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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읽고 책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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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정민
  • 출판사 : 김영사
  • 발행 : 2019년 05월 15일
  • 쪽수 : 304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34984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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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정민 교수의 표정 있는 사람, 향기 나는 책에 관하여
펼쳐들면 행간 사이로 솔바람이 불고 마음이 맑아지는 정민 산문집 2탄


‘정민 산문집’ 1권 《체수유병집-글밭의 이삭줍기》에 이은 두 번째 책. 정민 교수가 30여 년간 학문의 길을 걷는 동안 삶의 길잡이가 되어준 사람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만 서른이라는 나이에 교수로 임용된 이후부터 이순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까지 마주한 잊고 싶지 않은, 잊어서는 안 될 순간들의 기록. 이덕무ㆍ박제가ㆍ유만주 등 학자들의 질박하고 꾸밈없는 삶, 정민 교수가 한문학자의 길을 걸으며 만난 스승 이기석ㆍ김도련 선생님과의 일화, 엄정하고 치밀한 기록정신을 보여주는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자기만의 꽃을 피워낸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까지. 때론 학자이자 스승으로서, 때론 제자이자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시선과, 살아 영동하는 특유의 필치가 녹아든 정민 산문의 정수! 나른하던 일상에 생기가 차오르고 마음이 맑아지는, 조용히 밑줄 그어가며 음미하고픈 정채로운 글 모음.

출판사 서평

정민 교수의 표정 있는 사람, 향기 나는 책에 관하여

“사람의 만남은 평생의 연속이며
책 속의 짧은 일별(一瞥)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다함이 없는 보물’ 같은 한문학 문헌들에 담긴 전통의 가치를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온 고전학자 정민 교수. 방대한 자료를 분류해 난해와 고리함을 지워내고 다양한 주제로 변주하여 대중과 소통해온 우리 시대 대표 인문학자이다. 고전부터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삶과 공부ㆍ차 문화ㆍ꽃과 새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연구, 멋과 여운이 있는 글쓰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그가 그동안의 연구와 삶을 정리하는 산문집을 선보인다. 앞서 출간한 ‘정민 산문집’ 1권 《체수유병집-글밭의 이삭줍기》에 이은 두 번째 책 《사람을 읽고 책과 만나다》이다.
이 책은 정민 교수가 30여 년간 학문의 길을 걷는 동안, 삶의 길잡이가 되어준 사람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만 서른이라는 나이에 교수로 임용된 이후부터 이순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까지 마주한 잊고 싶지 않은, 잊어서는 안 될 순간들을 기록했다. 그곳에는 옛사람과 나눈 대화도 있고, 지금은 곁을 떠난 스승이나 선학도 있다. 가깝게 지내는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도 있고, 삶의 방향을 바꿔준 책, 통쾌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을 읽고 책과 만나다’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읽고 분석했다는 의미와 책과의 만남이 준 감동을 간직하려는 뜻”으로, 저자는 ‘표정 있는 사람’, ‘향기 나는 책’으로 설명하고 있다. 표정이 아름답다는 것은 살아온 삶이 아름답다는 말이고, 책이 향기롭다는 것은 세심하게 음미해야 하는 차와 같다는 의미다. 때론 학자이자 스승으로서, 때론 제자이자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시선과, 살아 영동하는 정민 교수 특유의 필치가 녹아든 산문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수없는 이야기가 만들어낸 정채로운 사유를 오롯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밑줄 그어가며 음미하고픈 글,
펼쳐들면 행간 사이로 솔바람이 불고 마음이 맑아지는
정민 산문집


