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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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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진중권
  • 출판사 : 천년의상상
  • 발행 : 2020년 11월 09일
  • 쪽수 : 296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9119041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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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1. 진중권의 비판의 칼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 ‘대안적 사실’, ‘대통령의 철학’, ‘진보의 종언’ 등 30가지 키워드로 보는 정권의 민낯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마다 언론들의 기사화로 뉴스메이커가 되고 있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그가 정의의 사도를 자임했던 촛불 정권의 타락과 위선을 더 심도 높게 비판하는 책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를 펴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강양구 권경애 김경율 서민 진중권)가 조국 사태부터 2020년 2월까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는 2020년 2월 이후 집권 세력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들’을 파헤친다. 그의 날카로운 비평은 인문적 사유를 바탕에 깔고 현실 문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있어 “날카로운 통찰력”, “냉철한 비판”, “완벽한 글”, “시원시원하다” 등의 찬사와 응원을 보내는 이들이 많지만, 그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은 “변절자”, “극우논객”, “척척석사”라 비아냥대기도 한다.
애초 그는 촛불 정권이라는 긍정적인 환상을 권력이 유지하기를 바랐고, 거기에 협조하려 했다고 〈서문〉에서 고백한다. 그러나 후안무치가 도를 넘었다고 결론 내리고 싸움을 시작한다. 당사자를 도려내 부패를 감추려 한 역대 정권들과 달리 현 정권은 오히려 그들을 끌어안고 아예 그들에게 맞춰 세계를 날조하려 한다는 게 그의 의심이었다.
진중권의 진보 비판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존경하는 노무현 정부 당시 맹목적 애국주의를 조장하는 여권과 대립하며 황우석 신화 깨기의 선봉에 섰고, “누구도 ‘디워’에 관한 반대 의견을 꺼내지 않을 때 이 일에 나서며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정상인가?” 일갈하며 영화 <디워> 비판에 나섰으며, 이명박 정부 때는 <나는 꼼수다>와의 ‘음모론’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와 열여덟 권의 책을 함께한 편집자(선완규)에게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의 〈서문〉은 유독 애잔하게 다가왔다. 이 책의 서문은 조국 사태부터 현재까지의 마음을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문체와는 다르게 담담히 써내려가고 있다.

조국 사태로 진보는 파국을 맞았다. …… 그때만 해도 싸울 생각은 없었다. 이미 황우석·심형래·조영남 사건을 거치면서 대중에 맞서 싸우는 일에 신물이 난 상태. 팔로워 86만에 달했던 트위터 계정마저 닫고 3년 동안 조용히 지내던 차였다. 게다가 이번엔 대중의 뒤에 권력이 있기에 아예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즈음에 낸 책의 서문에 이렇게 쓴 것으로 기억한다. “불의를 정의라 강변하는 저 거대한 맹목적 힘 앞에서 완벽한 무력감을 느낀다.” …… 싸움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고 주변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가방 속을 구르다가 찢어진 사직서를 테이프로 붙여 팩스로 보내고, 정의당에도 아직 처리되지 않은 탈당계를 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직과 탈당을 마치고 10년간 놀렸던 페이스북 계정을 되살려 글 질을 시작했다. …… 최근 세상이 많이 낯설어졌다. 얼마 전 한 가수가 고대 철학자를 불러내 물었다. “세상이 왜 이래?” 그만의 느낌은 아닐 게다.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는 바로 그 물음에서 출발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는가. 사회는 왜 아직 이 모양인가. 정권의 지지자들은 왜 저렇게 극성스러운가. 민주당은 어쩌다 저 꼴이 됐는가. 대통령은 대체 뭐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 '서문'중에서)

2.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 진중권이 이 싸움을 시작한 이유


그는 지금 여기의 시대상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었던 ‘1930년대 독일 사회’ 같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현재의 한국 사회 역시 자기가 속할 진영부터 정한 다음, 거기에 입각해서 참&거짓의 기준과 선악의 기준을 다 바꿔버리기 때문으로 본다. 당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사회 혼란을 잠재우고 경제적 번영과 위대한 독일을 실현시켜주겠다며 국민들을 세뇌했고, 그 결과 집권에 성공해 전체주의 체제를 수립했다. 그들처럼 진영 논리에 매몰된 결과 “한 입으로 두말을, ‘내로남불’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라는 것이다.
거짓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실이다. 진실은 그 자체로 강하다. 아무리 많은 거짓말을 해도, 또 그 거짓말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해도, 어떤 거짓이든 그것은 결코 영원히 유지될 수 없다. 진중권은 바로 그런 이유로 자신의 싸움의 끝을 믿는다. 그가 언론에 글을 쓰기 시작한 때는 2020년 1월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그때만 해도 분위기는 무서웠다고 한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면 속으로 긴장부터 해야 했다는 것이다. 말을 잘못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의 페이스북 글에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눈치를 봐야 했던 시절 우연히 생각이 같은 이를 발견하면 마치 우글거리는 좀비들 틈에서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고도 했다. 무섭고 외로웠던 시절을 그들 덕에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이다.

