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1996년 문화일보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가 당선되어 등단한 작가 김혜정의 신작 장편소설. 작가는 이번작품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소통부재를 그린 전작들과는 달리 오롯한 성장소설을 보여준다. 저자는 한 여 주인공을 등장시켜 탄생에서 초등학생을 거쳐 10대에 이르기까지 전 성장과정을 아우르며 부정과 긍정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유감없이 펼쳐보인다. '출생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까지' 등 총 4부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저자는 연령에 따라 문체까지 변화를 주며 성장기 소녀의 내면을 생생하게 그렸다.

신예작가 김혜정의 신작 장편소설『달의 문』은 이 작가의 전 소설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즉, 작가 김혜정은 이번 첫 장편소설에서 뜻밖에도 탄생에서 초등학생을 거쳐 여고생 나이에 이르기까지 한 어린 여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이전 소설들이 줄기차게 보여주던 삶의 상처라는 화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10대의 과정을 통과하며 겪는 상처와 성숙의 이야기들이 이 소설의 주요 얼개를 형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이른바 ‘성장소설’의 범주에 든다고 할 것이다.
장편소설『달의 문』은 여타 작가들의 성장소설과 달리 한 인간의 탄생 출발에서부터 유소년기를 거쳐 10대에 이르는 전 성장 과정의 다양한 삽화들을 통해 부정과 긍정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유감없이 펼쳐 보임으로써 성장기 통과의례를 애틋하게 형상화해내고 있다. 특히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전생의 기억은 이 소설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혀지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실린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달의 문』은 총 4부로 구성되어 각각 ‘출생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까지’로 돼 있다. 앞서 살펴 본 1부에서 우리는 다채로운 삽화의 전개를 통해 상처와 성숙이라는 통과의례가 순환되는 것을 확인한 바 있는데, 이 순환은 삽화의 유형만 달리하면서 이후의 장에서도 계속 반복된다. 물론 단순한 반복은 아니다. 삽화의 유형이 달라지는 건 주인공이 나이를 먹기 때문이고, 주변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달이는 계속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세상의 사건은 반복되는 법. 비슷하게 겹치며 반복되는 그 사건들이 쌓이면 어느 날 마침내 ‘시절’ 혹은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한 시기가 마감된다. 그리고 자아는 그 지점에 이르러 성큼 다른 인식의 세계로 도약한다. 총4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순환구조가 갖는 의미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작가는 한편 극적인 위기 없이 사소한 삽화가 반복되는 순환구조의 단조로움을 넘어서기 위하여 몇 가지 섬세한 문학적 고려를 하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각 장마다 배경 계절을 달리 설정했다는 점이다. 1부는 봄에서 여름까지, 2부는 여름에서 가을까지, 3부는 가을에서 겨울까지, 그리고 4부는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연대별 구성이 아니고 듬성듬성 몇 년씩 건너뛰는 연작 형식의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배경 계절은 봄에서 다시 봄까지로 한 계절을 이어나감으로 해서 4부 각 장의 서사 빛깔을 절묘하게 나누어 놓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주목되는 건 각 장마다의 문체 변화이다. 대개 장편 성장소설은 자전적인 경우가 많고 따라서 소설의 문장도 회상조 내지는 고백조 어투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회상조 문장이 작가 자신에게도 매력적이면서 쓰기 편하다. 마음껏 자기 감정을 풀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혜정은 이 소설에 작가의 감정 개입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문체에서마저 화자의 나이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때문에 독자는 소설에 구사되는 문장만으로도 이 화자의 나이 먹어감을 자연스레 인식하게 된다. 작가의 감정은 절제된 대신, 주인공 화자의 감정, 심리, 나이에 따른 성숙도 등을 마치 오래 보관해 온 일기라도 훔쳐보듯 그때그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소설이 지닌 친밀성의 미덕이라 할 만하다.
특히 이 소설은 여타의 성장소설에 비해 현재 청소년을 가르치고 있는 작가의 생체험을 바탕으로 삶의 비극적 양태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요즘 청소년들의 문화나 학교의 현실에 대해서는 매우 리얼한 묘사로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작가의 말

1. 달의 궁전
토끼,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다
사람으로 태어나다
이사를 가다
초등학생이 되다
강아지 나라
아빠의 자전거
무섭고 이상한 일
비 오는 날
달의 궁전