이 책은 대상을 섬세하게 파헤치면서도 간결한 통찰이 돋보인다. 무수한 시절이 빚어낸 삶의 여러 단면들을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글은 성격에 따라 크게 2부로 나눴다. 제1부 ‘표정 있는 사람’에서는 교훈이 되는 옛사람의 말씀부터 삶의 경계로 삼을 만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이덕무ㆍ박제가ㆍ유만주 등 학자들의 질박하고 꾸밈없는 삶, 정민 교수가 한문학자의 길을 걸으며 만난 스승 이기석ㆍ김도련 선생님과의 일화, 정병례ㆍ정해창ㆍ백범영 등 작가들의 웅혼한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는 늘 진정(眞情)의 시를 꿈꿨다. 못물에 넣으면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고철(古鐵)이나, 성난 듯 흙을 뚫고 쑥쑥 솟는 봄날 죽순 같은 시를 쓰고 싶어 했다. 매끈한 돌 위에 바른 먹물이나, 물 위에 동동 뜬 기름처럼 겉돌고 따로 노는 거짓 시를 못 견뎌 했다. 나는 지금 사람이니 지금 것을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며 옛것 추수(追隨)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너무 가난했다. 늘 춥고 항상 굶주렸다. 겨울에 냉방에서 꽁꽁 얼며 공부하다가 손가락이 얼어 밤톨만큼 부어올라도 책을 빌려 베껴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미쳐 발광할 것 같을 때는 《논어》를 소리 내서 읽으며 견뎌냈다. 자기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햇빛을 마주 보며 걸어갔던 사람, 그의 시는 그래서 뼛속까지 맑다.
(‘세상의 마음을 사랑한 사람, 이덕무’ 중에서)

이듬해 만 서른에 운 좋게 모교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동료 교수래야 모두 층층시하 엄한 스승들뿐이었다. 이리저리 치여 마음고생이 컸다. 몸도 많이 아팠다. 체중이 무섭게 줄었다. 거울을 보면 두 눈이 우멍했다. 답답함을 속으로만 삭이다 보니 기운이 억색되는 증세가 생겼다. 갑갑증이 나서 정 못 견딜 지경이 되면 무작정 경기도 포천에 있는 선생님 산소로 달려갔다. 무덤 속에 누워 계신 선생님과 한참 혼잣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면 속이 좀 달래졌다. 해가 바뀌면 거길 한번 다녀와야 새 기운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정 군!” 하며 부르시던 그 어진 음성이 참 그립다. 30년의 세월이 지나는 사이, 내 사전 두 권도 어느덧 낡아 누더기가 되었다. 이제는 선생님의 낡은 옥편 곁에 소임을 마친 내 옥편 두 권이 나란히 누워 있다.
“선생님! 이게 무슨 뜻인가요?”
“사전을 찾아봐. 거기에 다 있어. 지금 찾아봐. 당장 찾아봐. 그것 봐. 거기 있잖아!”
제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돌아보니 선생님이 늘 내 곁에 계셨다. 사전을 뒤적이다 말고 나는 문득문득 선생님 생각에 잠기곤 한다.
(‘낡은 옥편의 체취, 이기석 선생님’ 중에서)

제2부 ‘향기 나는 책’에서는 정민 교수에게 깊은 통찰과 여운을 남긴 책에 대해 다룬다. 엄정하고 치밀한 기록정신과 마주하게 해주는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 반세기도 더 지난 옛 베이징의 풍경을 담은 린위탕의 《베이징 이야기》,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자기만의 꽃을 피워낸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까지. 책의 행간과 그 이면의 이야기들, 염량의 세태에서 조용히 음미하고픈 향기 나는 글 모음이다.

베이징의 사계는 소리 속에 오고 간다. 자장가 같은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 동네에 이발사가 왔음을 알리는 대형 소리굽쇠의 진동음. 쏸메이탕 장수가 두드려대는 놋쇠쟁반 소리. 밤 11시경 사람들의 표정을 환하게 해주는 탕위안 장수의 도자기 두드리는 소리. 봄이면 복사꽃 가지를 꺾어 인력거를 타고 ‘꽃 사세요’를 외치는 매화성. 물론 지금은 들을 수 없는 1940년대 이전 추억 속의 소리다.
1956년 한 프랑스 작가가 국제회의 참석차 베이징의 한 호텔에 묵었다. 새벽 1시, 난데없는 확성기 소리와 징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베이징 주민들이 참새 쫓는 소리였다. 알아보니 며칠이고 잠을 못 자게 하면 참새가 놀라고 스트레스를 받은 끝에 죽어 멸종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나.
이 책은 린위탕 특유의 재치 있는 글맛과 동서고금을 자재로이 넘나드는 해박함이 잘 어우러져 있다. 서양 사람이 쓴 베이징 관련 기록은 물론, 중국 역대 전적을 섭렵한 위에, 과거와 현재 베이징의 풍광들이 그의 섬세한 손끝에서 마치 누에가 실을 잣듯 꼬물꼬물 풀어져나와 문맥 속에 녹아든다.
(‘영원히 늙지 않는 도시 베이징, 《베이징 이야기》’ 중에서)