랭보는 시인을 ‘보는 자(le voyant)’로 규정한 바 있다. 논객도 다르지 않다. 그의 사명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직하는 데에 있다. 논객은 나팔수가 아니라 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심오한 형이상학적 진실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져야 한다. 정론(政論)의 임무는 ‘보는 자’의 눈으로 본 것을 문학적 언어로 분절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는 데에 있다. 여당 지지자들은 나를 ‘극우 논객’이라 부르나, 예이츠 시 속의 아일랜드 비행사처럼 “나는 내가 맞서 싸우는 그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고, 내가 위해서 싸우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한쪽의 비난이 나를 슬프게 하지도, 다른 쪽의 환호가 나를 기쁘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할 때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 '서문'중에서)

3. ‘진중권 스타일’에 주목한다
- 단검 같은 글, 인문학과 현실의 찐한 랑데부


2019년 8~9월경, 편집자는 그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테라스에서 커피 한잔과 담배 한 개비를 나누며 나에게 물었다. “나 어떻게 해야 할까?” 사적인 인연과 공적인 판단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공적 판단으로 사적 인연을 끊기는 매우 어렵다. 결국 그는 공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했고 편집자에게는 그런 그의 결단이 매우 크게 보였다. 이후 그의 페이스북 글과 매주 연재하는 글에서 이전의 ‘논객 진중권’의 글과는 완연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더 주도면밀히 정치를 관찰하는 것 같았고 그것을 인문학적 글쓰기로 표현하고 있었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시대와 대면하여 몇 날 며칠 숙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 글의 정신’이 보였습니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28년간 그의 글을 읽어왔지만, 요즘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2020년 그의 글을 읽으며 미학자 진중권의 인문학과 논객 진중권의 정치사회 비평이 하나의 사유로 엮이는 새로운 체험을 합니다.” - 편집자 선완규

진중권의 비판에서 그가 언어로 추는 칼춤은 경탄스럽다. 다이아몬드를 훔쳐 달아나다 열린 맨홀에 빠지는 바람에 감옥에 가서는 맨홀 탓만 하는 도둑을 조국 전 장관 부부에 빗대는 풍자나, 전 청와대 대변인과 여당 대표의 가상 대화를 신파극으로 각색하는 해학은 일품이었다.
거기서 편집자는 디지털 미학의 관점에서 미디어 이론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는 그의 인문학과 현실의 ‘찐한’ 융합을 볼 수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글은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원용해 문재인 정권의 위기관리 전략의 특성을 분석한 글이다(<03. 매트릭스와 저지전략,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문재인 정권은 실은 촛불 정권이 아니라 촛불 정권의 허상을 쓰고 있었을 뿐이며, 이제는 그 허울마저 벗어버렸다는 날카로운 고발이다.

보드리야르는 저지전략의 실례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제시한다. 이 사건은 원래 미국식 민주주의의 추악함을 폭로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이 사건은 거꾸로 미국식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예로 기억된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권력이 이 사건을 철저히 ‘개인의 스캔들’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즉, 타락한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닉슨 개인이라는 것이다. 고로 그만 물리면 권력은 계속 깨끗한 척할 수 있다. 심지어 ‘대통령도 잘못하면 물러나야 하는 나라’라고 칭송까지 받는다. 미국의 대통령은 아마 누구나 도청을 했을 것이다.
닉슨의 전임자도 후임자도. 그저 들키지 않았을 뿐. 부패는 권력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기자가 폭로해버렸다. 이것이 돌발사태다. 실재계에서 들어온 요소는 그 존재만으로도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한다. 그러므로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 결국 권력은 그 사건을 닉슨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프레이밍 했고, 그로써 자신의 부패한 본질을 감추고 위대함의 후광까지 얻었다. 이것이 저지전략이다.
문재인 정권의 위기관리 방식은 성격이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도 역대정권은 감추려다 실패한 비리 사건의 경우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로 치부해 당사자를 도려내는 식으로 처리해왔다. 이 정권은 다르다. 그들은 부패한 자들을 도려내는 대신 외려 끌어안고, 아예 그들에게 맞추어 세계를 새로 날조하려 한다. 거기에 늘 노골적 선동과 대중의 자발적 동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 정권의 전략은 다분히 전체주의적이다. 민망한 일이다.(/ pp.32~33)

