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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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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에는 나이, 성장 환경, 경제적 조건, 종교, 정치적 입장까지 모두 다른 네 명의 저자가 털어놓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는 여성으로서 겪는 성차별, 타자화,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의 질긴 뿌리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프리랜서 출판편집자 박소현,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의 대표 오빛나리, 문학을 전공하다 망했다고 자조하는 넷페미니스트 홍혜은, 소설가 이서영은 자신의 삶에 얽히고설킨 그 뿌리들을 질문과 사유의 힘으로 헤치고 나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직시한다.

    출판사 서평

    “삶은 늘 이념보다 크다.
    페미니즘, 네 글자에 담기지 못한 여자의 서사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저자) 추천

    사적이어야 마땅한 페미니즘

    “여성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어떤 형태로 숭배되고 배제당하는지, 보편적인 여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탐구하는 것만이 페미니스트의 일은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건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서문 중에서)

    나이, 성장 환경, 경제적 조건, 종교, 정치적 입장까지 모두 다른 네 명의 저자가 털어놓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는 여성으로서 겪는 성차별, 타자화,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의 질긴 뿌리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프리랜서 출판편집자 박소현,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의 대표 오빛나리, 문학을 전공하다 망했다고 자조하는 넷페미니스트 홍혜은, 소설가 이서영은 자신의 삶에 얽히고설킨 그 뿌리들을 질문과 사유의 힘으로 헤치고 나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직시한다. 직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온전한 ‘독대’로써 가능하지만 그러한 직시가 모이면 ‘연대’가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연대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학문이기 이전에 우리의 삶이다. 성차별과 가부장주의로 점철된 우리 사회의 공고한 이데올로기를 이론의 영역에서 해체시킬 수 있지만 그러한 문제의식의 계기는 우리의 삶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다. 학문적 영역의 페미니즘 연구 주제가 연구자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스트는 사회를 비판하기 이전에, 또는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평범한 여성들의 치열하고 사사로운 이야기가
    질문과 사유를 만나 사적인 페미니즘이 되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지났다. 최근 또 한 번의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여성 혼자 운영하는 왁싱샵에서다. 가해자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 그 왁싱샵이 여성 혼자 외진 주택가에서 운영하는 곳임을 알고는 손님을 가장하고 찾아가 살해했다. 이 사건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강남역 살인사건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해자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며 여성혐오가 아닌 ‘묻지마 범죄’라 외쳤던 당시의 목소리와 ‘그러게 왜 여자 혼자 겁도 없이’를 말하며 혼자서 왁싱샵을 운영한 피해자를 탓하는 목소리는 닮아 있다.

    그러게 왜 여자 혼자 겁도 없이. 그 말 한마디로 ‘공적 영역’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는 순식간에 ‘사적 영역’으로 밀려나고 축소된다. 여성들이 각자의 삶에서 경험하는 성차별과 대상화가 개개인들의 특수한 ‘사적 영역’의 일로 치부될 때, 수많은 여성 문제는 보편적인 사회의 문제로 논의되지 못한 채 배제된다.

    프리랜서 출판편집자 박소현,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의 대표 오빛나리, 문학을 전공하다 망했다고 자조하는 넷페미니스트 홍혜은, 소설가 이서영은 그 밀려남과 축소, 은폐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목소리를 모았다. 이 네 명이 가진 이력의 다양함만으로도 연대의 힘은 증명된다. 같은 곳에 서 있지 않아도, 같은 미래를 그리지 않아도, 같은 방식으로 싸우지 않아도 우리는 같은 질문을 공유할 수 있다. ‘여성’이 아니라면 치열하게 사유하지 못했을 질문들이 결혼, 게임, 가난, 노조의 네 갈래로 던져진다.

    결혼, 게임, 가난, 노조
    당신의 페미니즘은 지금 어디에 서 있나요?

    [‘○○맘’이기 이전에 ‘나’로 존재하기]
    박소현은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성은 견고하기만 하다. ‘시댁’을 ‘시가’로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결혼 생활이지만 현실은 가시밭길, 고난의 연속이다.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달고 가장 낮은 곳에 마련된 자리를 배정받는다. 입덧의 고통은 임신부가 겪어야 할 고충쯤으로 여겨지고, 산모의 의견만으로는 제왕절개수술을 허락받기도 힘들다. 아이를 위한 헌신과 사회적 성취 둘 다를 해내는 여성이 가장 이상적인 기혼 여성상으로 받아들여지는 한국 사회. 누구의 아내이자 ‘○○맘’이기 이전에 그저 ‘나’로 존재하고자 분투하는 박소현의 일상에는 자연스레 ‘82년생 김지영’이 겹친다.

