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조정래, 오한숙희, 신경림, 박정자, 이현세 외 12명이 전하는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회고록. 자식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자신을 버리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숨겨진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그분들이 살아온 4,50년대의 생생한 삶의 풍경을 깊은 이해와 통찰력으로 그려내었다.

■ 때로는 강인한 나무처럼, 때로는 질박한 들꽃처럼 살았던 내 부모의 삶, 사랑 그리고 꿈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법일스님의 모델이었던 소설가 조정래의아버지.
일본에 가 있던 아내와 아들들에게 사흘이 멀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엽서를 띄웠던 이중섭.
시대를 뛰어넘는 진정한 여성해방주의자였던 여성학자 오한숙희의어머니.
역사학자 이이화의 아버지,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생.
위당 정인보 선생에 대한 사랑과 존경으로 한평생을 살았던 정양완 교수의 어머니.
그리고 소설가 신경림, 연극인 박정자, 만화가 이현세와 박재동, 작가 김영현, 서울대 명예교수 정진홍, 변산공동체를 이끄는 철학자 윤구병의 아버지와 어머니......

열두 편의 글이 각기 다른 빛깔로 뿜어내는 삶의 모습을 만나는 재미가 가득한 이 책의 제목『엽서로 그린 그 진한 사랑』은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떠나온 후 일주일에도 몇 번씩 엽서를 띄워 사랑을 전했던 아버지 이중섭을 추억하는 이태성의 글제목이기도 하다.

화가 이중섭의 아들 이태성의 글에서는 이중섭이 일본에 건너가 있던 그의 아내 이남덕과 그의 두 아들에게 띄웠던 사랑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문화학원이라는 곳에서 공부하다가 그의 어머니인 이남덕(일본명 : 야마모토 마사코)을 만나 신분의 차이와 민족의 다름을 극복하여 사랑을 이루었다. 전쟁의 와중에 어머니가 심한 영양실조로 결핵에 걸리는 상황에 이르자 아버지 이중섭은 그의 가족을 일본으로 보낼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편지와 엽서를 통한 그리움과 절절한 사랑이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일본으로 향하게 된 것. 이태성은 아버지 이중섭이 어머니와 자신에게 띄웠던 편지의 내용을 소상하게 옮겨 적어놓았다.

_글 싣는 순서
서문_신경림
이태성 엽서로 그린 그 진한 사랑
박재동 진포동 만화방의 의로운 무사
오한숙희 키작은 여성해방주의자
신경림 술과 마작보다 더 좋아한 것
이이화 오줌노는 꿈에서 깨어보면
박정자 어머니의 비취비녀를 생각하며
조정래 태백산맥 속의 법일스님
윤구병 머금은 눈물과 억누른 혈기
이현세 고등어와 크레파스
정영완 나란히 묻어드린 또 하나의 관
김영현 사나이 대장부의 눈물
정진홍 그 사나이의 눈물
이 책에 쓰인 글, 글이 쓰인 시기, 일러두기

아버지 이중섭이 세상을 뜬 것은 내가 일곱 살 때였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엽서를 통하여 그 존재를 확인하고는 했다. 아버지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아버지의 정신이 엽서에 쓴 글과 그림 하나하나에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또 보면서 자랐다. "내 사랑하는, 날마다 보고싶은 태성이 잘 있었나? 아빠가 있는 서울은 서늘해서 그림 그리기에 아주 좋단다. 모두하고 사이좋게 그리고 튼튼하고 용감하게 하고싶은 것을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아빠가 너희들이 있는 신주쿠로 갈 테니... 형하고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는 태현이와 태성이가 게와 물고기와 놀고 있는 그림을 그렸단다. 아빠 중섭" (p.24) _ 이태성

