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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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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 뇌종양으로 일을 잃은 실업자, 하지만 시(詩)로 되돌아간 행복한 시인



시인은 인적 없는 조용한 집에서 배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시를 쓰고 있다. 들려오는 거라곤 마당에 얼기설기 덩굴을 이루며 넓은 잎 활짝 펴고 있는 호박잎, 그 잎에 이슬 굴러가는 소리, 풀꽃에 숨어 찌르르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는 게으른 황소 울음소리뿐. 사람 없는 텅 빈 집에서 덩그러니 혼자 남아 시인은 이슬과 풀꽃과 소와 조우하며 아낌없이 주는 시의 나무 키우고 있다.
정일근 시인은 매일같이 마당으로 출근한다. 아무 일 없이 그는 오로지 시만을 쓴다. 젊은 시절을 기자로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던 그였다. 사람들과 부딪치고 발은 언제나 종종거리며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는 활동 영역이 넒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마당의 한 구석에 앉아 매일을 하루같이 누워서 시만 쓴다. 사연은 이랬다. 오 년 전 뇌종양이 불시에 정일근 시인을 찾아왔다. 길어야 두 달을 살지 못할 거라는 선고를 받았지만 두 차례의 뇌수술을 받고 다행히 그는 회복될 수 있었다. 병과의 싸움으로, 소속된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남루해졌을 때 그에게 남은 건 시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빈 손이 된 자기를 받아준 것은 자연이었다. 시가 고맙고 자연이 고맙기에 정 시인은 자연의 시인으로 남고 싶어했고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정 시인은 매일 마당으로 출근해 자연 속에서 시를 쓴다.


◈ 자연에 대한 사색과 관찰로 깨닿는 삶의 이치


자연을 사랑한 보답이나 받은 듯 정 시인의 시에는 자연을 통해 터득한 이치가 또렷하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잔잔한 사색과 세밀한 관찰의 결과였다. “이름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모든 꽃송이/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쑥부쟁이 사랑>부분) 쑥부쟁이 꽃의 이름을 알고 난 후부터 정 시인의 눈에는 쑥부쟁이 꽃이 자주 눈에 띈다. 이름을 몰랐을 때는 그냥 지나치던 들꽃이었는데 이름을 알고 이름을 부르면서 쑥부쟁이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사랑이 되고 사랑을 하고 난 뒤부터는 쑥부쟁이 그 작은 꽃잎의 잎 잎들을 낱낱이 셀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사랑에 뜨거워진다. 그것은 사람살이의 이치와 똑같은 것이다.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것의 이치를 깨닿는 시. 정일근 시인의 시는 그런 자연에 대한 깨달음이다. “요즘 나의 시적 관심은 자연이다. 나는 무위자연에 숨어 있는 부처의 깨달음 같고, 노자와 장자의 도와 같은 빛나는 시를 찾아내고 싶은 것이다. 자연에서의 은유가 한없이 즐겁기에 나는 오랫동안 이 세상에 머물 것 같다.”

시를 쓴 지 스무 해, 정일근 시인은 시인이란 시와 사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이름이라는 걸 깨닿았다고 한다. 자연과 함께, 시와 함께 한 몸이 되어 오로지 시만을 쓰며 지내는 정일근 시인은 ‘살아 있음’의 의미를 ‘시를 쓸 수 있음’으로 믿고 있는 ‘철저한’ 시인이다. 스스로의 시인됨을 즐거워하며 행복해하는 사람, 정일근 시인이 푸른 풀숲 우거진 은현리에서 일곱 번째 시집을 보내왔다.

목차

시인의 말 / 5

작품해설·그늘의 시학·김춘식/100


제1부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시인(詩人)·13 /
가을의 일·14 /
서리꽃·15 /
저녁·16 /
푸른 물 스며들며·17 /
힘, 둥근·18 /
겨울산·19 /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20 /
날아오르는 산·22 /
물항의 길·24 /
내 귓속의 물고기 한 마리·26 /
사과야 미안하다·28 /
아침의 영광·29 /
어머니 날 낳으시고·30 /
어머니의 그륵·31 /
어머니의 감성돔·32 /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34 /
서늘한 손바닥·36 /
내 마지막 이사는·38 /
목련(木蓮)·39



제2부
은현리 가을에



은현리 가을에·43 /
은현리 천문학교(天文學校)·44 /
식구1·47 /
식구2·48 /
식구3·49 /
자연(自然) 받아쓰기·50 /
여름비·51 /
아침부처·52 /
여름 저녁의 반성·53 /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54 /
쑥부쟁이 사랑·55 /
비단길앞잡이·56 /
아와드 알라·57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숙을 알고 있다·58 /
죄, 새벽에 불 밝히는·59 /
저 모성(母性)!·60 /
그분이 바쁘시기에·61 /
봄, 엄나무 가시 사이 부풀어 오르는·62 /
무제치늪의 봄·63 /
물에게 절을 한다·64



제3부
시창작 강의실에서



돌쩌귀 사랑·67 /
아름다움에 대하여·68 /
사월, 진해만·71 /
흑백다방·72 /
봄날은 간다·74 /
옹관(甕棺) 속의 동해·77 /
고모님의 바다·78 /
마음이 머무는 곳에·80 /
바다, 동쪽·82 /
묶인 개가 짖을 때·83 /
그 개를 위한 변명(辨明)·84 /
영혼의 순도(純度)·86 /
죽비(竹?)·87 /
화포(花浦)에서 꽃을 찾다·88 /
시창작 강의실에서·90 /
교보(敎保)에서 길을 잃다·92 /
가을 전어·94 /
가을 전어를 살리다·96 /
가야금(伽倻琴)·97 /
즐거운 직업병·98


정일근 시인의 연보·116

본문중에서

풀잎 등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에 풀들은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씨앗들을 받아 품으며 그윽하게 깊어진다

뜨거웠던 황도(黃道)의 길도 서서히 식어가고

지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가을 속으로 걸어가면 세상살이 욕심도 무채색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아궁이를 달구어놓아야겠고

가을별들 제자리 찾아와 착하게 앉았는지

헤아려보는 것이 나의 일, 밤이 오면

나는 시(詩)를 읽으며 조금씩 조금씩 쓸쓸해질 것이니

시(詩)읽는 소리 우주의 음률을 만드는 시간

가벼워지기 위해 나는 이슬처럼 무거워질 것이니
(/본문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경남 진해
출간도서 28종
판매수 3,016권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경남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재학 중인 1984년 무크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1987),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1994), [처용의 도시](1995), [경주 남산](1998),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2003), [오른손잡이의 슬픔](2005),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2006), [기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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