2. 흔들리는 나날
낯선 어둠, 낯선 고요
반장 선거
꼬마 철학자
돈을 훔치다
엄마의 편지
재능 발표회와 체육대회
빨깐 꽃잎

3. 아웃사이더
반항의 시간
비밀의 집
컴백 홈
아웃사이더
코스프레
어둠 속의 피에로
징계를 받다
미래를 볼 수 있다면

4. 시간의 저편
전생놀이
까치의 주점
고흐의 방
엄마의 애인
편입생 박헤레나
첫눈 오는 날
폭설
시간의 저편

해설
임영태

본문
1
달의 궁전
토끼,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다

나는 전생에 토끼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잘 모를 뿐, 그들도 사자나 너구리, 두더지, 앵무새 혹은 그 무엇이었다. 전생에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산에서 살았을 때였다. 하루는 숭이랑 설모와 숨바꼭질을 하며 놀고 있었는데 몹시 지쳐 보이는 할아버지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구불구불한 칡덩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비틀비틀 걸어오더니 곧 쓰러질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도와 줄 수 있겠느냐??
숭이는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 열매를 따왔고, 설모는 도토리를 주워왔다. 할아버지는 열매와 도토리를 먹고도 기운을 되찾지 못했다. 나는 차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숭이와 설모에게 불을 지피라고 일렀다. 막상 불 속에 뛰어들 것을 생각하니 두려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드디어 나는 눈을 꼭 감고 활활 솟구치는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신비스러울 만치 아름다운 달빛이 내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무들이 춤을 추고 바위틈에 핀 꽃들은 다소곳했다. 새들이 노래를 하면 동물들은 악기를 연주했다. 숲 속은 아름다웠다. 나는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차츰 숲의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내 몸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숭이와 설모가 별안간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숭이와 설모가 다가와 내 몸을 만졌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 털이 새까맣게 타버린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 장례식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때 어디선가 인자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마음 씀이 참으로 갸륵하여 소원을 들어 줄 것이니 어서 말해 보려무나.?
할아버지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어서 대답을 하라고 했다. 산에서 내려다 본 사람들의 세상은 재미있고 아름다워서 나는 꼭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 보고 싶었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오호, 사람이 되고 싶다? 맹랑한 녀석이로고.?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무슨 생각을 하더니 다시 물었다.
천 일 동안 떡방아를 찧을 수 있겠느냐??
네.?
할아버지는 달나라의 신선이었다. 누군가 천 일 동안 계속해서 떡방아를 찧지 않으면 달나라가 온통 어둠에 잠겨버릴 거라고 했다. 그 동안 어느 동물도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며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찼다. 사람으로 태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 일째 되는 날 달궁에 가서 기다리면 너의 부모님이 올 것이니라.?
나는 날마다 정성을 다해 떡방아를 찧었다. 나무마다 울긋불긋 단풍이 물드는 가을,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이는 겨울, 보얀 아지랑이 사이로 산수유가 피어나는 봄, 초록빛 잔치가 열리는 여름이 두 번씩 지나갔다. 다시 한 번 나뭇잎이 떨어지고 개구리와 뱀이 겨울잠을 잤으며, 수런거리는 꽃들 사이로 나비가 날았다. 며칠씩 비가 계속 내리다 그치면 햇살은 더욱 찬란했고 나뭇잎들은 무성해졌다. 물소리가 콸콸 천지에 진동하고 계곡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드디어 내가 떡방아를 찧기 시작한 지 천 일째가 되었다.
동녘에 희붐한 빛이 피어올랐다.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가 잎을 후르르 떨고 기지개를 켰다. 나는 물푸레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옹달샘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낮 동안 새들은 이 나무 저 골짝을 넘나들며 재잘거렸다. 건너편 산등성이에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나는 이제나저제나 내 부모님이 될 사람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날이 저물었다. 하늘이 온통 달빛으로 채워졌는데도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끝내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천 일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입에 침이 말랐다.
드디어 사방이 깜깜하고 고즈넉했다. 이따금씩 우우웅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두 발을 꼭 모아 간절히 빌었다.
여기다, 바로 여기야. 이 바위 맞지??
그래. 그렇게 찾아 헤맸는데 드디어 찾았다.?
하나도 안 변했어. 삼 년 전에 왔던 그대로야. 바위 모양도, 이끼도…….?
정말이야. 이 나무들, 숲 좀 봐. 저 달빛도. 달궁이야.?
여자와 남자가 도란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른 후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동그란 얼굴에 눈이 가느다랗고 입이 컸으며 통통한 몸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