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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화 시집. 어린이의 발상법으로 씌여진, 어른들이 읽기에 적당한 '어른을 위한 동시'. 즐거우면서도 고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흥겹고, 해맑으면서도 음흉한 정유화의 시 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시 60여 편 수록. "...//영명한 몸으로 빛난다/풀잎에 닿으면 풀잎의 눈/풀잎이 영명하게 빛난다/이슬의 문을 열고 들어가/눈 한 번 깜박여 보고 싶어라//..." - <이슬>

시인 정유화(40)의 두 번째 시집이 나왔다. [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천년의시작刊)인데, 시집 제목만 보아도 신선한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경북 선산이 고향인 그는 중앙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88년 '동서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자서(自序)에 서 "호젓한 즐거움과 재미를 맛볼 수 있게 시의 내부를 단장하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 번 시집은 독자들과의 교감을 위해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시가 어려워지면서, 시를 멀리하는 독자들이 많은 요즘, 시를 재미있게 쓴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봄쑥을 뜯어 왔다/부엌에서도 쑥떡쑥떡/마당가에서도 쑥떡쑥떡/(생략)/내 마음에 씨를 뿌린 그녀와 함께/쑥밭이 되도록 한 번 뒹굴어 봤으면 하는/나의 마음도 꿀떡꿀떡"([봄쑥]에서), "봄바람을 화단에 모종하자/바람난 꽃나무들 옷 갈아입는 소리가 낭자합니다/잊혀진 애인의 이름이 꽃나무에서 웃고 있습니다/사촌 누이의 젖가슴을 좋아했던 기억이 꽃나무에서 피어납니다"([봄바람을 모종하다]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시적 재미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시적 자아의 목소리가 동시적 발상, 부연하면 어른이 읽기에 어울리는 동시적 발상(어른을 위한 동시)에서 나오고 있다. 그의 시에서 상큼한 맛을 읽을 수 있는 '자연과의 대화' 역시 동심적 발상의 변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자연과의 대화는 그의 '시창작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장론'과 연계되면서 시정신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몸 속에 장착된 오토바이와 트럭의 엔진을 끄고/봄비가 씻고 간 문장들을 찬찬히 읽어보"([봄바람의 엔진을 타고]에서)던 시인은, "시내 거리를 걷다보면 솎아낼 것이 너무 많지/간판을 좀 솎아낼까/순대속처럼 꽉찬 도로 위의 차량들도 좀 솎아내야지/(생략)/그러나 이 숲에서는 솎아낼 것이 없어서 고민/산새를 솎아내면 작은 나무의 귀가 서러워/작은 나무를 솎아내면 벌레들이 불쌍하고/벌레들을 솎아내면 꽃잎과 열매들이 서러워/(생략)/어쩌지 솎아낼 것이 마뜩찮으면 나를 솎아낼 수밖에."([숲 속에서 자라는 문장2]일부)라고 말하고 있다. 자연과의 대화에서 시인이 깨닫고 있는 것은 서로 모순된 존재들이 공존하고 있지만, 그 공존에 의해 삶 자체가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 밖의 긴 끈을 들고/길이 숲 속으로 걸어오고 있다/길, 지워버리면 그리울 것 같고/품속에 거두어 넣자니 성가실 것 같"([숲 속에서 자라는 문장4])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시정신은 노장(老莊) 사상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는 노장과 닮아 있으면서 그것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 은근히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섹시한 여자들을 보면/풍매화처럼 꽃씨를 뿌리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육체의 문장"([시퍼렇게 멍든 육체의 문장])이 그러하고, "노트 한 장을 넘기자 이번에는 시를 한 포기 정원에 심는 한 여인이 나오고 있다. 나, 그 여인을 사모한다. 그 연인의 몸에 나를 심고 싶어라. 불륜이면 어떤가"([깊어 가는 겨울 속의 청산우체국]에서)가 그러하다. 그의 청산우체국에서 부치는 편지들은 재미와 즐거움을 주지만, 그에게는 일종의 고통이 따르고 있다. 모순되는 삶을 통합하기 위해서 언제나 새로운 문장들을 찾아 나서야 하니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정유화의 시세계는 즐거우면서도 고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흥겹고 해맑으면서도 음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