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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못한 숲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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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조해진
  • 출판사 : 민음사
  • 발행 : 2013년 07월 19일
  • 쪽수 : 192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3747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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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이야기는 숲의 모든 곳에 깃들어 있었고,
시시각각 걸음을 옮기는 빛을 따라 한 줌씩 소년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K시 기차역 가스폭발 사고, 동생이 사라졌다......
작가 조해진의 따뜻하고 깊이 있는 시선과 유려한 문체
매혹적이고도 아름다운 청춘 가족 성장소설


조해진 소설의 특장인 추상적이고도 관념적인 아우라가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이야기와 만난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은 동세대 젊은 작가들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우화적 혹은 동화적으로 표출된 수작이다. 이 작품은 유령과 같은, 그래서 부피감과 무게감이 전혀 없는 존재들의 발자국들만 보이는 소설이다. 발자국들이 몸통의 움직임을 대신하는 족적(足跡)의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아름답다. ─ 김미현(문학평론가·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오늘의 젊은 작가 01 조해진

문학성.다양성.참신성을 기치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신예들만을 엄선한 '민음 경장편' 시리즈의 새로운 이름 '오늘의 젊은 작가'가 반년간의 재정비 끝에 새롭게 론칭되었다. 그 첫 번째 작품의 주인공은 [천사들의 도시]와 [로기완을 만났다] 등을 통해 문단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작가 조해진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조해진의 작품을 "타자의 소설"이라 명명하며 그녀의 "책"은 곧 "우리의 미래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문학평론가 고인환은 "타자들의 삶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삶으로 스며들기까지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기어코 자신의 내면에 타자의 삶을 깃들게하"며 "내면에 음각하는 소통의 무늬가 눈부실 정도로 투명"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민음사가 '오늘의 젊은 작가' 01번으로 자신 있게 내놓은 조해진의 세 번째 장편소설 [아무도보지 못한 숲]은 따뜻하고 깊이 있는 그녀만의 독특한 문학적 감수성과 한층 더 아름답고 유려해진 문체로 독자들의 가슴에 오랜 여운을 남기며 진한 감동의 물결을 전할 것이다.

고독한 현실의 숲, 그 속에서 살아가기
- 인간의 본질과 직면하며 열린 미래로 나아가는 조해진의 작품 세계

나무가 많고 호수가 있는 숲이 있다. 그 숲 속에서는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며 누구도 실패자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그 자체, 신비 그 자체, 본질 그 자체인 숲. 그것을 시원이라 해도 좋고, 자궁이라 해도 좋고, 유토피아라 해도 좋다. 어쩌면 현실이 아닌 곳은 모두 숲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해진의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의 숲의 시작은 그 끝과, 또한 바깥은 그 안과 붙어 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숲과 연결되어 있기에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체험한다.
엄마는 사채업자에게 진 빚 때문에 쫓기는 신세였다. 결국 여섯 살이었던 남동생 '현수'는 K시 기차역 가스폭발 사고의 사망자로 위장 신고되어, 주어진 보상금과 함께 조폭에게 팔아 넘겨진다. 현수는 가족들을 원망하며 신원이 말소된 상태로 12년 동안이나 살아왔다. 서류 위조 브로커로 키워진 열여덟 살의 현수는 누나 '미수'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표시 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채워 주며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남몰래 미수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동생이 죽은 줄로만 아는 미수는 현수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그림자처럼 살아간다. 빌딩 로비의 안내원인 미수에게는 자신과 너무나 꼭 닮아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연인 '윤'이 있다. 같은 빌딩에서 보안 요원으로 근무하는 윤은 꽤 지명도 있는 4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그 졸업장은 신분 상승의 발판이 되
지 못했다. 자신을 학대하는 만큼 윤은 미수에게도 자주 화를 낸다.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내며 이별 아닌 이별이란 어정쩡한 상황으로 그들을 몰아갈 뿐이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의 주인공들은 이렇듯 자신들의 부재만이 그들의 존재를 겨우 증명해 줄 수 있는 유령과도 같은, 하여 부피감이나 무게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시리도록 아픈, 우리 모두의 '타자'들이다. 그러나 정작 숲에 있어야 할 등장인물들에게 실제로 허락된 공간은 고시원이나 원룸, 고층 빌딩의 옥상, 소년원, 병원 등지이기에, 몸도 마음도 점점 여위어 가는 그들에게는 다시 숲으로의 이동이 절실하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는 무심코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지되는 고통과 상처, 그리고 위안과 공감을 그 어떤 소설보다 더욱 아름답게, 또한 몽환적인 감동으로 그려 낸 수작이다. 조해진은 이 한 편의 소설에서 뜨거운 가족애를 그리는 동시에 연인들의 슬픈 사랑을 묘파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 내면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수야."
부르는 그 말에, 소년은 대답했다.
"응, 누나."
손이 따뜻해졌다. 현수는 자신의 손을 감싼 하얗고 작은 손등을 내려다보며 미수가 속삭이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누나의 등 뒤로 숲을 빠져나갈 수 있는 외길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웃었다.
(/ p.163)

