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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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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최승범
  • 출판사 : 생각의힘
  • 발행 : 2018년 04월 13일
  • 쪽수 : 200
  • ISBN : 9791185585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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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남자가 무슨 페미니스트야?
최승범은 강릉 명륜고등학교의 국어 선생님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800여 명의 남학생들이 모여 생활하는 학교에서는 온갖 육두문자와 힘자랑이 오간다. 귀에는 ‘따먹다’라는 단어가 수시로 꽂힌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그냥요” “재미있잖아요” “세 보여서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일생을 통틀어 성욕이 가장 충만한 시기라더니 대뜸 “섹스!”를 외치는 학생들도 있다. 자연스러운 욕망임을 알지만 저자는 남학생들이 그런 방식으로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 안타깝다.
아직도 많은 학교에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처럼 여성을 성취의 보상으로 여기는 급훈이 걸려 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페미니즘이 남성의 삶과도 맞닿아 있으며 여성만큼이나 남성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는 데 있다.
최승범은 어딜 가도 군대 문화와 폭력, 음담패설이 빠지지 않는 남성 문화에, 만취하지 않고서는 진솔한 대화와 허심탄회한 관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의문을 가진다. 여성의 삶도 기구하다 여기지만 결국 저렇게 되고야 마는 남성의 삶도 이상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의문은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조금씩 풀린다.

출판사 서평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최승범은 대학 시절, 페미니즘 학회에 나가던 후배의 말을 계기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왜 페미니즘을 공부해?” 후배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그 후로 최승범은 본격적인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공기처럼 들이마신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쉽지 않다. 그에게도 여성의 공포와 분노에 공감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나 같은 선량한 사람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다니, 구조적 문제에 눈 감고 여성의 호소에 귀 닫은 채 ‘나의 무고함’을 주장하느라 바빴던 적이 있었다는 얘기다.
밤늦게 우연히 만난 여성 지인에게 ‘이 밤에 아이는 누가 봐주고 있는지’를 물었다가 아차, 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자신이 얻었던 무형의 이득들, 특히 평온한 가정에서의 일상이 ‘여성’인 어머니에 대한 착취로 가능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시대와 구조 속에서 묵묵히 살아낸 어머니의 삶을 복기하며 가해자이자 공모자로 복무해온 자신과 아버지를 돌아보게 된다.
남자니까 잘 모를 수 있다. 이 정도면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는 게 아닌지, 남자라고 해서 좋은 것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군대에 2년을 묶이고 남자라고 툭하면 몸 쓰고 힘든 일은 도맡아서 다 했는데,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도 착실히 짊어질 것이며 나는 잠재적 범죄자도 아닌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2015년부터 다시금 불타오른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열풍을 바라보며 온갖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니 알아보자. 모르겠으니까 배워보자. 여성들이 대체 왜 저렇게까지 분노하고 매일을 시끄럽게 떠드는지를 말이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 구도에서 페미니즘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건 완전한 오해다. 최승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께 페미니스트가 되자. 잃을 것은 맨박스요, 얻을 것은 온 세계다.”

800명의 남학생과 함께
삶을 위한 페미니즘 수업!
최승범은 ‘남페미’로서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한다. 그것은 일상의 최전선에서 같은 남성들을 향해 발언하는 것이다. 그는 남학생들을 향해 조심스럽고 은근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성평등을 이야기한다. 동료 남교사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 또한 병행하면서.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프로불편러’로 상상한다. 강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 페미니즘 전파 의지를 불태우며 학교 곳곳에서 투쟁할 것 같다고 예상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매우 은근하게, 슬며시 얘기한다.
연애 시절 아내의 손을 잡고 싶어 마음을 졸였을 때만큼이나 남학생들에게 페미니즘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잡는 게 조심스럽다. 국어 교사인 내가 ‘여러분, 오늘은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해 알아볼까요?’라는 식으로 뜬금없이 던지는 경우는 결코 없다.”
_본문에서

