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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소녀들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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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내 이름은 홍순이입니다.
고향은 천안역에서 가까운 대흥동입니다.
열일곱에 집을 떠났고 여든아홉인 지금껏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홍순이입니다!”


-제국과 전쟁, 국가와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가한 폭력과
끊임없이 지속되는 기억의 폭력성에 관한 이야기-


《늙은 소녀들의 기도》는 국가와 개인의 폭력에 희생당한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성폭력에 짓밟힌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감정을 상실한 엄마와 그 트라우마에 짓눌려 사는 기자 하림, 미군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한 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끝내 자살한 기지촌 여성 정순, 70년대 외화벌이를 위해 오키나와섬으로 보내졌다가 고된 노역과 성폭행을 당한 채 돌아와야 했던 민자 할머니,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강제납치되어 만주로 끌려가 ‘위안부’로 살아야만 했던 순이 할머니. 국가과 개인의 폭력, 그리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지속되는 기억의 폭력 속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한데 얽혀드는 소설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절절한 토로이자 동시에 어느 시대에나 소수자로서 부당한 폭력을 당해왔던 여성에 대한 서사로 꽉 채워진 이야기이다.
여기자 하림은 미군에게 폭행당한 기지촌 여성에 대해 취재하다 윗선의 압박과 공권력의 방치, 세상의 무관심 앞에 좌절하고 만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지 이십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폭행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엄마의 입원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다가 병원 옥상에서 민자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함께 맞담배를 피우며 하림은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된 오키나와 노역에 갔다가 상흔을 입은 할머니의 사연을 듣게 되고, 할머니는 하림이 정의감 강한 기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몇 차례의 옥상 회동을 통해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을 때, 민자 할머니는 자신이 돌보고 있는 순이 할머니에게 하림을 데려간다. 그리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순이 할머니의 수첩과 간절한 부탁을 떠안게 된다. 그녀가 건네준 수첩에는 ‘위안부’로 살았던 그 지옥 같은 나날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었고, 순이 할머니는 자신을 학대한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데려와달라고 청한다. 하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자신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 중 하나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악과 불의에 분노하는 한 인간으로서 그 부탁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일본어에 능통하고 자신을 연모하는 후배 기자 기찬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진실을 인정하고 사죄를 구할 수 있는 자를 하나라도 찾기 위해 분투한다. 과연 그녀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늙은 소녀들의 기도는 응답받을 수 있을까.
《늙은 소녀들의 기도》는 이야기 전반에 아로새겨진 폭력과 상처로 그득하다. 그 아픔이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고, 그런 아픔을 치유해주기는커녕 여전히 후벼 파려는 이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사죄는커녕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자발적인 성매매라 우기는 일본의 열성 우익들은 물론이고, ‘위안부’ 문제를 여성의 도덕성 문제로 재단하려는 극우주의자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이야기들이다. 또 피해자였음에도 오히려 세간의 눈총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지를 전전해야 했던 여성들의 서사를 통해 소수자에 대해 위선적인 사회적 편견에 대해서도 고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마음이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고 읽다 보면 분의가 치밀어 오르는 이야기이지만, 소설로서의 역할에 충실해 전범을 찾아가는 서사가 독자들의 관심을 내내 끌어당긴다. 읽다 보면 상흔 때문에 더는 자랄 수 없는 ‘늙은 소녀들’의 기도가 부디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될 것이다.
《늙은 소녀들의 기도》는 주제의 진실성과 서사의 깊이를 인정받아 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 작가의 말

《늙은 소녀들의 기도》는 소수자로서의 여성에 관한 또 한 편의 기록이다. 제국과 전쟁, 국가와 가부장제가 용인한 폭력이 여성의 신체를 얼마나 잔악하게 유린할 수 있는가를 대변하고 싶었다. 나아가 제국과 전쟁 이후에도 지속되는 기억의 폭력성을 묻고 싶었다. 폭력은 물리적 가해가 끝나는 시점에 소멸된 것이 아니다. 늙은 소녀들의 삶에 폭력은 중첩되어왔을 뿐이다.

목차

늙은 소녀들의 기도
작가의 말

본문중에서

여자를 바라보는 맞은편 남자의 눈에서 화기가 느껴졌다.
(/ 첫 문장)

“그럼,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정의사회를 위한 구호를 외쳐 달라는 것도 아니고, 미국과 전쟁을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까닭 없이 때린 놈 잡아다가 벌 받게 하자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니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래.”
사실 부장이 어찌해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매뉴얼대로 기사를 선별하고 선택해서 적시에 내보내면 그만이었다. 내 분노와 정의가 하늘을 찌른다고 해도 선배인 부장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기사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 나는 끝까지 부장에게 매달렸다. 부디 그의 죽어 있던 용기가 부활하거나 그가 실수를 저질러 내가 쓴 기사를 그대로 내보낸다면 만세를 부를 일이지만 그런 일은 내가 복권에 맞을 확률보다 더 낮았다.
(/ p.17)

