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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그림자 : 소설가 이윤기 유고 소설집[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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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이윤기
  • 출판사 : 민음사
  • 발행 : 2011년 01월 14일
  • 쪽수 : 151
  • ISBN : 978893748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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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윤기가 남긴 마지막 네 개의 이야기

2010년 우리 곁을 떠난,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작가인 이윤기의 마지막 단편 소설 네 편을 묶은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이라 불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유리 그림자]는, 일상의 소소함으로부터 올바른 우리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세련된 문체 속 예리하게 담긴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 작가와의 교감을, 작가의 지적을 들어 볼 수 있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출판사 서평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한 작가
이윤기가 남긴 마지막 네 편의 단편소설
빛나는 철학적 깊이와 혜안, 겸허한 아름다움과
정갈함이 빚어낸 이윤기 소설 미학의 절정


2010년 8월 27일, 63세로 타계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윤기”의 유고 소설집 [유리 그림자]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네 편의 짧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이제 소설가 이윤기의 신작 소설을 만나 볼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이기에 보다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노래의 날개] 이후 7년 만의 소설집이자 유고집인 [유리 그림자]는 [네눈이],[‘소리’와 ‘하리’],[종살이], [유리 그림자] 등 네 편의 소설과 함께 작가론, 작품 해설 및 연보를 수록하여 이윤기의 폭넓은 작품세계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이야기꾼은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을 뒤로 한 채 우리 곁을 영영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들은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각인될 것이다. 비록 그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아직은 다 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선사한 이 한 권의 소설집을 통해 마음을 다잡으며 아쉬움을 달래기로 한다.

싱싱한 말맛과 경쾌한 유머, 혜안으로 빛나는 언어의 고수, 거장 이윤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소설가요, 번역 문학계의 개척자인 동시에 뛰어난 명문가이며, 신화 연구가이기도 한 이윤기. 이토록 다채로운 수식어를 몰고 다니는 이윤기의 작품 세계에 대해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이렇게 말했다. “이윤기의 소설은 옹이 진 삶과 옹이 진 세상을 옹이 진 마음으로 고발하는 소설이 아니라, 옹이 진 세상에 대한 긍정으로 마음의 옹이를 풀어 주는 소설이다.” 그렇다. 그는 싱싱한 말맛과 번쩍이는 아포리즘으로, 해학과 재치를 잊어버리는 법 없이, 가혹한 삶에 대한 넉넉한 긍정의 자세를 견지할 줄 알았다. 그렇게 “거친 파도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그 파도 밑에 있는 삶의 깊은 수심을 탐사”했던 이윤기에게 “소설이란 삶의 수심을 알려고 하는 긴 호흡의 자맥질”이기에, 그로부터 “삶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인식을 건져”(문학평론가 이남호)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때려치우고 군대에서 신호나팔수로 복무하다가 자원하여 월남전에 참전하고, 제대 후 건설 공사장을 전전하고, 몇 년간 잡지 기자로 근무하고, 신학대학에 입학했다가 다시 그만두고, 신화 연구에 몰두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종교학과 비교문화인류학 등을 공부하고……. 이토록 풍부한 이윤기의 직.간접적인 삶의 체험들과 인문학적 관심은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웅숭깊게 만들어 주었다. 그로 인해 이윤기의 작품은 소설의 문맥 안에서만 진실인 것이 아니라 소설의 문맥을 벗어나서도 진실인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소소함으로부터 미학적 울림을 이끌어 내다
이윤기는 [유리 그림자]에 실린 네 편의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올바른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삶의 한 단면을 예각화하여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화자의 경험 속에 포괄함으로써 하나의 이야기로 맥락화하는 이윤기는, 사람은 완전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배울 게 있음을 보여 준다.

눈이 마주친 물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먹을거리에 식격(食格)을 부여하는, 자연 발생적인 한 경지”에 이른 아들로부터([네눈이]), 싫은 소리에 진심으로 수긍해 준 후배([종살이]), 삿된 욕망이 인간을 망칠 수 있음을 중학교 2학년의 나이에 이미 아는 딸과 금방 불날 것 같은 긴급한 상황에서 차분하게 대처하는 아내에 이르기까지([‘소리’와 ‘하리’]), “가히 ‘항심(恒心)’의 경지”에 이른 개로부터([네눈이]), 새들의 죽음을 막아 주는, 유리창에 붙은 송홧가루에 이르기까지([유리 그림자]) 이윤기가 삶의 이치를 배우고 깨닫는 대상에는 한정이 없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그는, 사람의 일에는 잔인한 경우도 비정한 세태도 없지 않으나 그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는 여린 마음, 우직한 정신, 순박한 태도 같은 것을 잃지 않는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인간의 모자람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채우려는 노력도 없이 거기에 굴복하는 비굴한 사람들, 모자람을 너무나 당연시하면서 그것을 천박한 욕망의 근거로 내세우는 비열한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결점과 좋은 인간성이 때로는 같은 데서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긴다.

