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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원제 : South of Forgiv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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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16년 전 강간의 진실을 증언하다!
“강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2016년 10월, 샌프란시스코 테드 강연장은 그 어느 때보다 열띠면서도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성폭력 생존자 여성과 가해자 남성이 함께 단상에 오른 유례없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강연 주제는 ‘강간과 화해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Our story of rape and reconciliation’였다. 두 사람은 차분한 어조로 16년간 그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 즉 강간부터 회피와 부인, 참회와 용서까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연을 고백하면서 전 세계에서 매일, 매시간 벌어지는 성범죄의 위험성을 알렸다. 나아가 성폭력을 여성의 이슈로만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대다수 성폭력의 당사자인 ‘남성’이 함께 참여할 때라고 호소했다. 아이슬란드 작가 토르디스 엘바와 호주의 청소년지도사 톰 스트레인저가 바로 그 주인공으로, 그들 이야기는 지난 1년간 415만이라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전 세계 22개 언어로 전파되었고 올봄 [용서의 나라South of Forgiveness]라는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출판사 서평

★★★ 테드 강연 415만 뷰 ★★★
★★★ 22개 언어로 강연 번역 ★★★
★★★ 2017 런던 도서전 화제작 ★★★
★★★ 전 세계 11개국 계약 ★★★


1996년 겨울, 열여섯 소녀가 교환학생 자격으로 아이슬란드에 유학 온 열여덟 살 호주 소년에게 강간당하고 버림받는다. 사건 후 9년 동안 섭식 장애, 알코올 의존, 자해 등 삶의 벼랑에서 몸부림치던 여자는 마지막 절규인 양 고국으로 돌아간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놀랍게도 절절한 후회와 진솔한 참회로 가득한 답장이 도착한다. 여자와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해 이후 8년간 300통의 서신을 주고받는다. 그렇게 상호 이해에 도달한 그들은 지난 삶을 욱죄어온 사건의 매듭을 풀고, 어둡고 아픈 시간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직접 대면하기로 결심한다. 2013년 봄, 각자 살고 있던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와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중간 지점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일주일간 재회하게 된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성범죄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서 폭력과 증오, 수치와 혐오로 점철된 과거의 삶을 하나씩 벗겨내며 용서와 화해의 길로 다가선다.

[용서의 나라]는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사건의 진실을 밝히며, 폭력과 증오의 기억을 용서와 치유의 시간으로 변모시킨 여정을 기록한 실화 논픽션이다. 성범죄 역사에서 생존자와 가해자가 자발적 의지와 노력으로 16년에 걸쳐 소통하고 대화한 사례는 흔치 않을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진정한 참회’와 ‘생존자의 온전한 용서’가 함께 이루어진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런 점에서 [용서의 나라]는 성범죄를 둘러싼 당사자들의 대처 방법과 성폭력 담론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과도 같은 작품이다(물론 두 주인공은 그들의 사례가 결코 ‘공식’이 될 수 없다며 겸양의 태도를 보인다). 본문에도 인용된 성범죄 전문가의 말처럼 성추행, 성폭력, 강간은 그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매일, 매시간, 매분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일상이다. 낯모르는 습격자가 아니라 가족, 친척, 지인 등 익숙한 얼굴로 도처에서 평범한 일상을 위협하고 있기에 더 위험하다. [용서의 나라]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도 영구적인 폭력으로서 강간이 일상화된 오늘의 현실을 아프게 일깨우면서, 남녀 모두가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이 문제에 동참할 것을 뜨거운 체험의 언어로 호소한다.

성폭력 생존자,
자기보호의 방편으로 용서를 선택하다


“용서가 유일한 길이야. 그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나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까.”

성폭력 생존자인 토르디스는 어떻게 가해자 톰을 용서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그녀의 애정과 신뢰를 한순간에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을 채우고 떠나버린 그를 말이다. 그에게 강간당하던 두 시간이 7200초로 이루어져 있음을 뚜렷이 기억할 만큼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사건 이후 9년간 어느 누구와도 안정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자기부정, 자기살해의 길로 치달았다. 그러다 마침내 삶이 절벽에 부딪혔을 때, 놀랍게도 ‘용서’라는 단어가 그녀를 찾아온다.