목차

서문
제1부 진리 이후의 시대
01 대안적 사실
실재보다 강렬한 허구
02 실재의 위기
지루한 현실과 재밌는 허구
03 매트릭스와 저지전략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04 세계를 만드는 방법
공작정치, 세계를 날조하다
05 음모론의 시대
과학을 대신하는 이야기

제2부 팬덤의 정치
06 팬덤 정치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07 소비자 민주주의
유권자에서 소비자로
08 게이미피케이션
인간장기, 게임이 된 정치
09 은유와 환유의 정치
노무현이 어쩌다 조국이 됐나
10 개인의 해체
한 입으로 두말하는 분열자들

제3부 광신, 공포, 혐오
11 종교적 광신
‘이 세상의 신’ 노릇을 하는 그들
12 정치적 주술
왕의 목을 베라
13 파니코스
공포와 혐오의 정치학
14 파르마코스
만인의 평화를 위한 마이너스 1
15 코로나 독재
K방역과 코로나 보안법

제4부 민주당의 연성독재
16 프레임 전쟁
중도층은 미신이다?
17 선전선동
“진리는 국가의 적이다”
18 기억의 정치
기억을 지워버린 기억의 연대
19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자살
20 원칙이성과 기회이성
그들은 왜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제5부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21 원한의 정치
짓밟힌 노무현의 꿈
22 포스트 노무현
노무현의 시대가 왔는데 노무현이 없다
23 대통령의 철학
대통령은 어디로 갔는가
24 편 가르기 정치
지도자란 무엇인가
25 문재인 정권의 영상전략
우상이 된 대통령

제6부 진보의 몰락
26 포스트-윤리의 시대
진보는 왜 보수보다 뻔뻔해졌는가
27 오인으로서 정체성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28 부친살해의 드라마
이제 우리가 살해당해야 한다
29 앙가주망
지식인의 묘비
30 진보의 종언
박원순의 죽음은 진보 전체의 죽음

본문중에서

논객도 다르지 않다. 그의 사명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직하는 데에 있다. 논객은 나팔수가 아니라 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심오한형이상학적 진실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져야 한다. 정론(政論)의 임무는 ‘보는 자’의 눈으로 본 것을 문학적 언어로 분절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는 데에 있다. 여당 지지자들은 나를 ‘극우 논객’이라 부르나, 예이츠 시 속의 아일랜드 비행사처럼 “나는 내가 맞서 싸우는 그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고, 내가 위해서 싸우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한쪽의 비난이 나를 슬프게 하지도, 다른 쪽의 환호가 나를 기쁘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할 때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 p.7)

대안 매체는 레거시 매체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레거시 매체가 전하는 ‘사실’이 자기들이 만드는 ‘대안적 사실’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레거시 매체가 가하는 이 ‘팩트의 폭력’에 대안 매체는 또 하나의 음모론을 꾸며내 맞선다. ‘알릴레오’ 송년 특집에서 유시민은 레거시 매체의 ‘기레기들’이 검찰과 유착하여 그들이 흘리는 기사만 받아서 쓴다고 매도했다. 레거시 매체들에서 하는 보도를 싸잡아 신뢰해서는 안 될 ‘검찰괴담’으로 격하해버린 것이다.
(/ pp.26~27)

솔직히 나는 ‘촛불정권’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외려 권력이 이 방식을 사용해 그 환상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했다면 ‘촛불혁명’이라는 권력의 연극을 도울 의향까지 있었다. 하지만 권력은 부패한 자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기들을 맹신하는 40퍼센트 지지자만을 위해 ‘그 부패한 자들이 부패하지 않은 대안세계’를 날조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60퍼센트의 시민들은 권력이 ‘촛불정권’이라는 번거로운 허울을 벗어던지고 아예 이익집단으로 제 알몸을 노출하는 민망한 장면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 pp.37~38)

개혁한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고작 검찰을 다시 권력의 개로 길들여놓았다. 그래도 자기들이 검찰의 독립성을 훼손했다는 것은 아나 보다. 민주당 윤호중 의원이 애써 변명을 한다. “검찰은 중립성을 지켜야지, 독립성을 지켜야 할 조직이 아니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검찰에 독립성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중립성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독립성 없는 조직이 어떻게 중립적일 수 있겠는가.
(/ p.48)