마음을 베일 듯 적확한 언어 구사로 삶의 미묘한 정서나 굴곡을 능수능란하게 포착하여, 예민한 감수성과 세련된 완곡법을 통해 겸허하게 드러내는 이윤기의 소설은 실로 아름답고 정갈하다. 이윤기의 소설이 대체로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를 견지한 화자의 이야기이듯, 어느덧 그의 이야기를 대하는 독자 역시 작가와의 따뜻한 교감을 통해 배울 준비가 되었다. 독자들은 “정신이 번쩍” 드는 한순간의 빛남으로 채워진 [유리 그림자]를 읽으며, “길을 잃음을 통해 내가 얻어 낸 길이 지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목차

네눈이
'소리'와 '하리'
종살이
유리 그림자

부록

작가론

호르항을 찾아서_ 정영훈(문학평론가. 경상대 국문과 교수)

작품 해설
멘토의 문장_ 백지은(문학평론가)

작가 연보

본문중에서

동구 밖 음식점에 들러 우거지 갈비탕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마을의, 한 집 앞에 묶인 개가 몹시 짖었다. 금방이라도 줄을 끊고 달려올 것 같아 호통을 한 번 쳐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숙어 들 기세를 보이지 않아 돌멩이를 하나 주워 던지기까지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시인 정일근은 쓰지 않았던가? 묶인 개가 짖는 것은 외롭기 때문이라고. 목줄에 묶여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세상의 작은 인기척에도 얼마나 뜨거워지는지 모른다고. 시인 자신도 묶여 산 적이 있다고. 그때 뚜벅뚜벅 찾아오는 구둣발 소리에 그가 질렀던 고함은 적의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불꽃 같은 신호였다고.
집으로 돌아와 개집 앞에 서서야 비로소 알았다. 우거지 갈비탕에서 건져 낸 못생긴 갈비 조각 두 개를 냅킨에 돌돌 말아 왼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전의 그 개는 외로워서 짖었던 것이 아니구나.
마음이, 젖은 냅킨처럼 후줄근해졌다. 손을 씻으면서 ‘아인슈타인’과 ‘네눈이’를 생각했다. 개가, 몇 천 년 전부터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오래 함께 살아와서 사람과 매우 비슷해졌다는 것만 알
뿐이다. 참 많이 비슷하다.
('네눈이' 중에서/ pp.9~10)

어느 날 친구 집에 가서 보니 네눈이가 꽤 무거워 보이는 금 목걸이를 하나 목에 걸고 있었다. 월요일 물가로 내려간 네눈이가 물고 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온 돈푼깨나 만지는 부인네가 그 맑은 물가에다 벗어 놓았다가는 잊어버리고 간 것일 터이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려고 해도 네눈이가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멀리서 보아도 수십만 원짜리는 실히 되어 보이는 금 목걸이였다.
“네가 주워 온 것이니 네가 차거라.”
내 친구는 이러고는 그 금 목걸이를 네눈이 목에다 채워 준 것이다.
개라는 짐승은 거추장스러운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런데도 네눈이는 금 목걸이를 조금도 거추장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 거참 신통하다 싶더라고 했다. 네눈이가 그 금 목걸이를 한 두어 달 차고 다녔지, 아마. 그동안 가난한 내 친구 부부와 네눈이는 마을의 화제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 친구가 네눈이 목에서 그 금 목걸이를 벗겨 몰래 간직했다면 네눈이가 금 목걸이를 주웠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 리 없다. 네눈이 목에다 금 목걸이를 채워 놓음으로써 네눈이가 횡재한 것을 동네방네 알린 꼴이 된 내 친구는 어리석은 사람인가?
두어 달 뒤에 가서 보았더니 네눈이 목에서 금 목걸이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주인이 수소문해서 올라왔더라고…… 그래서, 벗겨서 돌려주었어. 100만 원짜리도 더 되는 물건이래.”
내가 다시, 네눈이가 순순히 벗기더냐고 물어보았다.
“주인이 찾으러 왔다니까 순순히 목을 내밀더라고…….”
여여(如如). ‘다를 것 없이 똑같다’는 뜻일 것 같다. 몸 벗기 전에 열반게 한마디 남겨 주시기를 청하는 제자에게 “여여하구나.” 이 한마디로 게송을 대신하는 스님들이 있다. ‘폼’ 나는 경지가 아닐 수 없다. 내게는, 네눈이 또한 여여한 경지를 터득한 개로 보였다. 주웠으니까 목에 걸고, 주인이 오면 돌려주고…… 가히 ‘항심(恒心)’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 내 친구에게도, 친구의 아내에게도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네눈이' 중에서/ pp.19~21)