이 소설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은 "결국 아무도 가 보지 못한 숲이 앞으로 가야 할 숲이기에 이 소설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 열려 있다."라는 지적과도 맥을 같이한다. 주인공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 발자국은 마침내 숲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줄 것이다. 이미 간 길이 아닌 그 길이야말로 숲으로 가는 길일 것이기에 말이다. 또한 그것이 "발자국들이 몸통의 움직임을 대신하는 족적(足跡)의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라고 문학평론가
김미현이 상찬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작품 해설 중에서
선의의 숲이 있다면 이 소설의 숲이 바로 그럴 것이다. 숲에 버려진 오누이가 있다. 사실 숲(forest)은 이들(the rest)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서로를 돌본다. 이 돌봄이야말로 숲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비의가 아닐까. 조해진은 냉혹한 세상이 그 지배력을 관철하려들 때마다 그 숲을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미스터 노바디가 그대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아닌 자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된다.
. 양윤의(문학평론가)

줄거리

K시 기차역에서 거대한 가스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사채업자는 보상금을 타 내기 위해 현수를 사고의 희생자로 처리하고 신병을 인도해 갔다. 엄마가 쓴 사채로 인해 여섯 살이었던 어린 현수는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고 만 것이다. 현수보다 일곱 살 많은 누나 미수는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가난한 외톨이로 살았다. 현수는 조직의 일을 도우면서 어느덧 열여덟 살이 되었다. 소년은 곧 성인이 되지만 여전히 세상에 없는 존재다.
현수를 데려간 조직의 보스는 서류 위조 브로커로 현수를 키웠다. 버림받은 채 맹목적인 복종속에서 폭력을 일삼는 형들 틈에서 현수는 냉혹한 생존의 규율을 체득했다. 눈물을 참아야 형들에게 맞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현수는 1년에 한 번씩 메모리를 포맷하는 망각 기계라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꺼지지 않는 노트북"이라고 부른다. 현수에게는 매 순간이 미션이고 게임이다. 세상에 없는 존재인 현수 자신은 세계의 버그(bug)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수는 복수를
꿈꾸는 괴물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수가 살고 있는 원룸을 몰래 찾아가 그녀의 삶을 조용히 돌보아 준다. 그리고 빈방에서 누나의 냄새와 흔적, 블로그의 글 등을 통해 잊었던 천국, 숲의 이미지를 찾아간다. 빌딩 로비의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는 미수는 언젠가부터 생필품들이 표시 나지 않을 만큼 조
금씩 채워지곤 하는 것을 느꼈지만 헤어진 연인 윤이 몰래 다녀간 것으로만 생각한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한 윤은 꽤 지명도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지만 공무원 시험과 취업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미수와 같은 빌딩에서 보안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어느 날 새벽, 윤은 병원에서 퇴원한 미수를 데리고 그들이 근무하는 빌딩의 지하 쇼핑몰로 들어간다. 미수와 윤은 아무도 없는 쇼핑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액세서리를 달아도 보고 침대에 눕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쇼핑몰 침대 위에서 잠든 채 경비들에게 발견되어 빌딩의 소유주에게 얻어맞고 쫓겨난다. 그리고 뒤늦게 동생이 살아 있었음을 알게 된 미수는 현수를 찾기에 여념이 없는데.......