유학생이었던 그는 학원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혹독한 고문 끝에 감옥에 간 서른 살의 젊은이는 마흔네 살의 중년으로 출소한다. 그러고는 국가기관의 조작극이었다고, 대단히 미안하게 됐다는 한마디를 들었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한다. 무슨 기막힌 장난인가?
무신란으로 촉망받던 장래가 한순간에 짓밟힌 후 다시는 안 나오겠다며 청학동을 찾아들던 고려 때 이인로의 심정이 그랬을까? 물고기 비늘을 세며 시간을 죽이던 정약전의 심정이 그랬을까? 글쓴이는 예상과는 달리 전혀 담담하다는 투다. 오히려 감옥에서 야생초와 만나게 되어 고맙다고 한다. 그 편안함에 읽는 이가 외려 불편하다. 공연히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는데, 그는 팔자 좋게 야생초 이야기만 한다. 절망을 감내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그릇을 본다. 천연두로 자식 여럿을 죽인 정약용이 《마과회통》을 지어 치료법을 책으로 정리했듯이, 그들은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꽃을 피워낸다. 뽑아도 돋아나는 야생초같이.
(‘유배지의 시선, 절망을 넘어서는 방법 《야생초 편지》’ 중에서)

마지막 부록으로 정민 교수의 수상 소감문을 실었다. 수십 권의 저작을 남기며 학자로서 큰 획을 그은 그의 공부 이야기, 수많은 저작들의 탄생 비화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목차

서문

제1부 표정 있는 사람

1장 그늘의 풍경
세상의 마음을 사랑한 사람 _이덕무
조선 최고의 벼루 장인 _정철조
별처럼 쓸쓸합니다 _박제가가 귀양 간 벗에게 보낸 편지
부끄러운 전별 선물 _장혼의 표주박
아버지의 슬픈 당부 _백광훈이 아들에게 보낸 사연
깊은 슬픔 _유만주의 일기장
희미한 꿈의 그림자 _장조의 청언소품집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_후지쓰카 지카시와의 조우
눈보라 속을 뚜벅뚜벅 걸어간 사람 _백범 김구 선생

2장 인생의 여운
낡은 옥편의 체취 _이기석 선생님
만 냥짜리 《논어》 _김도련 선생님
선지식의 일할 _표구장 이효우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오토바이 _이승훈론
부드럽고 나직한 음성 _박목월 선생의 산문 세계
한국 수필의 새 기축 _피천득과 윤오영
우리 문학에서 거둔 빛저운 수확 _윤오영론
돌처럼 굳세게, 칼처럼 날카롭게 _고암 정병례의 ‘삶, 아름다운 얼굴’전에 부쳐
천진과 흥취 _문봉선 화백의 매화전에 부쳐
불변과 지고의 세계 회사후소 _구자현의 금지화
난향과 차향 _고산 김정호의 서화
불쑥 솟은 어깨뼈 _필장 정해창 선생에게 바치는 헌사
야성을 깨우는 소리 송뢰성 _백범영의 ‘소나무 그림’전에 부쳐