    [우리 팀에 여자 있어? 아, 망했네]
    여성 게이머란 어떤 존재인가? ‘전장의 영웅’이 전제하는 인간상이란 언제나 남성이었다. 오빛나리는 단지 ‘대상’이자 ‘부속’으로 다뤄지는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 함께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이 휘두르는 숱한 대상화와 성차별에 고군분투하며 오늘도 게임을 한다. 전장 상황을 빠르게 공유하기 위한 음성 채팅 기능은 여성 플레이어들에게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다. 게임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릴 때 돌아오는 수많은 차별적 발언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여덟 가지 방법을 ‘최후의 방어 수단’이라 부르는 저자는 〈오버워치〉라는 게임 세계에서 튀어나온 현실의 파편들에 맞은 수많은 상처들을 마주하며 그것이 더 이상 개인의 상처일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제 새로운 전장을, 좀 더 신나는 세계를 상상해야 할 때다.

    [엄마의 문장들은 엉망이었다]
    착실한 ‘개념녀’를 꿈꾸다 페미니스트가 되기까지, 홍혜은은 그 기막힌 우연성과 정체화의 과정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어쩌다 진학한 여대에서의 이듬해에 맞이한 페미니즘 리부트.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 어떤 조건으로도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생활한 경험은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를 페미니즘적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홍혜은의 이야기는 엄마의 서사와 떼놓을 수 없다. 십 년 동안 다섯 남매를 낳느라 끊임없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 엄마의 삶을 ‘저소득층 중년 여성’의 삶으로 읽어내는 용기는, 다시는 보지 말자고 다짐했던 모녀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연대하게 한다. 홍혜은의 ‘자매애’는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른 채 맞서는 여성들을 향해 있다.

    [세상을 바꾸려면 더 많은 동지가 필요하다]
    소설가이자 빈곤과 노동에 천착하는 페미니스트 이서영은 이십대 내내 시위를 했다. 한때 운수노조에서 사무직 간부로 일했던 경험 속에는 노동자의 계급성과 젠더가 밀접하게 뒤얽혀 있다. 남성에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여성의 생존과도 직결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이서영은 늦고 싶어서 늦는 게 아닌 여성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범죄 통계를 끌어오며 남성이 여성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존재인지를 ‘팩트’로 들이밀지만, 그것이 남성을 절멸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적이 아닌 동지로서의 남성을 계속해서 호명하는 일, 이서영의 페미니즘은 ‘자매애’가 아닌 ‘동지애’의 선상에 있다.

    지금, 거기, 당신의 페미니즘의 가닿기 위해

    페미니즘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언어다. IS로 간 김 군이 남긴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라는 말은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에 불을 붙였다. 그 불은 메르스갤러리, 트위터에서의 해시태그 운동(#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내가_메갈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의 추모 시위 등으로 번지며 지난 2015년과 2016년을 뜨겁게 했다. 2017년에도 여전한 건 물론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입문서부터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깊이 파고드는 전문서까지, 페미니즘 분야의 책들도 활발히 출간되었다. 페미니즘의 사회적 확장과 낮아진 학문적 장벽 덕분에 이제 페미니즘을 모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알면’ 되는 것일까?

    삶은 늘 이념보다 크다. 아는 것과 현실의 괴리가 지나치게 크다는 사실을 체감할 때 우리는 절망한다. 그러니 페미니즘이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어쩌면 아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연대하고 나서는 것이 더 중요한 게 페미니즘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여성들의 경험이, 진지한 노동자, 진지한 게이머 등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이 더 많은 목소리로 곳곳에서 들려와야 한다.

    여성들은 이번에도 운이 좋아 살아남았음을 깨닫고 여전히 그대로인 세상을 향해 함께 분노한다. 그것은 ‘여성’이어서 겪는 일이 아니라고,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라는 말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쓴 네 명의 저자는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는 법’을 모색하기 위해 그 분노의 중심에 ‘나’ 또는 ‘너’가 아닌 ‘우리’를 둔다. 제각기의 삶을 가운데에 두고 이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금, 거기, ‘당신’의 페미니즘에 가닿기 위해서다.