그가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방식은 철저히 국어 교과서의 텍스트를 통해서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 생원이 친구 조 선달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하는 성 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에 대해 최승범은 학생들에게 묻는다. 성 서방네 처녀는 과연 그 성관계에 동의했을까?
《문학》 교과서에서는 이육사의 〈절정〉과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각각 ‘남성적 어조’와 ‘여성적 어조’로 설명한다. 단정적인 표현을 쓰고 명령형 말투를 쓰는 것은 ‘남성적 어조’, 부드럽고 차분하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담긴 것은 ‘여성적 어조’라는 설명이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있기 때문인지 학생들은 그러한 설명을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거 구려요.” 학생들이 말한다. 최승범과 학생들은 함께 묻는다. 이 용어는 적절한 걸까?
물론 저자의 마음처럼 모든 학생이 함께 고민하지는 않는다. ‘선생님이 지나치게 예민하다’며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욕으로 초토화되거나 “여자 편을 너무 많이 들어서 가끔 기분 나쁨”이라는 불평이 적힌 교원 평가가 날아오기도 한다.
최승범은 그런 학생들을 이해한다. 자신이 보고 들은 어머니의 삶과 달리 학생들이 주로 보고 겪은 여성은 늘 감시자, 통제자, 처벌자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여성혐오 천지의 사회문화 속에서 여성혐오를 여성혐오로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러니 학생들은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데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변화는 감지되고 있다. 국어 수업 시간, 교과서에서 ‘처녀’를 [+인간] [-남성] [-결혼]이라는 의미 자질로 설명하는 것에 “이거 성차별 아니에요?”라고 먼저 물어오는 학생이 생긴다. ‘결혼하면 집안일을 많이 돕겠다’는 친구의 말에 ‘돕는 게 아니라 같이하는 거’라고 말하는 학생이 생긴다.
교사가 새로운 시각과 다른 목소리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은 스스로가 깨치고 길을 터나갈 수 있다.

기왕 올 세상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하자
남자가 바뀌는 만큼 새날은 빨리 온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페미니즘은 더 많은 사람에게 보편 인권을 보장해온 역사의 물줄기에 올라타 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막거나 외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김치녀'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단속했던 여성들이 이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데, 남성들은 ‘한남충’이 되지 않기 위해 여전히 여성을 단속하려 든다.”
_본문에서

그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남성들이 변해야 새날은 더 빨리 온다는 것,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압할 시간에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 이 거대한 물결이 이상한 게 아니라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도태될 거라는 사실이다.
결국 최승범의 이야기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도태되지 말자는 계산적 권유임과 동시에 성평등한 사회에서 여성들과 함께 온 세계를 얻자는 순수한 요청이다.
변하는 학생들을 보며 그는 희망을 느낀다.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나 이제는 동지가 된 친구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남성이자 페미니스트 선생님으로서 800명의 남학생과 동료 교사들을 향해 발언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확인한다.
나에게 유리한 쪽보다 우리에게 유익한 쪽에 서기, 그 명료한 지향이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교육은 아닐까. 우리에게 유익한 쪽이 비단 여성들만이 발 디딘 세상은 아닐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다른 면에서 진보적 가치를 견지하는 사람이 여성 인권만 탄압하는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르크스를 모르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창피한 일이라면, 시몬 드 보부아르를 모르면서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자기가 누리는 무형의 이득은 알기 어렵다지만, 선택적 옹호는 낯 뜨거운 일이다. 일관성을 유지하든가 그냥 입을 다물고 있든가 둘 중 하나만 해야 하지 않을까.
_ 3장 선생님, 혹시 주말에 강남역 다녀오셨어요?, 79쪽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며 아내에게 육아를 떠넘기지만, 직장에서 여자 동료가 육아휴직을 내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남자들 여럿 봤다. 우리 집 청소, 빨래, 설거지는 아내가 다 해야 하지만 우리 부서 여직원의 퇴근이 빠른 건 기분 나쁘다는 남자들 많이 봤다.
학교에 여교사가 많아 남자아이들의 ‘올바른’ 성역할 학습이 우려되지만, 집에서 엄마만 아이를 돌보는 건 남자아이 교육과 아무 상관없다는 남자들 엄청 봤다.
남자만 군대 가는 병역법은 남자가 만들었는데, 욕은 여자가 먹는다. ‘홀수 번호만 청소하라’고 지시한 담인 대신 청소에서 면제된 짝수 번호를 미워하는 꼴이다. ‘남자답게’ ‘남자가 쪼잔하게’ ‘남자가 우냐?’와 같은 말로 남성성을 자극하고 남성성의 스펙트럼을 좁히는 쪽도 대개 남자들이다.
가부장제와 호모소셜은 남자라면 모름지기 처자식이 있어야 하며, 그들을 부양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신화를 만들었다. 남성이 느끼는 경제력 부담은 가부장제에서 출발했는데 분노한 남성들의 공격은 여성을 향한다.
_ 3장 선생님, 혹시 주말에 강남역 다녀오셨어요?, 88~89쪽