행복하게 살고 있는 소녀에게 어느 날 천사가 와서 말합니다.
“착하게 사는 네가 기특하다. 반드시 들어줄 터이니 소원을 한 가지만 말하거라. 딱 한 가지만 말해야 한다. 내일 밤에 다시 올 테니까 잘 생각했다가 소원이 무엇인지 말해 다오. 딱 한 가지라는 걸 잊지 마라.”
소녀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합니다. 하기야, 천사가 소원 한 가지를 이루어 준다는 데 싫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를, 무지하게 예쁘게 만들어 달랠까? 공부를 무지하게 잘하게 만들어 달랠까? 입학시험을 없애 달랠까…….”
그러나 이걸 말하자니 저게 걸리고, 저걸 말하자니 이게 걸립니다.
“……아빠가 돈을 아주 많이 벌게 해 달랠까? 엄마의 체중이 불어나지 않게 해 달랠까? 큰 집을 한 채지어 달랠까? 좋은 자동차를 한 대 달랠까…… 아니, 그러고 보니…….”
소녀는 천사에게 말할 소원을 생각하다가 깜짝 놀랍니다. 소원을 생각하다 보니, 넉넉하고 행복하게 여겨지던 자기 주위가 초라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밤새 고민하던 소녀는 천사가 나타났을 때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맙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약속을 거두어 가셔요. 지금이 좋아요. 행복해요. 천사님께 말씀 드릴 소원을 생각하다 보니 제가 막 불행해지는 느낌이었어요. 덕분에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처음에는 천사님이 이루어지게 해 주겠다고 한 약속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속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심술궂은 약속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약속을 거두어 가셔요.”
나는 이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면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원이 없는 삶, 더 바랄 것 없는 삶이 반드시 양질의 삶일 리야 없겠지만, 삿된 소원, 삿된 꿈이 우리를 누추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아이들 앞에서는 장난으로라도 복권 같은 것을 사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결혼 전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결혼하기 전의 일로 기억한다. 수도 앞의 바구니에 빨랫감을 내놓았더니, 빨랫감을 물에 담그기 전에 내 바지의 주머니를 뒤지면서 어머니는 그랬다.
“나는 네 바지 주머니 뒤질 때마다 아슬아슬하다. 복권 같은 것 툭 튀어나올까 봐.”
내 딸은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어머니의 경지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소리’와 ‘하리’' 중에서/ pp.42~44)

숲 속에서 길을 잃는다. 참 난감한 노릇이다. 하지만 ‘길을 잃음’은 ‘길을 얻음’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든다지 않는가? 잃음을 통해 내가 얻어 낸 길이 지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거의 날마다 길을 잃고 헤맨다. 하지만 내가 이로써 지도를 그려 낼 수 있을지 그것은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종살이' 중에서/ p.55)

“진정한 자유가 어떤 것인지 주말이면 확실하게 깨닫게 될 테니 주중에는 내 집에서 종살이를 해 보지그래?”
“형님은 지금 저의 호승심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골프 치고 다니는 게 싫은 겁니다.”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앓으면서도 치과에 갈 수 없었다. 가서 그 친구 앞에 눕기가 싫었다. 다른 치과에 가면 되는 일이기는 하다. 나에게는 치과 의사 친구가 여럿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치과에 갈 수가 없었다. 내가 다른 치과를 찾아간다는 일이 내 후배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싫었지만 상처를 주고 싶을 만큼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치과에 가지 않고 버틴 1년 동안 내가 한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급기야는 양쪽 어금니가 솟아 아래윗니를 맞출 수 없었다. 씹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고도 며칠을 유동식으로 버티었다. 소문을 들었던지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두 차례나 걸려 왔다.
“형님 뭐하세요? 빨리 치료받으러 오시지 않고?”
못 이기는 척하고 갔다. 아니다. 자복하는 마음으로 갔다. 나는 고통으로써 그 친구에게 저항했던 셈이다. 나의 고통으로써, 골프 치는 그 친구를 벌하고 있었던 셈이다. 견딜 수 없이 미안했다. 나는 사죄하는 심정으로 치과 병원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마취당하고 이를 뽑히고 돌아섰다. 그런데 나의 시선이 그 친구의 발목 근처를 어른대었던 모양이다. 그 친구가 말했다.
“각반 찾으세요? 에이, 1년 전에 벗어던졌어요. 자유가 어떤 것인지 주말이면 확실하게 깨닫게 될 테니 주중에는 내 집에서 종살이를 해 보지그래? 형님이 하신 이 말씀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사람의 숲 속에서 길을 자주 잃는다. 역시 난감한 노릇이다. 하지만 지도가 그려지고 있다. 아주 느리게, 그리고 희미하게.
('종살이' 중에서/ pp.58~59)

