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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 : 윤고은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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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는 단지 마당을 빌려준 것뿐이었다"
마당에 감춰진 수상한 이야기들, 이곳의 출구는 어디인가.


윤고은의 세번째 장편소설 [해적판을 타고]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래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을 출간했다. 작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면서 사회문제를 환기시키는 힘에 더해 위트 있는 문장력과 재치 있는 서사를 꾸준히 선보이며 문단과 독자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 작품은 YES24 블로그를 통해 2017년 1월부터 총 3개월간 독자들과의 호흡 속에서 인기리에 연재를 마친 바 있다.
[해적판을 타고]는 한 가족의 마당에 유해 폐기물이 묻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해결할 수 없는 미로에 갇힌 듯 점점 마당 밖의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가는 가족의 이야기에 주목함과 동시에, "이게 저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닌 거 아니에요?"라며 의문을 던진다. 더불어 어른들의 삶과 대비되는 ‘중2’ 채유나와 뒤뒤의 이야기가 작품의 다른 한 축으로 등장하면서 재난에 가까운 상황에 묘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내 발아래 묻힌 유해 폐기물, 이곳을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 유나와 그의 가족은 폐기물의 악몽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출판사 서평

유해 폐기물을 발밑에 묻은 한 가족
무책임한 말들과 흉흉한 소문에 갇힌 사람들


잔꽃초등학교 5학년 채유나의 가족은 마당에서 채소를 기르고, 채송화를 심고 가꾸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센터’라고 불리는 아빠의 회사에서 사람들이 비닐자루들을 싣고 와, 이들의 집 마당에 자루들을 파묻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 집 마당에 묻는 것인지 수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불길한 징조와 불안한 예감만을 남긴 채 폐기물들과의 동거가 시작된다.

어차피 인간의 나이란 한 자리, 두 자리, 그리고 드물지만 세 자리 숫자, 그 세 종류 중 하나일 테고, 벌써 내 나이는 두 자리로 진입한 지 오래였다. 어른이 되어 하는 일이란 게 기껏 다른 사람 집에 잿빛 자루를 묻거나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전조 증상만으로 충분히 얼룩져 본편은 시작할 지면도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 p. 97)

유나의 엄마는 잡지 촬영 등을 준비하며 마당에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행동하려 하지만, 오히려 동네에는 집 마당에 대한 불길한 소문만이 무성해질 뿐이다. 마당 아래 자루를 가져가겠다던 아빠의 회사에서는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말로만 약속을 반복한다. 미성년인 유나에게 아직 시작되지 않은 본편, 즉 어른들의 삶은 남의 집에 수상한 폐기물이나 묻는 것, 불안한 와중에도 자신의 마당을 빌려주는 것 정도의, 기껏 그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 집 마당에서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책임지는 어른은 없는 세계, 말만 무성할 뿐 행동이라고는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이제 막 두 자리 수의 나이에 들어선 유나의 삶까지 물들인다.
가까운 곳에 유해 폐기물이 묻혀 있다는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과연 환상일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우며 현실 사회의 단면을 폭로해왔던 윤고은의 전작들을 떠올려봤을 때 우리 가족의 일을 모른 척하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은 상상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사건들만 간단히 꼽아봐도 이러한 상황은 이미 소설적 상상이 아닌 현실이다. 재난에 가까운 현실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서 [해적판을 타고]는 시작된다.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이야기
위안을 주고받는 존재, 희망을 상상하는 사람들


유나의 집에 자루를 묻으러 왔던 아빠의 회사 동료, 일명 ‘루’는 유나에게 [어린왕자] 해적판을 선물한다. 정식으로 유통되기 전에 출판된 책이기에 때로 책의 내용은 정식 판본과 다를 수도 있다고 ‘루’는 설명한다. 특히 ‘루’가 선물한 해적판은 마지막 결말이 빠져서 결말조차 알 수 없다.

해적판이란 말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그게 해적이 등장하는 소설인가 했는데, 해적판이란 건 정식 루트가 아니라 어둠의 경로로 출판된 책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루는 이 해적판 [어린왕자]를 중학교 때 읽는 바람에, 나중에 정식 판본으로 [어린왕자]를 읽었을 때 오히려 시시했다고 말했다.
"왜요? 이야기가 달라요?"
"결말이 살짝."
(/ p. 94)

성년의 삶이 무언가를 정식으로 자유롭게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생의 본편, 정식 판본에 가까운 삶이라면, 미성년 시절은 본편으로, 정식 판본으로 다가가는 준비 단계라 말할 수 있다. 즉, 결말이 어떻게 날지 누구도 모르는 해적판인 것이다.
그리고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이 된 채유나의 삶에는 동갑내기 ‘뒤뒤’가 등장한다. 유나에게 뒤뒤는 "진짜 나쁜 놈들이 뒤, 뒤에" 있는 시기에 만나게 된 "뒤, 뒤에 좋은 사람"(p. 176)이다. 본편으로 가기 전 얼룩져버린 유나의 삶에 등장한 ‘좋은 사람’인 것이다. 둘 다 아직 어른은 아니지만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로, 이 둘의 이야기는 ‘마당에 묻힌 폐기물’과 아빠의 회사 사람들로 대변되는 어른들의 세계와 맞닿는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유나의 가족 일을 모른 척할 때 바로 뒤에서 유나의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이 바로 뒤뒤이다. 뒤뒤는 해결되지 않는 가족의 문제로 인해 고립감과 답답함으로 점철되었던 유나의 삶에 위안이 되는 존재로서, 그와 유나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들은 마치 청춘 드라마를 보는 듯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결론을 알 수 없는 해적판 [어린왕자]처럼 두 사람의 에피소드들은 어른들의 세계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결론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 해적판이 고스란히 원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와 뒤뒤에게 그랬다."
(/ p. 203)