침묵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피켓을 드는 것, 구호를 외치는 것, 이웃을 설득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그보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걸 하고 싶었다.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긴 호흡으로 계속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교사였고 내게는 800명의 남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이 기성세대 남성과는 다르게 자랄 수 있다면, 눈과 귀와 가슴을 열고 세상으로 나간다면, 그보다 보람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아가 매년 수백 명의 남학생을 가르치고 앞으로 수천 명의 남학생을 가르칠 동료 교사들에게 작은 영향이라도 끼칠 수 있다면, 이보다 이상적인 실천은 없다고 생각했다.
_ 4장 800명의 남학생과 함께, 107쪽

NO를 NO로 받아들일 것. 완곡한 거절을 YES로 이해하지 말 것. ‘싫어요, 싫어요 하다가 좋아요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남자들이 남자를 위해 만든 판타지니 절대로 믿지 말 것. 강제로 여성의 팔을 잡아끌면 납치, 싫다는데 회사 앞에서 기웃거리면 스토킹, 벽에 밀치고 키스하면 폭력이니 셋 다 하지 말 것.
제발 멋대로 넘겨짚지 말며 포르노를 현실 세계에 대입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_ 4장 800명의 남학생과 함께, 119쪽

《문학》 교과서에는 이육사의 〈절정〉과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한쪽 귀퉁이에는 ‘남성적 어조’와 ‘여성적 어조’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영 마뜩잖았다.
거기서는 남성적 어조의 특징을 ‘단정적 표현과 명령형 말투’라고 설명하며 힘차고 씩씩한 느낌을 주므로 주장 전달이나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여성적 어조의 특징은 ‘부드럽고 차분한 어조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라고 설명하며 기원이나 체념에 주로 쓰인다는 말을 덧붙였다. 청유형 문장이 자주 사용되며 주로 존댓말을 쓴다는 것도 특징으로 꼽았다.
“이거 구려요.” 용어의 적절성을 묻기도 전에 학생들이 먼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 구리다. 남성적 어조, 여성적 어조라는 개념을 창안한 사람이 성차별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다. 별 의식 없이 단지 현실이 그러하니까 그렇게 이름 붙였을 수도 있다.
악의가 없어도, 때로는 무지만으로도 나쁜 결과를 낳는다.
_ 4장 800명의 남학생과 함께, 121~122쪽

목차

프롤로그
남자가 무슨 페미니스트야?

1장 어머니와 아들
우리 집이 이상하다
가난한 집 딸의 팔자
페미니즘 사고의 시작
중년 여성의 자리
다른 집도 다 이러고 산다고?
어머니의 우울증

2장 페미니즘 공부하는 남자
선의와 양심에만 의존하는 것은 불안하다
성폭력 사건은 어떻게 일어나나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근엄해 보이는 가부장제의 비열한 그늘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학생과 교사로 만났지만 이제는 동지

3장 선생님, 혹시 주말에 강남역 다녀오셨어요?
내가 침묵하지 않았더라면
왜 여혐범죄라고 말을 못해?
동지는 간데없고 일베 깃발만 나부껴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남자에겐 관대하게 여자에겐 엄격하게
피해자에게 따지는 한국 사회
통계로 보는 한국 여성의 삶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4장 800명의 남학생과 함께
삶을 위한 페미니즘 수업
〈메밀꽃 필 무렵〉, 성폭력을 미화하는 거 아닐까?
〈춘향전〉, 예나 지금이나 여성은 노리개
이육사는 남성적 어조, 김소월은 여성적 어조?
〈사씨남정기〉,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서프러제트〉, 현재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자
[+인간][-남성][-성숙]이 ‘소녀’라니

5장 혐오와 싸우는 법
남초 집단에서 발언해야 하는 이유
잘못 겨눈 과녁, 그리고 혐오가 이뤄낸 좌우 통합
차별의 역사적 연원
남고에서 페미니즘을 전합니다
학생들의 비난에 대처하는 법
동지는 어떻게 규합하는가
유리한 쪽보다 유익한 쪽에 서기

