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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말하기 행위의 정치성을 주제로, 침묵을 포함한 '말'과 백지로 남겨둔 '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직접적 박해와 간접적 회유 속에서 여성은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여 왔는가? 때로 침묵하며, 망설이며, 말 같지 않은 말을 되풀이하며, 저항하며, 또 자신을 감추며 살아왔는가? '말없음'에서 '말찾기'까지, 여성이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말을 살려 내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탐색하고 있다.

책을 펴내며

좌담
살아남기 위한 말, 살리기 위한 말

고정희를 그리며
토악질하듯 어루만지듯 가슴으로 읽은 고정희 / 박혜란
고정희 선생님이 죽었다? / 김은실

논설
여성의 자기 진술의 양식과 문체의 발견을 위하여 / 김성례
지식인 여성들의 글쓰기 / 조혜정·김미숙·최현희
미친년 넋두리 / 조주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우리에게 던진 숙제 / 조은

문학의 현장
페미니즘 문학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 이소희
페미니즘과 여성시 / 김혜순
19세기 영국 여성 작가들의 자전적 소설 / 서지문
앨리스 워커의 '보랏빛'을 통해 본 상징과 서간체 형식 / 박소연

콩트
나는 곡비인가? / 김영숙
약 먹는 여자 / 하운
서른아홉 살의 아침 / 박혜자
술래잡기 / 정진
내숭 열녀비 / 김효선
찬밥에도 칼로리가 있다 / 이연경

적응과 성장
환자를 돌보듯이 나를 돌보며 글쓰기 / 이나미

공동 창작
투구에 걸린 목 / 연극 소모임
소리, 자루, 그리고 춤 - 발성 연습 / 연극 소모임

다시 읽는 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 한정아
함께 읽고 새로 써본 씩쑤의 '메두사의 웃음' / 박일형

서평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의 비밀, 남자가 알아야 할 여자의 비밀'/ 김정화

1.

1987년에 동인지 3호 <<여성해방문학>>을 펴내면서 우리는 이미 한차례 여성 억압과 언어의 관련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또다시 말하기 행위의 정치성을 주제로, 침묵을 포함한 '말'과 백지로 남겨둔 '글'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직접적 박해와 간접적 회유 속에서 여성은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며, 침묵하며, 망설이며, 말 같지 않은 말을 되풀이하며, 저항하며, 또 자신을 감추며 살아왔는가? '말없음'에서 '말찾기'까지, 여성이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말을 살려내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는 그 동안 남성의 말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피해자로서의 요구 사항을 소리 높여 주장해 온 자신을 돌아본다. 우리는 이 책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남성의 말과 전쟁을 벌이려고 남성의 말에 맞추는 것, 그 말로 많은 것을 말할수록 자신의 언어를 더욱 잃게 되는 그 자가당착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가두어 두고 싶지 않다.
이 책에서 우리가 당위적인 주장 대신 '지배자'의 눈을 피해 질러온 '소음'들, 울부짖음, 신음소리, 내숭, 그리고 여성끼리 나누어 온 지혜의 소리를 끌어내 보고자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설명적이거나 주장이 강한 글보다는 '보여주기'를 하는 글을 쓰려고 노력한 것도 그런 뜻에서였다. 생존 전략인 자기 진술과 해방이 되는 자기 진술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그 둘은 연결되어 있고, 해방의 말을 찾기 위해 우리는 그 동안 존재했으나 공인되지 않았던 담론의 공간들, 침묵의 공간, 울음의 공간, 낄낄거림의 공간을 되찾아야 한다.
'여자로 말하기'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상징이 아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우리들은 대개가 다음과 같은 것을 떠올린다. 여성의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 말의 빼앗김과 되찾음, 침묵 시위와 반언술 행위, 이런 것들 말이다. 이 책에서는 그래서 좀더 색다른 단어로 실천적 말을 하자는 분위기를 살려보았다. 그것은 '몸으로 글쓰기'라는 단어이다.
'몸으로 글쓰기'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단어는 아니다. 서양의 페미니스트들이 얼마 전부터 사용해 온 단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70년대 초반부터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한 많은 여성들이 소규모로 모여서 '자기 이야기 풀어내기', '껍질벗기', '허물벗기'의 차원에서 '여자로 말'하고 '몸으로 글'을 써왔다. 이들은 서구 역사를 거슬러 가면서, 자기 주장이 강하다고 하여 마녀로 몰려 죽어간 여성이 되어 이야기하기도 하고 마녀처럼 주문을 걸기도 하며, 형식과 내용을 송두리째 바꾼 새로운 사전을 펴내기도 하였다. 영국에서는 여성으로 말하기의 전통이 20세기 초반부터 활발하게 일어 왔으며, 프랑스에서는 언어와 정신분석학을 연결하는 매우 이론적인 논의로 '몸으로 글쓰기'의 단어가 최근에 크게 부각되어 왔다.
'몸으로 글쓰기'라는 것은 결국 기존의 언어가 여성의 체험을 풀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여성들이 해온, '머리'만도 아니고 '가슴'만으로도 아닌 온몸으로 쓰는 모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 내용과 형식은 각 사회의 구체적 역사의 진행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며,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그런 글쓰기를 찾아내고, 또 만들어 가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면에서 의의를 갖는다.

2.

이 책의 구성은 늘 그랬듯이 다양한 장르로 차 있다. 좌담인 '살아남기 위한 말, 살리기 위한 말'에서는 주로 '말'과 '글'을 가지고 먹고 사는 문필가와 학자들의 다양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가부장적 언설의 모습을 들여다보려 하였다. 이어지는 박혜란의 <토악질하듯 어루만지듯 가슴으로 읽은 고정희>와 김은실의 <고정희 선생님이 죽었다?>는 그 동안 가장 활발하게 <또 하나의 문화> 동인 활동을 해온, 지난해 봄에 지리산에서 어이없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정희 시인을 그리며 쓴 글이다.
시인 고정희는 단순히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논설과 논문과 기사와 평전 들을 쓴, 폭넓은 글쓰기를 한 문필가였다. 그의 글에는 일상적 삶에서 부대끼면서 모순을 풀어내는 '몸으로 쓴 부분'과 거대한 '진리'를 깨우친 자의 목소리가 압도하는 '머리로 쓰는 부분'이 함께 있다. 만약 타계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집을 짓지 않는 여자에게 가해지는 압력과 가지지 못한 사람을 계속 서럽게 하는 체계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에 대해 열심히 쓰고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독신녀'와 '지사'로서 양분되어 있는 자신의 삶을 통합해 가는 새로운 글쓰기의 장을 열어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