"그가 나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나는 용서하고 싶어’라는 문장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용서라니, 내가 전혀 생각해본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만남을 제안한 이유는 그를 한껏 움츠러들게 할 말을 그의 뇌리에 콕 박히도록 퍼부어서, 남은 평생 자나 깨나 그 말에서 그가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놓고 싶어서였다. 그 남자로 인해 나도 그런 현실에 처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용서’라고? 그 단어가 내 펜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위안도 느꼈다. 정말이지 쓰라린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나는, 나를 가두고 있던 새장의 열쇠를 마침내 찾아냈다는 걸 깨달았다. 엄청난 발견이었다. 그것도 막 단념하려던 차에. "
(/ 본문 중에서)

글쓰기와 강연 등 작가로서 주목받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파행의 삶으로 치닫던 그녀에게 용서는 바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던 셈이다. “내가 하려는 용서는 숫돌에서 나온 서슬 퍼런 것이고 속박을 끊기 위한 것”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토르디스의 용서는 무조건적이며 사심 없는 종교적 용서가 아니다. 오히려 성폭력 트라우마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이자 자구책에 가깝다. 그래서 그녀의 용서는 여전히 날이 서 있다(그녀의 이름 토르디스는 신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천둥의 신 토르의 여신을 뜻한다). 세계에서 성범죄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서 보호자 없이 홀로 가해자 톰을 대면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이뿐만이 아니다. 톰과 재회한 케이프타운에서 끔찍한 폭력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다음 행보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방문한다. 넬슨 만델라를 비롯해 남아공 인종차별정책에 항거하던 사람들을 가두었던 로벤 섬을 톰과 함께 방문하는가 하면, 케이프타운 강간위기센터를 찾아가 성폭력 피해자들의 현주소를 확인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제의 극단적 형태로서 아파르트헤이트와 강간의 교집합을 논하다 톰과 갈등을 일으켜 대화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성범죄와 관련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는 ‘세계 제일의 강간 도시’야말로 최상의 시험장이 될 것이다. 게다가 용서를 실현하기에 사회 제도 전체를 진실과 화해로 다시 세운 남아공보다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남아공은 민족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27년이나 되는 수감 생활을 하고도 보다 나은 사회를 세우자는 의미에서 자신을 박해한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한 곳이 아니던가?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폭력이 내 인생을 망가뜨릴 수 없고 내 선택을 제한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기에 이보다 나은 곳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 본문 중에서)

자기보호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토르디스는 결과적으로 종교적 용서에 버금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를 성취한다.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람에게 이해가 곧 용서라고 말하며 오랫동안 소통의 의지를 보여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연민과 자기부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톰으로 하여금 과거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도록 돕는다. 그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범죄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오랜 죄의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꽃피울 수 있도록 격려한다. 여전히 몸은 고통을 기억하고 마음은 분노의 불길에 휩싸일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용서를 선택함으로써 토르디스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해자 톰도 평정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끈다. 이 대목에서 토르디스는 치유자의 면모를 보이며, 성폭력 당사자들이 이 문제의 강력한 조력자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영혼의 실례實例”라는 찬사가 결코 지나치지 않는 인물이다.

"16년의 세월이 지난 성폭행 사건의 뒷수습이 이렇게 유례없이 지순해지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성폭행이 일어난 후 토르디스와 톰이 이메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8년의 세월 동안 톰은 강간을 부인하거나 회피했다. 토르디스 역시 피 흘리고 멍투성이가 된 상태에서조차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무슨 일인지 몰랐다. 지구 반 바퀴의 거리, 16년이라는 세월만큼의 어마어마한 간극이 강간과 용서 사이에 있었고 그 간극을 메운 도구는 다름 아닌 소통이었다. 무려 300통에 이르는 이메일 편지와 일주일의 맞대면으로 토르디스와 톰은 궁극의 용서와 화해를 얻어냈다. [용서의 나라]는 치열했던 그 소통의 기록이며 두 저자가 십 대 시절의 폭력으로 시작된 굴곡진 세월을 끝내 건강하게 이겨낸 생생한 성장담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성폭력 가해자,
전례 없는 방식으로 용서를 구하다


“나도 일원이 되고 싶어. 나도 문제의 한 축이 아니라
해결의 한 축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