에필로그
함께 지옥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부록│남페미를 위한 커리큘럼

이 책을 후원해주신 분들

본문중에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도 비슷한 편견을 드러낸 적이 있다. 얼마 전 지역의 여성 정당인을 밤늦게 우연한 자리에서 만났는데, 무심코 아이는 지금 누가 봐주는지를 물은 것이다. 아차, 실수했다 싶었다.
여태껏 숱한 남성들을 늦은 밤에 만나왔지만 그들에게는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 오랫동안 공부하고 성찰했으니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울 거라 여겼는데 오만한 생각이었다. 30년 넘게 한국 남자로 자라며 공기처럼 마신 여성혐오는 사고의 기저에 뿌리박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_ 1장 어머니와 아들, 28~29쪽

최규석의 웹툰 〈송곳〉의 대사처럼, 그물처럼 깔려 드러나지 않는 규칙은 권력에게 너그럽다. 폭력이 나쁘다는 걸 몰라서 선생이 학생을 때려온 게 아니다. 다들 그러니까, 늘 그래왔으니까, 그러면 편하니까, 그래도 탈이 없으니까 때렸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자 교사의 관성적 폭력을 구속할 법적 근거가 생겼다. 폭력 교사들은 그제야 하나둘 몽둥이를 내려놓았고 조례가 없는 시?도 교육청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교사들은 더러워서 참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다칠까 봐 참는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는 매년 교원들에게 ‘성 비위(非違) 사건 방지 서약서’를 받는다. 상당수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서명하고, 간혹 죄인 취급을 받는 것 같다며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그 불쾌감 때문에라도 각인 효과와 경각심이 형성될 테니 충분한 예방 효과가 있을 것이다.
_ 2장 페미니즘 공부하는 남자, 43~44쪽

“설거지는 아버지랑 삼촌이 하시는 게 어때요?”
참다못해 던진 한마디에 일순간 싸늘한 정적이 찾아온다. 불편한 헛기침이 몇 번 오가면 어머니가 옆구리를 쿡 찌른다. 그렇게 또다시 여성을 희생시켜 가정의 평화를 얻고 며느리를 착취하여 화려한 밥상을 받는다. 근엄해 보이는 가부장제의 비열한 그늘이며 가족애의 가면을 쓴 불편한 동거다.
아들로 태어난 나는 금수저인데 딸로 태어난 지연이는 흙수저다. 명절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설거지를 하면 “우리 아들 좋은 남편 되겠네”라고 하지 “우리 아들 장가가도 되겠네”라고는 안 한다. 딸이 설거지를 하면 “우리 딸 시집가도 되겠네”라고 하지 “우리 딸 좋은 아내 되겠네”라고는 안 한다.
똑같은 설거지인데 누구한테는 고급 스펙이고 누구한테는 기본 소양이다. 조상님 보시기에는 어떨까. 퍽 좋아하실까.
_ 2장 페미니즘 공부하는 남자, 55~56쪽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강력범죄 피해자 열 명 중 아홉 명이 여성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남성이 다수인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이례적인 수치다.
그래서인지 남자도 다른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할 때가 많다. 호신용 스프레이를 사 주는 마음, 술 마시고 정신을 잃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 밤늦게 택시를 탈 때 불안해하는 마음이 그렇다. 여동생-딸-아내가 늦게 들어오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고 화내는 오빠-아버지-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모든 남자가 잠재적 가해자는 아니다’라는 말은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오늘 밤에도 수만 명이 느낄 공포 앞에서 나만은 고결하다며 항변하는 태도가 온당할까. 나의 무결함을 증명할 시간과 에너지로 다른 이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흔들리는 배 위에서 혼자 중립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개인인 나는 떳떳하더라도 구조적으로 남성인 나는 가해자일 수 있으니까.
_ 2장 페미니즘 공부하는 남자, 60~61쪽

강남역 살인사건 자체에도 기함했지만, 이후 과정은 더 충격적이었다. 어떤 언론은 범인의 이력을 언급하며 그를 변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신학을 공부해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이었으나 여성에게 무시당해 피해의식이 생겼다며 동정을 내비쳤다. 다수 남성들이 보인 반응은 그보다 더 경악스러웠다. 그들은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여성들의 공포에 공감하지 못했다. 선량한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한다며 오히려 화를 내고 있었다.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더 말했어야 하는데. 거기서 멈추면 안 됐는데. 나와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 중에도 지금 이들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있을 텐데.
그런 생각들이 반복됐다. 나도 가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_ 3장 선생님, 혹시 주말에 강남역 다녀오셨어요?, 7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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