추천사

조해진 소설의 특장인 추상적이고도 관념적인 아우라가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이야기와 만난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은 동 세대 젊은 작가들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우화적 혹은 동화적으로 표출된 수작이다. 연인들의 공동체, 무위의 공동체, 윤리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에 이어 우리는 이 소설로 인해 '숲의 공동체'를 가지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는 곳, 날카로운 칼이나 유리 조각이 없는 곳, 버그나 몬스터로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곳, 사라져 버리거나 위장되어야 하는 유령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곳, 바로 그 진짜 숲 말이다.
이 작품은 유령과 같은, 그래서 부피감과 무게감이 전혀 없는 존재들의 발자국들만 보이는 소설이다. 발자국들이 몸통의 움직임을 대신하는 족적(足跡)의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아름답다.
- 김미현 / 문학평론가·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목차

숲의 시작
숲의 바깥
숲의 끝

작가의 말
작품 해설
미스터 노바디(nobody)가 그대를 사랑할 때_ 양윤의(문학평론가)

본문중에서

호수 속으로 손을 넣어 이리저리 휘젓자 완성될 듯 완성되지 않던 그 거인 여자의 얼굴은 물방울과 함께 사라졌다. 이번에도, 아니 이번만큼은 그녀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숲 속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호숫가까지 이어지던 외길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두워진 숲 속엔 황홀한 빛깔의 꽃가루가 정령처럼 날아다녔고 아직 태양의 온기가 남은 황금빛 열매들이 투
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앉은 채로 스니커즈를 벗고 청바지 밑단을 올린 후 호수 수면에 맨발을 대 보았다. 이내 발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선뜩함이 전율처럼 온몸으로 퍼져 갔다. 미수는 눈을 꾹 감고 호수 속으로 두 다리를 깊이 담갔다. 셋까지세고 난 뒤 이 안으로 들어가리라, 미수는 다짐했다. 하나, 둘. 다시.
하나.
둘.
그리고…….
(/ p.16)

형광등을 껐다. 방과 현관 사이의 문턱은 미수가 이 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지점이었다. 미수는 곧 문턱에 앉아 두 손을 현관 쪽으로 내밀어 새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할머니 방에서 현수에게 보여 주곤 하던 그 새였다. 장난감 하나 없는 그 방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 보면 현수는 자주 뻗대거나 울었고 미수는 뭘 해서라도 현수를 웃게 해 줘야 했다. 보안등이 켜졌다. 노래할 줄 모르는 새는 현관 바닥에 나타나 부드러운 날갯짓을 하다가도 금세 미수의 방 저편 숲 속으로 잠적했다. 새가 잠시 갔다 오는 그 숲은 세계의 끝일 것만 같았다. 아마도 은백색 가지로 사랑을 속삭이는 나무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숲, 그런 곳. 보안등이 다시 꺼졌다, 켜졌다. 미수는 졸음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숲에서 새를 불러왔고 다행히 새도 지치지 않고 미수의 방을 방문해 주었다.
(/ pp.29~30)

가스총을 입안에 밀어 넣고 있는 게 보였다. 미수는 꿈쩍도 하지 못한 채 그의 행동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알루미늄 합금의 이물감 때문인지 윤은 이내 입에서 가스총을 빼고는 등을 구부려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했다. 헛구역질이 잦아들자 이번엔 가스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짓눌렀는데, 그의 손등에 돋은 파란 심줄과 무섭도록 붉게 충혈된 눈동자의 실핏줄이 줌인된 카메라로 들여다본 것처럼 지나치게 선명했다. 뒤늦게 난간에서 내려와 그에게서 총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곳은 촉감이 제거된 세계였으므로 어떤 짓도 소용없었다. 총알이 발사되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총알이 장전되지 않은, 심지어 가스조차 충전되지 않은 무력하고 무해한 가스총일 뿐이었다. 영원히 발사되지 못할 총. 어쩐지 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개가 없는 새처럼.
(/ pp.42~43)