‘음모(conspiracy)’라는 말에는 ‘함께(con)+숨 쉬다(spirare)’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음모란 소수의 사람들이 숨 닿을 거리에서 끼리끼리 속닥인다는 뜻이다. 사회란 각 개인·계층·계급의 욕망이 필연적 법칙이나 우연적 계기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합력(合力)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고대에는 사회과학이 없었기에, 그시절 사람들은 모든 사회현상을 신화로, 즉 신들이 끼리끼리 속닥거려 세상을 움직인다는 ‘이야기’로 설명하곤 했다. 음모론은 인간의 의식을 과학에서 신화의 시대로 되돌려 보낸다. 하지만 현대의 음모론은 ‘과학 이후’의 이야기라, 신화와 달리 나름 합리적 추론과 과학적 논증의 외양을 띠기 때문이다. 음모론의 절반은 사실, 나머지 절반은 상상이다. 절반의 거짓이 그냥 거짓이듯이 절반의 사실도 실은 허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허구는 사실의 자격을 요구한다. 그 요구를 반박하는 것은 아주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다.
(/ p.53)

정치에 사랑이 개입하니 정치의 본질은 왜곡될 수밖에. 그래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키는 게 아니라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주는 이상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당신을 지켜드리기로 맹세합니다. 우리를 믿으세요.” 원래 이는 대통령이 국민에게 해야 할 얘기다. 그 얘기를 거꾸로 국민이 대통령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팬 객체는 투사된 자아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대통령을 지키는 게 곧 자기를 지키는 일이 되는 것이다.
(/ pp.67~69)

분석철학자 맥스 블랙에 따르면 은유의 효과는 교호적(交互的)이다. 즉, ‘그대의 눈은 호수’라고 할 때, 그의 눈에 호수의 이미지가 겹쳐질 뿐 아니라 거꾸로 호수를 볼 때에도 그의 눈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조국=노무현’이라는 은유도 마찬가지다. 그 은유는 조국에게 노무현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을 넘어, 거꾸로 노무현에게 조국 이미지를 덧씌우게 된다. 조국을 노무현 만들려다가 노무현을 조국으로 만든 것이다.
(/ p.97)

의혹을 직접 취재해봤다는 주진우 기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가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자료도 받고 정리도 하고 취재를 해봤다. 깊게 해봤는데 신빙성이 하나도 없다. 문제 제기한 사람은 대법원에서 벌금 1,000만원 유죄 확정을 받았다. 그러니까 장모에 대해 막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자동으로 명예훼손에 걸릴 사안이다.” 이 발언 역시 기자의 머리에선 벌써 지워졌을 게다. 요즘 윤석열 총장을 “식물총장”이라 조롱하는 재미에 사는 유시민 작가. 그런 그도 2016년 박영수 특검 때는 그를 ‘명언제조기’라 극찬했었다. “저는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지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 작가가 ‘명언’이라 평가했던 이 발언이 지금은 제 업무엔 별 관심 없어 보이는 어느 정치검사에게 “조폭논리” 취급을 당한다. 왜들 그럴까. 이게 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치열하게 살려는 몸부림이다.
(/ p.104)

신화 속의 판은 평소엔 팬플루트를 불며 조용히 숲속을 거니는 온순한 존재이나 좋아하는 낮잠을 방해받아 깨면 버럭 큰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면 새와 짐승이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떼를 지어 도망가곤 했는데 그 모습을 그리스의 저자들은 ‘파니코스(panikos)’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판이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편에 서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를 본 페르시아 병사들이 겁에 질려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파니코스’는 이렇게 현현한 신과 마주치는 공포를 가리키기도 했다. 이 ‘파니코스’에서 유래한 말이 ‘패닉(panic)’이라는 단어다.
(/ p.128)

민주당 사람들은 자신들이 박정희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북한의 위협이든, 코로나19의 위협이든 공포심을 이용해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제한하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경도(硬度)의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유신정권의 긴급조치가 경성(硬性)이라면, 현 정권의 코로나 긴급조치는 연성(軟性) 독재라 할 수 있다. 정부가 보수단체에서 주최하는 ‘드라이브스루 시위’를 금지하자 정의당과 몇몇 진보단체에서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반대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볼테르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이 말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떠나 모든 이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바로 이것이 시민들이 진영의 차이를 넘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통 지반이다.
(/ p.153)

물론 21세기의 한국을 1930년대 독일과 등치할 수는 없다. 일단 민주당은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문재인 정권에서 나치처럼 체계적인 선전·선동 기구를 가동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반대편에는 꽤 견고한 견제세력도 존재한다. 고로 이 정권을 ‘파시스트 정권’으로 규정한다면, 그 역시 부당한 선동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 민주당 정권의 커뮤니케이션이 강한 전체주의적 특성을 보인다는 것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 p.170)