제2부 향기 나는 책

1장 책의 행간과 이면

절망 속에 빛난 희망 _《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동심의 결로 돌아가다 _《이상한 아빠》
양반 문화의 이면 _《나의 양반문화 탐방기》
유배지의 시선, 절망을 넘어서는 방법 _《야생초 편지》
무슨 잔말이 있겠는가! _《산거일기》
저녁연기 가득한 대숲 집 _《보길도에서 온 편지》
광기에서 탄생한 위대한 예술혼 _《천재와 광기》
신선,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_《불사의 신화와 사상》
조용하긴 뭐가 조용하단 말인가 _《조선의 뒷골목 풍경》
파편의 시대에 꿈꾸는 천년왕국의 신화 _《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해삼의 눈을 통해 보는 태평양 문명 교류사 _《해삼의 눈》
열 개 벼루 밑창내고 천 자루 붓이 모지라졌다 _《완당평전》
역사 속에 지워진 한 무장의 비장한 생애 _《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깊고 푸른 절망의 그늘 _《현산어보를 찾아서》

2장 고전이 고전인 이유
일기를 쓰는 까닭 _《석담일기》
영원히 늙지 않는 도시 베이징 _《베이징 이야기》
울지 않는 큰 울음 _《라오찬 여행기》
인생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 _《금오신화》
삶을 관통하는 프리즘 _《어우야담》
18세기의 한 표정 _《청장관전서》
인간학의 보물창고 _《사기》
과거와 미래의 대화 _《자치통감》
치열한 순간들의 기록 _《난중일기》
다시 부는 ‘완당 바람’ _《국역 완당전집》
마음이 맑아지는 향기로운 글 _《도연초》
연암 앞에 조금은 떳떳해졌다 _《열하일기》

부록_ 수상 소감문
제4회 우호 인문학상
제12회 지훈 국학상
제40회 월봉 저작상

본문중에서

《유몽영》과 《유몽속영》은 청나라 초기의 소품가 장조(1650~1707)와 청나라 말기의 주석수가 생활 속에서 떠오른 단상들을 하나둘 모아 적어나간 청언소품집이다.
‘숨어 사는 이의 꿈 그림자’쯤으로 옮길 수 있을 특이한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꿈꾸듯 흘러가는 인생의 강물 속에서 언뜻언뜻 실체를 알 수 없이 그림자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상념들을 짤막한 잠언 형식으로 기록해둔 것이다.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생각의 단서들을 붙들어, 여기에 글쓴이의 더운 호흡을 불어넣었다.
그의 붓끝에서는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들이 모두 깨어나 소곤소곤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아무 의미 없이 그저 놓여 있던 사물들이 구체적인 의미를 띠고서 다가선다. 그래서 생활이 곧 예술이 되고, 삶이 기쁜 향연이 된다.
(‘희미한 꿈의 그림자, 장조의 청언소품집’ 중에서)

“아버지! 저 책을 사주세요.”
상황을 짐작한 아버지가 따라온 사람에게 책값을 물었다. 곁에 계시던 당신 친구분이 책값을 듣더니 펄쩍 뛰며 전주 시내 서점에 가면 훨씬 싸게 살 수 있는데 뭐 하러 그 비싼 값을 주느냐며 야단을 했다. 그때 선생 아버님의 대답이 이랬다.
“여보게! 저 아이가 이 책을 만 냥짜리 책으로 읽으면 책값이 만 냥이 될 터이고, 한 냥짜리 책으로 읽으면 그 값밖에 안 될 것일세. 책을 보겠다고 10리 길을 사람을 데려왔는데 책값을 깎겠는가?”
그러고는 어머니더러 그 사람에게 쌀을 내주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신이 나서 책을 와락 빼앗아 품에 안고 어루만졌다. 그때 어머니께서 제사 때 쓰려고 남겨둔 쌀을 뒤주 바닥에서 박박 긁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는 일제 말기로 공출이 심해 끼니를 잇기도 어렵던 때였다.
이후 그 책은 하도 읽어 책장이 나달나달해지고 표지가 떨어져나갔다. 여러 번 해지고 낡은 것을 깁고 새 표지를 씌워 소중하게 간직해왔다며 내게 보여주셨다. 책의 여백마다 선생의 메모가 빼곡했다. 지금도 이 책만 보면 그때 뒤주 바닥을 긁던 바가지 소리가 들린다시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겨울날 추운 서재에서 낡은 책을 쓰다듬으며 뜨거운 눈물을 떨구시던 그날 오후의 일이 오래 두고 생각난다.
(‘만 냥짜리 《논어》, 김도련 선생님’ 중에서)