열여덟 살 때 저지른 일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힌 채 부인하며 살아가던 톰은 9년 후 토르디스가 보낸 메일을 받고 얼음처럼 굳어버린다. 그녀가 톰이 한 일을 ‘강간’이라고 명확하게 지칭하고 언어화하자 톰은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고, 자신의 무의식 속 기억의 공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기억의 틈새를 진실이 밀물처럼 밀려와 메워주기를 소망한다. 성폭력 사건을 부인하고 회피하던 때가 있었다는 점에서 여느 가해자와 다를 바 없지만, 옛 연인이자 피해자인 토르디스의 요구에 응하며 8년간 300통의 메일을 주고받고 일주일간 맞대면하는 용기를 보여준 그는, 가해자가 취해야 할 가장 모범적인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토르디스와 만나 과거의 사건을 퍼즐 조각 맞추듯 정확하게 파악한 후로는 진심을 다해 토르디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청한다.

“미안해.” 그가 속삭였다.
“그게 정말 네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나도 속삭였다.
“아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용서해달라는 말이야. 토르디스, 너를 강제로 범한 나를 용서해줘.”
나는 열대 폭풍 한가운데 호텔방에서 흐느끼는 남자가 내가 반평생 동안 듣고 싶어 했던 말을 토해내는 걸 듣고 있었다. 치유, 버팀목, 해독제라고 생각하며 갈망하던 말이었다.
(/ 본문 중에서)

모든 성폭력 피해자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이 두 마디를 톰은 필요한 순간 정확하게 토르디스에게 전달한다. 상대의 몸과 마음에 영구적인 폭력을 가한 스스로를 괴물이라 칭하며 사죄를 구하는 순간 톰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파렴치범 무리에서 구원하게 된다. 그에게 두 번째 인생, 두 번째 기회가 열리는 순간이다. 토르디스가 자신의 분노와 상처를 열어 보일 때면 ‘부디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전부 말해달라’고 용기 있게 청함으로써 그는 회피하고 부인하던 가해자 포지션에서 벗어난다.

“자기 행동을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최선을 다해 보상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으면 넌 어떻게 해? 가만 앉아서 그들을 비판해? ‘와,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있나’라고 생각해?”
“아니, 그러지는 않아.”
“바로 그거야. 반대로 말해보자. 실수를 진심으로 후회하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네가 그 사람이 되어봐.”
(/ 본문 중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기. 그리고 다시는 같은 범죄를 되풀이하지 않기. 나아가 같은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자신의 과오를 공개하고 세상의 비난을 견디며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 협력하기. 톰은 토르디스와 용기 있게 대면함으로써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며, 스스로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는 데 성공한다. [용서의 나라]가 바로 그 결과이자 증거이다.

“난……이번 주에 정말 많이 배웠어. 강간의 정체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너한테 행한 내 행동의 영향에 대해서도. 혼자서 판사, 배심원, 검사가 되어 스스로에게 형을 선고해도 득 될 게 전혀 없다는 것 또한 확실히 알게 됐어. 난 이걸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느껴……자기가 초래할 수 있는 해악, 그리고 그런 짓을 하는 몇 가지 이유에 대한 이 깨달음을 공유해야 해. 내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답을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만 유별나고 독특해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 ‘확신’하니까. 난 수많은 경우 가운데 하나였어.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다들 아무 말을 안 해. 아마 더 깊이 들어가는 게 무섭겠지. 나는 ‘뭔가’ 말을 하고 싶어. 네가 책으로 했듯이 말이야. 토르디스, 나도 목청 높여 세상에 알려서 우리 같은 사연이 되풀이될 가능성을 줄이고 싶어. 그리고 우리가 편지만 계속 주고받을 뿐 이렇게 일대일로 대면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 세상에 공개적으로 나서겠다는 말도 안 했을 거고. 그리고 분명,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나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과정도 밟지 못하고 있었을 거야.”
(/ 본문 중에서)

목차

서문을 대신하며

7년 5개월 후 | 2012. 10. 21.

첫째 날 | 2013. 3. 27.