이들이 할머니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윤미향을 옹호한 것은, 그들 또한 윤미향 부류의 운동권 서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이 상상계와 실재계 사이에 드러난 괴리를 애써 덮으려 한다.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자신들이 정의로운 일을 한다는 허위의식으로 포장해왔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 괴리를 드러내는 이들은 ‘토착왜구’로 몰아붙이면 그만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남은 낡은 운동권 서사의 기능이다. “정의연을 공격하는 자가 토착왜구다.” 저 포스터는 이 운동권 서사에 지배당한 대중의 의식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 p.179)

소신파의 ‘소신’은 주로 당이 보편적 ‘원칙’에서 벗어날 때 표출된다. 이들은 법무장관 인사청문회에서는 후보의 이중성을 질타했다. 윤미향 사태에서는 당에 신속한 정리를 주문했다. 이처럼 소신파는 원칙의 보편성과 논리의 일관성을 중시한다. 이들 정치적 자유주의자의 철학적 토대를 이루는 것은 칸트의 정언명법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으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 p.194)

운동이 할머니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들이 운동을 위해 존재하게 됐다. 대체 무엇을 위한 운동이었을까? 문 팬덤이 이 운동의 ‘배신자’에게 늘어놓은 악담은 차마 옮겨 적을 수 없을 정도다. 음모론 교주는 이용수 할머니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고 우겼다. 어느 신문은 ‘물에 빠진 할머니를 구해줬더니 보따리(의원직) 내놓으라 한다’는 만평을 실었다. 그래, 보따리는 원래 민중의 것이 아니라 운동가의 것이었지.
(/ p.216)

문제는 그동안 대통령이 회피해온 ‘대통령직의 윤리적 기능’이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에 정의와 상식이 무너졌다. 국가가 아노미에 빠졌을 때 ‘기준’을 세워 국가의 품격을 살린 것은 철학을 가진 지도자의 말. 그 말을, 이미 있는 기준마저 허무는 이 나라 대통령에게서 들을 수 없기에 딴 나라 지도자의 말을 인용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것은 (…) 무엇보다 도덕적 이슈다. 이는 세세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정의의 근본원리와 우리나라의 성격이 걸린 문제다.”(버락 오바마) 인위로 연출된 싸구려 감동에 물린 백성은 감동마저 이렇게 외국에서 빌어먹어야 한다.
(/ p.229)

산업화 서사와 함께 민주화 서사도 파탄이 났다. 우리 세대가 아버지 세대의 전쟁 이야기에 넌더리를 냈던 것처럼, 요즘 젊은이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늘어놓는 민주화 서사를 냉소한다. 그 잘난 민주화가 이뤄진 사회에서 성공의 지름길은 상속과 세습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수저를 잘 물고 태어난 소수를 제외하고, 수저를 잘못 문 대다수 젊은이들은 민주화의 위선을 경멸하며, 민주화한 사회의 현실에 절망한다.
(/ pp.273~274)

이제 진리는 ‘발견’되는 게 아니라 ‘제작’된다. 이에 따라 사회에서 인문적 사유는 점차 공학적 사유에 밀려나고 있다. 매체 철학자 빌렘 플루서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은 과거의 역사적·진보적·계몽적 의식을 구조적·계산적·분석적 의식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발언을 해봐야 그저 잔소리나 늘어놓는 ‘씹선비’, 사회를 제작하는 데에 아무 쓸모도 없는 ‘입진보’로 여겨질 뿐이다.
(/ p.280)

그들이 치러준 성대한 장례식이 그에게는 또 다른 죽음이었다. 그를 위한답시고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평생에 걸쳐 없애려 했던 그 짓을 골라서 하고 있다. 성추행 폭로자의 배후를 의심하고, 피해자를 꽃뱀으로 매도하며, 열심히 피해자와 그 주변의 신상을 캔다. 이를 위해 날조와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쌓아온 업적을 그의 지지자들이 무너뜨린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그를 죽일 수 있을까.
(/ p.292)

저자소개

진중권(JUNGKWON CHIN)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63~
출생지 서울
출간도서 65종
판매수 84,010권

미학자. 잠시 논객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언어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인문학이라는 올드미디어는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뉴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새로 정의해야 한다’라는 구상 아래 교육·연구·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미학 스캔들』, 『감각의 역사』, 『이미지 인문학 1, 2』, 『미학 오디세이 1, 2, 3』, 『서양미술사 1,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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