우리 집은 산중에 있다. 산중이어서 새들이 참 많다. 그런데 그 새들이 자주 죽는다. 참새, 멧새, 어치 같은 새들이 자주 죽는다. 잘 닦여 거의 완벽하게 투명한 거실과 서재의 판유리 때문이다. 쿵 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면 판유리에는 거의 예외 없이 새의 깃털이 소복이 묻어 있고 바닥에는 죽은 새가 떨어져 있다. 많은 새들이 판유리에 비친 숲을 진짜 숲으로 오해하고 날아들다 희생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작은 새들이 천적인 포식자들에게 쫓길 때 자주 일어난다.
어찌할 것인가?
새들의 주검 앞에 서면 청마 유치환의 시 「춘신(春信)」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파진다.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코 놀다 가나니
적막한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나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늦은 봄, 무심코 뜰을 내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리 탁자의 그림자를 처음 본 것이다. 뜰에는 내가 3년 전에 사들인 투명한 유리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나는 3년 동안 한 번도 그 유리 탁자의 그림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림자가 희미하게나마 있기는 했을 것이나 내 주의를 끌 정도가 못 되었기가 쉽다. 그런데 처음 본 그림자는 제법 선명했다.
이 그림자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밖으로 나가 유리 탁자를 긁어 보았다. 유리 탁자 위에는 송홧가루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봄바람이 불면 산사면에서 구름처럼 솟아오르던 그 송홧가루였다. 아, 송홧가루가 유리 탁자의 그림자를 만든 것이구나, 싶었다.
사물은 그림자가 있어야 비로소 온전해지는구나, 싶었다. 송홧가루는 우리가 짓는 일상의 작은 허물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판유리 창을 닦지 않기로 했다. 심지어는 판유리에 묻어 있는, 부딪혀 죽은 새들의 깃털조차 닦아 내지 않기로 했다. 판유리 창이 흐리면 숲이 선명하게 비치지 않을 터이니. 때 묻어 흐릿해야 새들이 유리를 사물로 인지할 수 있을 터이니. 완벽하게 투명한 것은 어차피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닐 터이니.
('유리 그림자' 중에서/ pp.63~65)

어느 날 한낮에 본 광경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비가 온 뒤였다. 절집 문을 열고 무심코 밖으로 눈길을 던졌더니, 절집 마당에 작은 고지랑물 웅덩이가 보였다. 웅덩이 가장자리로는 노란 테가 보였다. 무엇일까, 싶어서 나가 보았다. 지름 2미터 정도의 얕은 고지랑물 웅덩이였다. 봄철의 송홧가루가 날아와 그 웅덩이 가장자리에 모여 만들어진 노란 테였다. 그 웅덩이에는 노란 송홧가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구름도 있었고 나무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하얀 낮달도 있었다.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참 아름다웠다.
하이고, 중노릇은 안 되겠구나, 싶었다.
다음 날 나는 보따리를 싸서 산을 내려왔다.
한 달 가까이 살았는데도 그 절집은 내 기억에서 지워졌다. 송홧가루가 떠 있던 그 고지랑물 웅덩이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송홧가루가 그 풍경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완성했는지 설명하는 일에 관한 한 나는 난감하다.
('유리 그림자' 중에서/ p.74)

저자소개

생년월일 1947~2010
출생지 경북 우보면 두북동
출간도서 42종
판매수 65,896권

소설가. 번역가. 경북 군위 출생.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학력을 얻고 성결신학대 기독교학과를 수료함. 베트남전에 참가하기도 함.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됨.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종교학 초빙 연구원, 미국미시간주립대학교 문화인류학 객원 교수로 재직했음. 순천향대학교 문학명예박사를 받음. 번역을 생업으로 삼아 『그리스인 조르바』(1981), 『장미의 이름』(1986), 『세계 풍속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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