    “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세상을 향해 함께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서문 중에서)

    함께 던지는 물음은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한편 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피해의식과 함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상실감, 사적 영역에 홀로 남겨졌다는 소외감을 느꼈다. 그 결과 결국 부부 관계에 갈등이 일어났다. 우리의 사랑 혹은 증오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였다. 현실적으로 우리 가족에겐 내가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육아와 살림을 맡고, 남편은 직장을 다니면서 귀가 후 일정 부분을 분담하는 구도가 가장 합리적이고 적절하다. 그리고 사실 사회는 이러한 구도에서 가족 제도가 가장 잘 유지될 수 있도록 매우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나는 시스템 앞에 무릎을 꿇었다.
    _ 결혼 후에 오는 것들, 39~40쪽

    사회는 이상적인 기혼 여성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가정에서는 지극한 모성애를 바탕으로 아이를 살뜰히 챙기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엄마이면서 둘째, 사회에서는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가며 자아실현을 해내는 사람. 그러나 현실의 많은 기혼 여성들은 아이를 낳고 사적 공간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며 불안한 삶을 유지한다.
    _ 결혼 후에 오는 것들, 46쪽

    내 삶은 그 자체로 나와 아이 사이에서 끊임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분열한다. 한 편을 확실히 택하고서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분열하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서 분열하고, 남성 사회에서 유능함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완전히 그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열패감 사이에서 분열하고, 자아와 엄마의 역할 사이에서 분열하는 일. 이러한 분열적인 상황들을 바리바리 끌어안고 사는 것이 내 삶의 본질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 자신과 세상에게 묻는다. 어디까지 가능한가. 이게 최선인가. 어디까지 수긍해야 하는가. 내가 더 포기해야 하나, 남편이 좀 더 분담해야 하나, 아이가 조금 견뎌야 하나를 끊임없이 저울질하면서.
    _ 결혼 후에 오는 것들, 63쪽

    보통 ‘게임’이라고 하면 곧바로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게임이 몇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놀랍도록 그 ‘게임’이라는 단어가 흔히 남성의 것이며 남성 문화의 절정으로 취급되는 단어라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떠올릴 법한 게임 이름도 대개는 ‘남자’들이 ‘PC방’에서 주로 하는 온라인 게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스타크래프트〉나 〈오버워치〉를 한다고 하면, 혹은 구체적인 게임 이름을 대지 않더라도 ‘게임 자체’를 좋아한다고 하면 “여자가 게임을?” “남자친구랑 하려고 시작한 거야?” “와, 넌 다른 여자랑은 다르네. 신기해” “근데 넌 잘 못하지?” 등의 논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_ 우리의 인생이 게임이 아니라는 거 확신해요?, 68~69쪽

    대부분의 여성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여성임을 드러내는 순간 성희롱이나 성차별적 발언에 가차 없이 노출된다. 높은 등급에 올라가면 덜할까? 직/간접적 경험상 최고 등급 구간에 가도 똑같다. 등급에 상관없이 여성 플레이어는 타자이며 대상이다. 높은 등급 구간의 플레이어들이 좀 더 부드러운 어휘를 사용한다거나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성희롱 또는 성차별이 아닌 건 아니다. 어느 유명 유튜브 스트리머의 방송을 보면 단지 여성 플레이어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방송 소재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여자 만난 게 소재다….
    _ 우리의 인생이 게임이 아니라는 거 확신해요?, 100쪽

    그러나 이미 〈오버워치〉에 한 발 내딛은 여성 플레이어들은 승리를 원한다. 영웅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싶은 인간이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대체 왜 나의 언행이 제약되는가? 음성 채팅으로 전장 상황을 빠르게 공유하는 것이 실제로 승리에 도움이 되는데, 그러라고 만든 기능인데, 왜 나는 이용하지 못하는가? 왜 남성 플레이어들과 게임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지 못하는가? 내 목소리, 있는 그대로 그냥 들으면 안 돼? 나는 그저 게임을 하고 싶은 것뿐인데. 이왕에 할 거면 잘하고 싶다. 이기고 싶다. 전장의 한 일원으로.
    _ 우리의 인생이 게임이 아니라는 거 확신해요?, 103쪽

    희롱과 차별 앞에 침묵하는 것은 여성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라지지 않으려면 정말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 게임을 계속하기 위해 여러 가지 태도를 선택하게 된다. 다음은 모두 내가 직/간접적으로 선택하고 경험한 생존 방법이다.
    첫 번째, “방금 하신 말씀은 성희롱입니다” “그건 차별적인 발언이에요. 사과하세요”라고 차분히 문제를 제기한다. 혹은 “팀 보이스 하자마자 남자 있냐고는 묻지 않잖아요?” “남자니까 힐러나 하라는 말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라고 상대방에게 발언의 문제성을 인지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발언이 내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말씀을 하시니 움츠러들어서 게임을 즐길 수가 없어요”라고.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 가장 지탄받는 태도 중 하나는 진지함이다. 긴박하게 전장 상황을 공유하며 승리를 향해야 할 때에, 이와 관계없는 의견을 주고받는 것은 시간 낭비로 여겨진다.
    _ 우리의 인생이 게임이 아니라는 거 확신해요?, 104쪽

