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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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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조용히 되살아나는 생의 풍경들 - 윤대녕 여행 산문집 출간~!
인간 존재의 시원을 파헤치는 섬세한 글쓰기로 90년대 한국 문학의 영토를 확장한 작가 윤대녕의 첫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작가의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품고 있는 깊은 사연들, 기호들... 이들과 어울려 펼쳐지는 길 위의 사색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하다.

오래 전부터 산문집을 한 권 갖고 싶었다. 텍스트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누군가 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을 써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끔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일기식으로 드문드문 써놓기는 했으나 책으로는 낼 수 없을 정도의 더딤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다 올해 중앙일보 인터넷(joins.com)에서 ‘아무 거나’라는 전제를 달고 청탁을 해왔다. 정말로 기분이 좋은 청탁이었다. 얼마나 사람을 편하게 하는 말인가. 또 이쪽을 믿고 있단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물론 그렇게는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고민을 하다 나는 기존의 에세이나 산문집과는 좀 다른 형태의 글을 쓰고 싶어 우선 편지투의 문장을 택하기로 했다. 또 소설은 아니더라도 전체 흐름이 이어질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결국 한 여자와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에세이든 산문이든 자유롭게 써나가기로 했다. 중앙일보 인터넷과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지난 3월부터 12월까지였다. 그러나 10월에 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하고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헤어질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관계의 강약 조절에 실패한 것일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무릇 기간을 정해놓고 사람을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녀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연재 당시의 제목 그대로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로 책 이름을 정했다. 쓸 때는 이래저래 꽤 부대낀 셈이었는데 교정을 보면서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뭔가 독특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그 동안 내가 써온 소설의 모티프나 풍경들이 글 속에 드문드문 비쳐나오는데 그것도 매우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열대의 바람처럼 살아온 남루한 한 사내의 반생이 눈에 어른거리기 때문일까. 안에 들어간 사진은 여기저기 짐을 끌고 다니면서 찍은 것들이다. 아마추어 수준이어서 상태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잊었던 그 순간들의 분위기를 좀더 잘 전달할 수 있잖냐는 생각에 무릅쓰고 집어넣었다. 다시 연탄과 석유와 김장김치와 따뜻한 창문이 그리운 계절이다. 헤어진 사람아, 갑자기 밤에 눈이 내려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부디 잘 버티며 생을 걸어가다오. (2000년 초겨울 윤대녕)

목차

1. 열대 정원으로부터
2. 비지스의 ||^Holiday||^
3. 사슴이 있는 쪽으로
4. 봄이라는 유령
5.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생맥주를
6. 낙산에서 폭설을 만남
7. 베투벤의 피아노협주곡 제5번 <황제> 2악장 듣는 법
8. 당신과의 저녁식사 1 - 회먹기
9. 당신과의 저녁식사 2 - 초밥 먹기
10. 오월의 제주에서 1
11. 오월의 제주에서 2
12. 오월의 제주에서 3
13. 때로 우리가 침묵해야 하는 까닭
14. 일본 기행 1 - 풍경들
15. 일본 기행 2 - 후쿠시라는 사내
16. 7번 국도 불꽃놀이
17. 우주를 가로질러
18. 나는 기다리고 있다
19. 비 내리는 날은 30번 국도로
20. 닭과 비
21. 흐린 날 큰 나무
22. 중국 여인
23. 열대야의 바다 1 - 갈치
24. 열대야의 바다 2 - 학꽁치
25. 열대야의 바다 3 - 농어
26. 열대야의 바다 4 - 섬들
27. 나와 또다른 여행자들
28. 비치파라솔 체어
29. 백남준의 그림자
30. 30번 국도에서 당신과 잠시 헤어지다
31. 오래된 기억들로부터