아버진 무서웠어요. 새파란 양복, 칼날 같이 줄 세운 바지, 활처럼 휘어 앞으로 내리꽂힌 머리칼, 송곳 같은 코, 작은 키. 내가 할아버지 댁에 있을 때에 어쩌다 한번 오시면 “아부지 오시능교?” “오냐.” 그걸로 끝나는 아버지. 나는 일학년 솔반, 아버진 오학년 달반 선생님이었어요. 내가 준비물인 칼을 안 가져가자 우리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한테 돈 얻어 사와라” 하셨을 때, 그때 말없이 십 원 꺼내주시던 아버지. 몹시 무서웠어요. 아버지와 선보는 날 어머니는 ‘찬바람이 쌩쌩부는’아버지 곁에서 ‘저 찬 마음을 내 정성으로 녹여보리라’하셨다지요. 말 한마디 틀리게 하는 일 없고, 행동거지 하나 흠잡을 데 없던 전형적인 선비, 영락없는 딸각발이 샌님이던 아버지. 그래서 이권 얽힌 복잡한 집안일도 아버지가 하시면 아무도 말이 없었지요.(pp.30-31) _ 박재동

“이렇게 이쁜 딸들 얻느라고 결혼했었다고 생각해라. 애들은 에미가 건강하면 절로 건강해지는 거니까. ‘불쌍하다’는 생각도 할 것 없고 남의 집과 비교해서 기죽을 것도 없어. 이제 너는 너 하고픈 일을 마음껏 하면서,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 도와주면서 한번 멋지게 살아봐. 그러다 또 너의 진짜 짝을 만날 수도 있는 거구.” 남들은 이혼 얘기가 나오면 친정어머니가 먼저 절반은 죽여놓는다는데 나의 어머니는 일상생활 면에서나 정신적으로 나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셨다. 생물학적인 모녀관계를 넘어서 같은 여자로서의 유대를 느끼게 하는 어머니가 얼마나 계실까? 어머니께서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요년아, 에미가 육신이 멀쩡해서 애라도 봐주니까 오래 살라고 하지, 병들어서 누워봐라. 그때, ‘저 늙은이 왜 안 죽나’ 소리나 하지 말아라.” 웃는 얼굴로 다가올 날의 상황에 미리부터 쐐기를 박으시는 우리 어머니 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을까? (pp.59-60) _ 오한숙희

나는 야산선생의 여섯째로, 다리가 비비 꼬인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그러고 보면 나는 뱃속에서부터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당신의 아들로 태어난 일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모를 일이로되 어떻게 된 위인이길래, 배냇아이까지 영양 실조에 걸리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뱃속에서부터 허약하게 지냈기 때문에 이 아이는 낳자마자 온갖 병치레를 해야만 했다. 쬐그만하고 빼짝 마른 꼬락서니에 병치레만 해대니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말은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다 한다. ‘야산선생’은 아들 이름까지도 주역의 괘를 던져 지었는데 내가 얻어 걸린 괘는 ‘이(離)괘’였다. 거기에다가 돌림자를 붙이고 성까지 얹어놓으니 ‘이이화’가 되었다. 이름이 이래서 어려서는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고 커서는 여자로 착각한 일선 군인 아저씨로부터 팬래터를 받기까지 하였다. (p.83) _ 이이화

나는 무대 위에서 어머니 흉내를 많이 낸다. 사람들은 내 연극을 보고 울고, 웃고 박수를 보내지만 나는 ‘어머니의 몸짓’을 연극속에 재현해 내는 것뿐이다. 나는 어머니의 ‘감수성’과 ‘서정’ 그리고 ‘집요함’을 안다. 나는 그저 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특별함을 물려받았다. 동물적인 후각, 때로 사람들을 구석으로 모는 듯한 강한 목소리, 삼십 년이 넘도록 독한 분장을 해도 트러블 한번 일으키지 않는 도화지 같은 피부, 기쁠 때 기뻐할 줄 알고 슬플 때 슬퍼할 줄 아는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감수성까지. 어머니는 강한 분이셨지만 퍽 드라마틱한 성품을 지니셨다. 어느 한 순간 슬픈 생각이 어머니를 스쳐 가면 어머니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이고 목이 메었다. 요동치는 감정은 언제나 튀밥처럼 소리를 내며 쉽게 불거져 나왔다. (pp.102-103) _ 박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