둘째 날 | 2013. 3. 28.
톰의 일기 | 목요일

셋째 날 | 2013. 3. 29.
톰의 일기 | 금요일

넷째 날 | 2013. 3. 30.
톰의 일기 | 토요일

다섯째 날 | 2013. 3. 31.(부활절)
톰의 일기 | 일요일

여섯째 날 | 2013. 4. 1.
톰의 일기 | 월요일

일곱째 날 | 2013. 4. 2.
톰의 일기 | 화요일

여덟째 날 | 2013. 4. 3.
톰의 일기 | 수요일

아홉째 날 | 2013. 4. 4.
톰의 일기 | 목요일

에필로그 | 2016. 4. 7.

집필에 대하여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본문중에서

몇 주 후 어느 황량한 오후에 나는 연인과 싸운 뒤 흐느끼며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 낙서를 하면서 마음을 좀 진정시키고자 가방에서 수첩을 꺼낸 뒤 웨이트리스에게 펜을 부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낙서가 글자로 변하더니, 글자는 다시 문장으로, 문장은 다시 내가 써본 편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편지로 변하는 것이었다. 나를 범했던 사람에게 쓰는 편지였다. 그가 나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나는 용서하고 싶어’라는 문장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용서라니, 내가 전혀 생각해본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만남을 제안한 이유는 그를 한껏 움츠러들게 할 말을 그의 뇌리에 콕 박히도록 퍼부어서, 남은 평생 자나 깨나 그 말에서 그가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놓고 싶어서였다. 그 남자로 인해 나도 그런 현실에 처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용서’라고? 그 단어가 내 펜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위안도 느꼈다. 정말이지 쓰라린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나는, 나를 가두고 있던 새장의 열쇠를 마침내 찾아냈다는 걸 깨달았다. 엄청난 발견이었다. 그것도 막 단념하려던 차에.
(/ pp.25~26)

“나는 너를 ‘강간범’이라고, 적어도 ‘나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돼. 그렇지만 그 말이 곧 너를 말하는 건 아니야. 절대 아니지. 그 말로는 네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십 분의 일도 나타낼 수가 없어. 난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있어. 하지만 그게 날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 수는 없어. 난 가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게 날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난 강간당한 적이 있지만 그게 날 ‘희생자’로 만들진 않아.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해. 요지는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딱지표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그날 밤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 p.177)

그가 벌떡 일어나 초조하게 움직이더니 침대 맞은편 벽으로 걸어갔다. “네 옷을 전부 벗겼어. 벌거벗고 내 몸 아래 누워 있던 네가 기억난다. 침대에 대각선으로 누워 있었어……나는 셔츠를 벗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지.” 그가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나 오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 했어.”
“두 시간이야.” 내가 건조하게 말했다. “네가 날 눕힌 자리에서는 바로 눈앞에 시계가 보여서 똑똑히 봤어. 형광 시계여서 캄캄해도 보였어. 나는 머리는 활짝 깼는데 몸은 여전히 꼼짝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뒤척이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어. 할 수 있는 거라곤 일이 끝날 때까지 일분일초를 세는 것밖에 없었어.”
창밖에서 바람이 처참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두 시간은 7200초야.” 내가 덧붙였다.
톰이 울기 시작했다. “토르디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어.”
“무슨 짓?”
“너를 강간한 거.”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바로 들은 건가 싶어서 눈을 깜박였다. “너 뭐라고 했니?”
“내가 너를 강간했어.”
그의 목소리가 허공에 매달렸다. 면도칼처럼 날카로웠다.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었다. 지면으로는 그의 고백을 이미 읽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 내 면전에서 그가 소리 내어 말로 인정하자 그 충격이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갑자기 내 마음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침대에 엎어지고 말았다.
(/ p.188)

나는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마음에 두려움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몇 년 동안 우리 두 사람은 이 순간을 향해서 걸어왔다. 바야흐로 우리가 걸어갈 길에 대해 그녀가 완벽하게 준비를 갖췄다는 것에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녀의 태도엔 전혀 긴장이 보이지 않았고, 그런 고요함 때문에 나도 좀 더 느긋해질 수 있었다. 바람이 몰아치는데 이상하게도 실내는 고요했다. 서로 양해가 된 상황인 것 같았다. 우리 둘이 수행하고 있는 작은 예식도 그랬다. 우리에게 남아 있던 두려움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싸여 전부 사라져버렸다.
(/ p.212)