본문중에서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허연이란 시인이 쓴 「7월」이란 시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불과 하루 전까지 나는 머나먼 열대에 있었습니다. 날짜 변경선이 도대체 어디에 걸려 있는지 모를 그 후텁한 슬픔의 열대. 떠나오기 전날 밤 저 「7월」처럼 야자수 숲에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랑을 잃고 또 사람을 잊고자 떠나온 열대였습니다. 한 달 동안 저는 필리핀의 보라카이와 인도네시아와 태국의 파타야를 순례자처럼 맨발로 돌아다녔습니다. 급기야 얼굴에 화상을 입고 첫날 묵었던 발리의 첸다나 코티지로 돌아와 이틀을 꼬박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쿠타 해변에서 웬 맨발의 여자에게서 산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열대 코티지(트로피컬 샬레)는 모두 대나무로 지어져 있습니다. 오죽하면 〈뱀부 송Bamboo Song〉이란 노래까지 있겠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대나무 사이사이로 햇빛이 부챗살처럼 틈입해 들어와 침대를 그물처럼 덮습니다. 그 그물에 갇혀 꿈틀거리며 한 달을 열대에서 보낸 것입니다. 때 저는 알았습니다. 절망이란 빛조차도 그물이 된다는 걸 말입니다. 빛의 그물에 갇혀 누군가 정원을 지나는 소리를 듣습니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열대의 밝은 햇빛. 문을 열면 바로 내다보이는 논바닥의 오리떼. 허리 굽은 노인네가 일 년 내내 소를 끌고 오리떼를 쫓으며 논바닥을 갈고 있습니다. 삶은 한편 그러한 것. 파타야로 떠나오기 전날 발리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답다는 타냐롯에 지프를 타고 갔습니다. 절벽 위에 있는 야외 카페 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도미구이에 빈땅이란 맥주를 마시며 장엄한 일몰을 보았습니다. 절벽 아래엔 조그만 섬이 있고 거기 사원이 있습니다. 삼백 년 전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 그곳에 지어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밀물 때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해는 그 섬 너머로 아름답고 장엄하게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동북아에서 온 한 우울한 사내의 묵은 사랑을 붉게 태워 없애며. 돌아온 밤에 줄기차게 비가 내렸습니다. 밖에 버려져 있는 열대 안락의자가 그 비에 젖고 있었습니다. 낮에 웬 아름다운 금발의 여자가 부신 살결을 드러내고 누워 있던 그 의자 위에. 열대에 내리는 비는 체념처럼 혹은 절망처럼 거칠게 쏟아부으며, 아픈 나를 밤새 씻어내며 먼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보니 비는 그쳐 있었고 어제 아침과 똑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논바닥의 오리떼. 끈적이는 진흙 속에서 소를 끌고 가는 노인네. 눈이 멀어버릴 듯한 햇빛. 그때 저는 몇 년 전 사막에 가서 본 햇빛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파타야 해변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마침 송크란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어서 구경도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저마다 귀에 꽃을 꽂고 몸에다 서로 물을 뿌려주며 삶을 축복해주는 의식을 치르는 것을 보며 나 역시 다시 태어나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방콕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승무원 복장을 하고 승객에게 구명조끼 입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스크린에서는 서울의 현재 시각과 날씨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약 여섯 시간 동안의 비행 동안 나는 안경 원숭이 같은 꼴을 하고 윈도 시트에 앉아 있었지요. 선글라스를 끼고 고행이라도 하듯 햇빛 속을 돌아다니다 보니 얼굴이 그렇게 고약하게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과 나는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년 전 어느 비 내리던 날 저녁 광화문 거리를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요.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내 뒤에서 다가왔습니다. 얼결에 돌아보니 감색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당신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습니다. 당신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여 내게 사과의 말을 건넸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그날 인사동까지 걸어가 ‘산타페’라는 찻집에서 당신과 차를 한잔 마시고 헤어졌습니다. 그날 당신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사람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묘한 만남이었고 밤 11시쯤 낙엽이 쓸려다니고 있는 인사동 거리에서 당신과 나는 도로 멋쩍은 타인이 되어 헤어졌습니다. 물론 다시 만날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렇듯 방콕-서울 간 비행기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비행기 승무원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때 만났을 때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지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당신이 갖다준 사탕을 입으로 녹이며 빨간 담요를 쓰고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깨워 일어나니 하늘은 캄캄했고 안경 원숭이에게 밥을 주러 당신이 또 와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당신은 나를 알아보고 후후거리며 웃었습니다. 언젠가 길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졌던 남자라는 것을. 비행기가 착륙하고 내릴 때가 되어 나는 출구에 서서 승객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는 당신 앞에 서서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뒤에는 손에 무거운 가방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당신은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서울은 아직 겨울이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와서 나는 가방도 풀지 못한 채 샤워만 겨우 하고 또 잠이 들었습니다. 내 귀에는 아직도 열대 정원에서 따라온 빗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일 주일 전 하이야트 호텔 바에 앉아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당신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줄곧 입을 다물고 있는 당신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지요. “앞으로 생각나면 가끔 편지를 쓰겠습니다. 답장은 안 해도 좋습니다. 그저 쓰는 겁니다.”오늘은 신촌에 있는 ‘비바’라는 칵테일 바에 가서 혼자 마가리타를 세 잔 마시고 왔습니다. 하이야트에서 당신이 마시던 칵테일입니다. 의외로 독하더군요. 스피커에서는 마침 비지스의 〈Holiday〉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열대 안락의자에 앉아 당신과 그 노래를 듣고 싶군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요. 방콕에 있든지 아니면 하늘에 떠 있든지 그러겠지요. 다시 쓰지요. (열대 정원으로부터)

저자소개

생년월일 1962.05.01~
출생지 충남 예산
출간도서 44종
판매수 10,649권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단국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누가 걸어간다] [제비를 기르다] [대설주의보] [도자기 박물관],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추억의 아주 먼 곳] [달의 지평선] [미란] [눈의 여행자]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피에로들의 집],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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