결말이 뜯긴 해적판은 그 해적판을 손에 쥔 사람이 그리고 싶은 대로 결론지어질 수 있다. 유나와 뒤뒤 혹은 유나의 가족들에게 남겨진 결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이 해적판처럼 우리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희망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윤고은의 [해적판을 타고]가 보여주는 환상적 세계는 불안, 재난에 가까운 삶이 아니라, 재난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치유를 발견하는 사람들, 그 가능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목차

해적판을 타고

작가의 말

본문중에서

그때 ‘쿵’ 소리가 들렸다. 이제 배롱나무에 매미 껍질 같은 건 더 없는데 말이다. 그건 두 개의 물체가 충돌하는 소리였고, 두 개의 세계가 서로를 겨누는 소리였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였다. 우리 차가 소장의 레인지로버를 들이받은 채 서 있었다. 미숙한 게 있다면 엄마의 운전 실력이 아니라, 이 위협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감싸주던 어떤 보호막이었다.
(/ pp.71~72)

그러나 세상엔 우리보다 더 큰 거인이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개미를 내려다볼 때처럼 거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우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죽어라 달려봤자, 거인이 볼 땐 겨우 한 뼘 정도 이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리 마당이 그대로 실험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거인이 우리 마당에 비소로 오염된 토끼를 넣어놓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는 게 아닐까. 창밖으로 보이는 동그란 달조차 의심스러운 밤이었다.
(/ p.79)

우리 집 바로 앞 동에 루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둘째는 불쾌해했다. 이렇게 이사까지 하고 보니 아무래도 루가 우리 마당에 자루를 들고 왔던 그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게 불행의 시작이라고 믿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모든 건 시작되었고, 시작을 만든 우두머리들은 뒤에, 뒤에 숨어 있었다.
(/ pp.90~91)

아빠가 말했다. 나는 풍력발전기가 도시의 흔한 가로등처럼 멈춰 서서, 일몰 후 두 시간 동안 불을 켰다 끄는 걸 반복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느끼는 차분함이란 모두가 바람에 시달리고 있으니 차라리 공평하다는, 그런 위안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였다. 모두가 이 태풍의 경로에 대해 말하는 동안 우리 가족만 앓고 있는 그 토끼냐 비소냐의 문제가 잠시 휴전을 선언한 것처럼 느껴졌다.
(/ p.152)

말이 먼저 튀어 나가 상황을 견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말이 가장 늦는 경우도 있다. 말보다 앞서 걸어간 것이 더 많은 세계, 나와 뒤뒤가 산책한 건 그런 세계였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 저렇게 말이 떨어지자,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이 일순간 긴장한 듯 도열했다.
(/ p.184)

우리는 이제 각자 마음에 구멍 하나를 뚫고, 저장고를 만들었다. 끌어 올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그 안에 넣고 자물쇠를 걸었다. 물론 도로를 달리는 그 문장처럼, 모든 게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가능성은 늘 있다.
(/ p.204)

소설의 탄생은 별의 탄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안에서 부유하던 먼지들이 서로 만나고 뭉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언제나, 먼지다.

유해 폐기물을 내 집 마당에 묻은 건 소설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 선점한 장면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를 다룬 뉴스에서 방사능 폐기물을 묻은 어느 집 마당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표정도. 그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채로, 길을 걷다 우연히 ‘마당을 빌려주세요’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보게 됐다. 그 현수막은 폐기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었는데, 그 순간 내 안의 먼지들이 합쳐졌고 첫 문장과 둘째 문장과 셋째 문장과,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이 소설을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상한 폐기물을 발아래 두고 자라는 십대.’ 그러나 그게 과연 유나네, 십대, 잔꽃마을만의 이야기일까? 생각해보면 내 집 아래에 뭐가 있는지, 내 산책로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책이 되기까지 애써주신 문학과지성사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 소설을 일주일에 두 번씩 연재할 때, 3+1+3으로 한 계절을 함께 통과했던 독자들께도 감사드린다. 참고로 3+1+3이란 사흘 쓰고 하루 쉬고 또 사흘 쓰는 방식을 말한다. 그 결과 일주일은 7일이라기보다는 3+1+3의 합이 되어버렸다. 3+1+3은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한 조합이다.

이제 책으로 마주하게 될 독자들께도 반가운 마음을 전한다. 언젠가 카페에서 내 책을 읽는 사람을 보고는 너무 설렌 나머지 그 카페를 뛰쳐나간 기억이 있다. 폭발적인 즐거움으로 팽창했다고나 할까? 『해적판을 타고』와도 그런 식의 만남을 꿈꿔본다.

어떤 글은 쓰고 나면, 창작물이라기보다 되찾은 유실물 느낌을 준다. 이 여섯번째 책도 그렇다. 그게 어느 부위에 필요한 것인지는 몰라도, 오래 찾았던.

2017년의 한 번뿐인 어느 오후 _ 윤고은
('작가의 말'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80~
출생지 서울
출간도서 24종
판매수 10,623권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 『해적판을 타고』가 있다. <한겨레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대거상 번역 추리 소설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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