 되었을 뿐더러, 대단한 성취감까지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중국에 살던 1년 동안 중국과 한국 사이의 길은 급속도로 넓어졌다.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가 홍수처럼 흘러넘쳤으며 특히 중국땅을 밟는 한국인의 숫자는 폭발적이었다. 그해 여름 연길시는 온통 한국인들로 메워졌고 백두산으로 통하는 도로에는 한국인을 가득 채운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이다. 한국인 러시와 한국행 열기로 터질 것만 같은 연변에서 나는 경계선에 선 자로서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한국 가요 일색인 노래방에서, 한집 건너 들어서는 사우나탕에서, 그리고 고리채를 얻어 브로커에게 건네고 기약없는 초청장을 기다리느라 탈진한 농촌에서, 나는 분노와 허탈, 그리고 절망의 끝을 본 기분이었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한국인과 중국 동포들 사이의 악연은 이미 처음부터 배태된 것이었다.
94년 봄, 일단 서울로 돌아온 나는 그해 김일성이 죽던 여름 다시 중국에 갔다. 숙대 이대가 함께 북경 대학과 학술회의를 열었으며 곧이어 이대-연변대 학술회의가 열렸다. 북경에서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들었다. 연변대에 오기로 한 북한 여성들은 불참을 알려 와서 우리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이후 3년 동안 나는 다시 중국에 가지 않았지만 연변에서 인연을 맺은 여성들은 여러 경로로 한국에 자주 다녀갔다. 특히 연변대 여성 문제 연구 중심의 멤버들은 학술 교류로부터 통일 모임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 여성들과 친밀한 끈을 맺고 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부터 <<여성 신문>>에서는 내게 중국 이야기를 써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정작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돌아와서도 한참 지난 94년 가을부터였다. 중국 체험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될 동안에는 쓴다는 일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에 못 썼었는데, 막상 기억이 희미해지자 무언가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속절없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가을부터 연재한 중국 이야기는 이듬해 4월 서른세 번으로 마감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순간,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 동안 어떻게 입을 다물고 살았나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길을 떠나기 전 큰 애가 하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타고난 수다꾼에 일단 발동이 걸렸으니 무한정 쓸 수 있을 것도 같았으나 갑자기 서른셋이라는 숫자가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끝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