탈출에 실패했으니 그대로 보스에게 돌아가면 모진 매를 맞아야 할 터였다. 운이 나쁘면 손가락 하나가 잘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년은 그 어떤 잔혹한 형벌보다 그 형벌조차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조직의 바깥 세계가 더 무서웠다. 유저들은 끊임없이 알려 줬다. 소년은 버그라고, 소년의 생존이 밝혀진다면 전체 시스템엔 치명적인 오작동이 일어날 거라고 그들의 검은 입술들은 확신했다. 보스는 어떤 방식으로든 소년을 찾아낼 것이므로 소년과 함께 있는 한 M 역시 도망가고 숨어야 하는 배역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며 겁을 주기도 했다. 소년은 보스의 조직 안에서만 안전했다. 조직의 바깥에서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소년을 증명해 줄 서류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53)

그때는, 그 모든 것이 진짜 인생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변하는 건 없었다.
(……)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2년여 동안 하면서 윤은 조금씩 깨닫게 됐다. 그런 생활이 가짜라는 확신이야말로 가짜였다는 것을, 애초에 배당되었던 레일은 이미 오래전에 다른 레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앞만 보며 뛰어왔다는 것도.
(……)
윤은 상자에서 하늘색 육상화를 꺼내 신었다. 촛불을 껐다.
방 안은 완벽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운 방엔 푸르른 투명함으로 빛나는 물방울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물방울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쩌면 미수가 흘리고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윤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방 안을 심해의 해파리 떼처럼 떠다니는 갖가지 모양의 물방울들을 넋 놓고 올려다봤다. 아까부터 빈방엔 또다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윤은 움직이지 않았고, 수면 밖으로 솟구쳐 나가지도 않았다.
(/ pp.108~111)

바닥엔 빈 병 하나가 쓰러져 있었고, 병 안에서는 초여름의 숲처럼 초록색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소주병을 집어 들어 주저 없이 내리치자 바람 한 줌이 미수의 손안에 들어왔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미수는 그 바람을 꼭 쥐었다. 오래오래, 이 바람을 간직해 두고 싶었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피곤해서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손바닥은 좀 쓰라렸지만 못 견딜 만한 통증은 아니었다. 고
개를 들어 보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 pp.125~126)

간절하게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버그나 몬스터의 배역 따위 없는 곳, 갚아야 할 빚도 없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하는 기억도 없는 곳, 칼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없는 곳, 사람이 상하지 않는 곳, 사라지거나 위장되는 자도 없는 곳, 그런 곳. 숲이라면 좋을 듯했다. 호수가 있는 숲, M 외에는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M만의 숲이라면 남은 인생이 긴 낮잠으로만 소모된다 해도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p.131)

곧 숲의 입구가 나왔다. 숲에선 햇빛이 부챗살처럼 부드럽게 갈라져 키 큰 관목 사이로 스며들었고, 바람 끝엔 물에 젖은 풀꽃 향기가 희미하게 실려 있었다. 백색 사슴과 외뿔 말들이 발소리도 조심해하며 고요하게 소년을 따라왔다. 새들의 지저귐이 한 번씩 들려올 때면 소년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나무 위 어딘가를 올려다보곤 했다. 드디어 호수가 나타났다. 한 발 한 발 다가가자 호숫가엔 누군가 왔다 간 흔적이 보였다. 풀잎이 한곳으로 쓸려 있는 곳엔 나무 열매 껍질과 물에 젖은 나뭇잎들이 널려 있었다. 낯익은 긴 갈색 머리카락도 몇 가닥 보였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담요와 내의, 책과 잡지, 과자와 음료수 같은 것들이 하나씩 생겨나기도 했다. 모두, M이 놓고 간 것이었다. 소년은 깍지 낀 두 손에 머리를 대고는 M이 앉았다 간 바로 그 자리에 누웠다. 이곳에서 시작되었을 이야기라면 소년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이야기는 숲의 모든 곳에 깃들어 있었고, 시시각각 걸음을 옮기는 빛을 따라 한 줌씩 소년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소년은 깜빡 잠이 들었다.
(/ pp.160~161)

저자소개

생년월일 1976~
출생지 서울특별시
출간도서 27종
판매수 7,664권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아무도 보지 못한 숲] [로기완을 만났다] [여름을 지나가다]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무영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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