눈물이 차오르고 소름이 돋았다. 세계사의 기념비적인 한 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니 가슴이 벅찼다. 그토록 망가진 과거를 가진 나라에서, 뭇사람들이 내가 멸시하길 기대하는 남자와 나란히 서 있다니 가슴이 벅찼다. 바로 그때 톰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아무것도 모른 채 경쾌하게 들어왔다. ‘복수로 내가 얻은 건 하나도 없어.’ 그의 손에서 커피를 받아 들며 생각했다. ‘어둠과 정체만 있었지.’ 증오가 몇 세대에 걸쳐 세상을 지배하다가 마침내 패배하고 물러난 이 나라에서 수난이란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고 배움의 기회가 된다는 희망을 나는 찾았다. (/ p.26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적 있어?” 내가 물었다.
그가 시선을 피했다. 우리 눈이 다시 마주쳤을 때 그의 영혼이 활짝 열려서 나는 놀랐다.
“응, 한입 먹은 적 있어.”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무얼 말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나도 거기 있었으니까.’
갑자기 산 위의 구름이 갈라지며 해가 나와서 우리를 금빛으로 흠뻑 적셨다. 내 무릎이 풀리면서 뺨으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헬륨 풍선처럼 부풀어 갈비뼈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톰이 잔디밭 위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의 눈빛에 걱정과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안전해.” 잠긴 목을 풀며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 안전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가 성지로구나.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야.”
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내 말을 존중해주었다.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나는 마음껏 눈물을 흘렸다. (/ p.342)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지난 16년간 우리 이야기의 무게를 짊어졌던 돌을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 나무옹이 하나에 박아 넣었다. 아몬드 모양으로 갈라진 옹이는 사람 눈처럼 보였는데 그 틈에 돌을 넣으니 마치 금갈색 눈동자처럼 보였다. 크기가 아주 딱 맞지는 않아서 돌이 둥근 틈에서 조금 튀어나왔지만 신기하리만치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돌을 그곳에 박아 넣으니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나는 뒤로 물러나 미소를 지었다. ‘우리를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이야기를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끝맺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침묵의 기도였다. 이날 올렸던 많은 기도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나무를 쓰다듬으며 작별 인사를 한 후 화단에서 나왔다. 톰은 좀 더 머물렀다. 바오바브나무의 툭 튀어나온 눈 옆에서 뱀의 독니 같은 선인장과 늘어진 나무 가지들에 둘러싸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톰의 모습이 내 기억에 각인되어 영원히 남을 것 같았다.
(/ pp.356~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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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토르디스 엘바(Thordis Elva)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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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연극을, 대학원에서 출판 편집을 공부하고 작가, 저널리스트,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슬란드에서 ‘2015년 올해의 여성’으로 뽑혔고, 직접 쓴 희곡을 아홉 편이나 연극 무대에 올렸으며, 수백 건의 재판 서류와 변호사, 의사, 생존자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성폭력 관련 책을 써서 아이슬란드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2011년 평등 캠페인을 직접 펼쳐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2012년 학교 폭력 예방과 성교육 프로그램용 영상물을 제작하여 단편 영화상을 수상했다. 아이슬란드 여성보호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정부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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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스트레인저(Tom Stranger)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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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사회과학을, 대학원에서 문화 연구를 공부했다. 청소년지도사로 오랫동안 활동해왔고 지역 봉사, 야외 레크리에이션, 자선 단체, 건축 및 서비스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으며 살아왔다. 현재 정원사로 일하면서 아내 캣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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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자라나 고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미국 오스틴에 소재한 텍사스 주립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했다. 다수의 어학원과 대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어린이 문학전집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자문을 맡았으며, 틈틈이 실용서 번역을 해왔다. 문법책이나 교과서보다는 어린이·청소년 문학 작품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교육 이론을 여러 현장에서 실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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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3 ~ 2018/01/31

    북파우치 & 리뷰북 증정
    문학동네 김소영 편집국장 & 최인아 책방 대표 추천도서 구매 시, 나만의 독서 리뷰북 증정 (1,000P 차감/결제)
    소설, 시/에세이 도서 3만원 이상 구매 시, 복과 북을 담는 북파우치 증정 (1,500P 차감/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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