그가 그 고생을 자청해 국토를 걸으며 제 가슴속에 숨어 있던 낙락한 소나무를 다시 꺼내왔다. 몸을 혹사해 비워진 마음에 야성의 기운이 싱싱하게 푸르다. 이것이 다시 꼴액자의 투박한 외곽 속에 드니 아연 기운이 비등한다. 전시회 제목을 ‘송뢰(松籟)’로 정했다. 송뢰는 바람이 솔가지 사이를 뚫고 지날 때 나는 피리 소리다. 가지가 흔들리면서 가락이 바뀌고 속도에 따라 음의 고저가 달라진다. 그야말로 자연의 가락이요 펄떡이는 기운이다. 화면 속에서 화가의 내면을 읽는데 그림 밖에서는 송뢰성의 가락이 들린다. 조촐한 전시장에 청청한 기운이 가득하다. 작은 화폭 속 소나무가 틀 밖으로 꿈틀대며 아우성을 친다.
그가 허심탄회하게 가슴을 열고 만난 소나무, 우리 소나무! 바닷바람에 시달려 한쪽으로 쏠리고도 용비늘 갑옷 벗지 않고 독야청청 푸르른 옛 선비의 꼬장꼬장하고 시원시원한 기운과 만나러 가자. 그의 소나무 그림은 이제부터다.
(‘야성을 깨우는 소리 송뢰성, 백범영의 소나무 그림전에 부쳐’ 중에서)

집이 학교 턱밑이고 보니 저녁을 먹고도 곧장 연구실로 올라가곤 했다. 그때마다 네 살짜리 둘째는 문간을 막아서서는 못 간다고 막무가내로 버텼다. 한번은 학교로 올라가 의자에 앉는데 엉덩이를 무엇이 찌른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꼬마가 가지고 놀던 레고 블록 하나가 나왔다. 아비가 기어이 저와 안 놀고 학교로 가자 아이는 제 레고 블록을 슬쩍 아비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모양이다. 그 일이 나는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아이가 나를 얼마나 ‘이상한 아빠’로 여겼을까?
이제 여섯 살이 된 녀석은 혼자서도 잘 논다.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 일찍 들어앉아 있는 요즘엔 놀아주려 해도 아이가 반갑지 않다는 표정이다. 뭘 물어보아 대답해주면 쪼르륵 제 엄마한테 달려가 “엄마! 아빠 말 맞어?” 한다. 자업자득이란 말을 실감하고 산다. 아! 5월은 어린이달이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금세 어른이 된다. 함께 놀아줄 날은 너무도 짧구나.
(‘동심의 결로 돌아가다, 《이상한 아빠》’ 중에서)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율곡 선생의 이 일기를 읽노라면 그 배경에서 선생의 올곧은 체취를 십분 느낄 수가 있다. 조정에서 일어난 여러 일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라 하면 으레 그렇고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있을 줄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책장을 펼쳐들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의 언행과 몸가짐이 거울처럼 내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는 까닭이다. 어찌 보면 겉으로 드러난 삶의 양태만 달라졌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 갖은 농단을 부리며 교묘한 언변으로 출세에만 급급하다가 마침내 본색이 드러나 쫓겨난 김명윤, 자신을 소인이라 지칭한 계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분을 품고 죽은 김개, 바른말을 하고도 아첨하는 태도를 지어 비루하게 여겨진 정희적 등 수많은 일화 속에서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묻게 된다.
(‘일기를 쓰는 까닭, 《석담일기》’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60~
출생지 충북 영동
출간도서 57종
판매수 81,611권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지식경영에서 한국학 속의 그림까지 고전과 관련된 전방위적 분야를 탐사하고 있다.
그동안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는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다산의 제자 교육법》《다산 증언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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