“오키나와로 나갈 때는 요란하게 배웅을 해주더니 돌아오니까 아무도 반기지 않더라. 하긴 누가 쳐다볼까 무서워서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중략)… 그렇게 다시 돌아간 고향인데……. 엄마는 저녁 밥상을 차려주면서 낡이 밝기 전에 다시 서울로 떠나라고 말씀하셨지.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오키나와에서 있었던 일들이 첩첩산중 정선까지 흘러들어 남부끄러워 못 살겟다고 하더라. 태평양을 건너온 소문이 무지와 만났으니 다시 산을 넘어 집을 떠나라는 소리였다. 그 소릴 들으니 참담하더라. 굴욕과 능욕도 모자라 참담함까지 당하고 나니 밥숟가락 쥔 손이 저절로 풀리더구나. 상처투성이 새끼를 보듬지 않고 내치는 어미라니! 그 밤 엄마를 한참 노려보다가 집을 나왔다. 사람에 대한 내 그리움은 거기까지였다.”
(/ pp.54~55)

“다 묻고 조용히 눈 감으려고 했어요…….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겠지요. 그런데 민자가 그 또한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나만 살다 가는 세상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나만 입 다물고 살다 죽으면 끝인 세상이 아니라고,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내라고 했어요.”
순이 씨가 내 손등을 가만가만 두들기며 말했다.
“제가 변변치 않은 기자라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아주 오래전에 겪은 일인데, 죽기 전에 세상에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 p.59)

“내 이름은 홍순이입니다. 나이는 여든아홉이고 고향은 천안역에서 가까운 대흥동입니다. 천안역 마당에 높은 콘크리트 탑과 커다란 측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왜놈들이 지은 이층집도 있었고 자전거도 있었고 시커먼 자동차도 있었습니다. 나는 양대 여학교에 다녔습니다. 내 꿈은 나쓰메 소세키 같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케시는 참 훌륭한 선생님이었습니다. 열일곱에 집을 떠났고 지금껏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천안은 능수버들이 많습니다. 엄마 이름은 양순남, 아버지 이름은 홍백기입니다. 나는 홍순이입니다.”
…(중략)…
“자신이 누구라는 걸 잊지 않으려고 가끔 저래.”
(/ p.60)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뻘건 눈으로 그놈들을 향해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다른 애들 또한 나와 똑같은 형국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놈들의 행태는 멈추지 않았다. 열일곱 내 인생이 어딘지도 모르는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희뿌연 대기를 타고 굵은 눈송이가 내게로 쏟아졌다. 나는 멀리 우우거리며 달려오는 짐승들의 소리를 들었다. 놈들의 광폭한 허기가 내 놈을 관통하며 모든 기억을 끊어놓았다. 쪼개지고 찢어진 몸이 마침내 폭발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갈래머리 여학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양조장집 고명딸 순이는 겨울 벌판 한가운데서 승냥이들의 달콤한 먹이가 되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정지된 느낌이었다.
(/ p.87)

“어두운 역사라 묻어버리고 싶다는 거야? 보수적인 남자들 더러는 이 문제에 대해 부끄럽거나 망측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자신들의 어머니가 당한 일이고 딸들이 당한 일이여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면 개인이 아닌 역사와 국가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는 걸까? 정치적으로 보자는 게 아니라 같은 인간에게 당한 짐승 같은 폭력을 얘기하는 거야.”
“선배, 작정한 사람처럼 왜 그래? 어제오늘 일이 아니잖아.”
“너처럼 생각하는 인간들 때문에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는 거야.”
(/ p.145)

“여기 있어!”
나는 떨고 있었다. 종이에 적힌 글자일 뿐인데, 칠십 년 전의 무라타 다케오가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곱슬머리와 짙은 눈썹, 눈썹 바로 아래 검은 점이 혹처럼 박혀 있는 사람이 무라타 다케오였다.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시뻘건 담뱃불로 순이 씨의 사타구니를 지져댔던 그가 맞을 것이었다. 좃토! 라고 소리치며 그녀에게 침을 뱉고 온갖 패악을 부렸던 무라타 다케오. 이름을 확인했을 뿐이고 죽었을지도 모르는 유령 같은 그에게 나는 칠십 년 전의 순이 씨처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p.227)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 남편은 그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남편은 짐승이었습니다. 하느님도 용서하지 못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남편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대신해 죽을 때까지 당신들에게 사죄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카이 마사토가 아니었고, 나는 순이 씨가 아니었다.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그녀와 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폭력의 책임은 사카이와 순이 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의 문제이기도 했으며 우리와 그녀의 문제이기 전에 사카이와 순이 씨의 문제였다.
(/ pp.242~243)

저자소개

생년월일 1961~
출생지 충남 당진
출간도서 7종
판매수 359권

2008년 [실천문학]에 단편소설 [도망]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도베르는 개다], 장편소설 [불의 여신 백파선], 산문집 [에미는 괜찮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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