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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방을 도망친 신랑의 자각의 과정을 통해 본 섹슈얼리티의 정치학을 그린 이제하 소설집. 이 소설은 섹슈얼리티 속에 내재한 권력의 그물망을 걷어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신혼여행지에서 동창들이 모아준 축의금 봉투 속에서 신부와 다른 동창이 껴안고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그 길로 혼자 서울로 올라와 오 년째 행방을 감추고 살아가게 된다. 어느 날, 야바위꾼들한테서 얼떨결에 오심만 원을 주고 사게 된 여자가 '나'의 하숙방으로 찾아오게 되는데….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 열두번째 책으로 이제하의 중편소설집이다. 시대이념의 조류에 얽매이지 않고, '삶을 구속하는 관습적인 규범'과 치열하게 싸우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왔던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순결'에 대한 문제를 통해 한 남성이 관습과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려는 과정을 그린다.


이 작품은 '작가의 말'에서 밝히는 것과 같이 미당 서정주의 시 '신부(新婦)'에서 촉발되어 집필했다고 한다. 시 '신부(新婦)'는 신혼 첫날 밤에 신랑이 신부를 부정한 이라 오해하고 뛰쳐나간 뒤, 오랜 시간이 흘러 신랑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와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신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니, 신부가 초록재와 다홍재로 변해버렸다는 설화를 모티브로 한 시이다. 이 책에서는 신랑 대신 신부가 신방을 뛰쳐나가 버리고, 남자가 시의 신부처럼 초록재와 다홍재로 삭아내리면서 남은 시간을 견뎌내고 깨달아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혼 첫날 밤 신부에게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신방을 뛰쳐나오고, 5년 동안 숨어지내다 얼떨결에 야바위꾼에게 '서례'를 산다. 서례는 스스로 관계망상이라는 병명을 쓰고,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40대의 창녀 '인후'를 만나 그녀의 삶을 대신살기로 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 창녀 행세를 하는 여자.


서례와의 기묘한 동거를 통해 '나'는 점차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던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들과 만나게 되고, 나는 그것들이 빚어낸 풍경에 의해 삶이 구속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관습과 이데올로기들이 만들어낸 풍경의 표면은 "게딱지 같은", "썩고 있는" 불유쾌한 것들이지만, 그 풍경의 안쪽 너머 내부로 들어가면서 '육체의 순결이 곧 정신의 순결'이라는 순결이데올로기의 목소리를 읽고, 스스로와 싸워가면서 조금씩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겨우 서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뒤, '나'는 버리고 온 여자의 아버지에게 사과하러 간 사이 서례는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사라진다. 나는 시 '신부'를 떠올리며 신방색시의 환영을 떠올린다. 작가는 '나'라는 남성을 통해 여성에게 부여된 가부장제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인 '순결강조'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한 방향모색을 위한 점검의 기회를 던진다.

작가의 말


풍경의 내부


해설 : 초록 재와 다홍 재, 그리고 매운 재 / 김혜순

절대로 움츠러들어서는 안돼....저따위 돌의 무게가 무어란 말인가...네 속에 설사 평생을 지고 다닐 거대한 무덤 같은 돌덩이가 엎드려 있다 하더라도 느끼지 않을 수만 있으면 그것은 없는거나 마찬가지다.....해방되라구...껍데기를 벗어버려....자신을 내던져...지금 그러지 못하면 너는 일생 불구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벗어 던지라니까.....그녀를 두들겨 부숴버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