    지금까지 제시된 태도들은 일종의 생존 방법이다. 사실 최후의 방어 수단에 가깝다. 한 사회의 분위기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에 무기력에 빠지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해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건 게임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세계에는 아직도, 여전히 내 자리가 없다. 나도 분명히 세계 속에 우뚝 서 있는데, 종일 돌아다니는데, 내 자리가 없다. 나는 이따금씩 말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웃거나 울기도 하지만 어느새 나의 인간성은 지워져 있다.
    _ 우리의 인생이 게임이 아니라는 거 확신해요?, 114쪽

    그러니까, 지금은? 나는 오늘도 게임을 한다. 그것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도피처인 줄 알았던 게임 세계에서조차 현실의 파편은 언제나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그 파편에 맞아 나는 또다시 ‘여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나 혼자만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당신과 나, 우리는 전쟁터에서 만난다.
    나는 당신의 상처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모자라거나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 ‘여자’가 된 것이 아니다. ‘여자’는 생물학적 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지칭하는 것은 ‘여자’로 환원되는 당신들의 얼굴과 문화 자체다. 이 거대한 난공불락의 세계는 그렇게 설계되었다.
    _ 우리의 인생이 게임이 아니라는 거 확신해요?, 128쪽

    내 경험이야 그랬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페미니즘이 고사하다시피 한 시절’이라고 말하면 서운할 페미니스트들이 많을 것이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친구는 가끔 페미니즘 강연을 들으러 다닌다고 했다. 하지만 그땐 그 애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진 않았고, 나는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몰랐다. 각 대학 총여학생회에서 내세우는 주 사업이 여학생 휴게실에서 스타킹이나 머리끈을 나눠 주는 일이던 때였다.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보고 들을 데가 없었다. 2011년쯤 내가 썼던 글 어딘가에 “페미니즘에 경도된 여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걸 발견하고 한참 웃었다. 나는 뭘 잘 몰랐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간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잘 몰랐던 게 나뿐인가?
    _ 당신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142~143쪽

    시위에서 내가 외친 구호는 별것 아니었다. 여자를 때리지 마라, 여자를 죽이지 마라, 우리는 밤길을 안전하게 걷고 싶다, 그런 당연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사람들, 대개 남성들은 그런 우리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강남역에서의 시위가 몇 번씩 이어지고 이런 경험이 계속되자 나는 이 당연한 말을 꼭 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시위다운 시위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부러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며 더 크게 또박또박 구호를 발음했다.
    _ 당신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150~151쪽

    나는 임신과 출산을 그 또래의 누구보다 많이 경험한 저소득층 중년 여성을 알고 있다. 바로 우리 엄마다. 엄마는 십 년 동안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다섯 남매를 낳았다. 엄마의 배가 불러 있는 모습은 당연한 일상과도 같았다. 엄마의 임신과 출산은 나와 너무나 밀접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자신의 몸이 변하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나 자신의 생활이 통제되는 것에 대한 괴로움, 출산 과정의 끔찍함 등에 대해 단 한 번도 자세히 들려준 적이 없었다. 그녀의 몸이 그렇게나 오랜 세월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상태여도 괜찮은 건 줄 알았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엄마는 결혼한 뒤로 쉽게 일자리를 가질 수가 없었는데, 아마 술집에서 하는 것 빼고는 무슨 일이든 다 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엄마는 중졸이었다. 엄마의 부모는 나의 부모만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일찍 돌아가셨거나 소식이 끊겼다. 엄마의 생활은 일찌감치 가난에 의해, 수많은 정상성의 결핍에 의해, 종교적 가치관에 의해, 지방민에 대한, 여성에 대한, 못 배운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의해 겹겹이 통제당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차별과 억압에, 폭력에 그리 민감하지 않았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자신이 겪은 일의 문제점을 똑바로 파악하고 항의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피임을 하지 않는 남편에게 제대로 항의하지 못했다.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는 “전도를 못하면 애라도 많이 낳아야지”와 같은 것이었다. 엄마의 남편은 목사였다.
    _ 당신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161~162쪽

    나와 같은 그녀들은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녀들에게 같이 생각하고 논의해보자고 청하고 싶은 마음에 작은 온라인 공간에서부터 시작해 이 년 동안 많은 글을 써왔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하게 되기까지는 어려웠고,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흐릿해지거나 지워진 서사를 고백하고 불러내는 일을 다른 이들이 선뜻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렵거나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나라도 목소리를 보태야 했다. 그때부터 용기를 냈다. 나에 대해서 쓰다가 결국은 엄마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느꼈다. 가난 속에서 지금 당장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른 채 그 폭력들에 온몸으로 맞서고 있는 여성들에 대해 반드시 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다. 기쁘다.
    _ 당신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177~178쪽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 1960~1970년대 제2의 물결 페미니즘, 급진주의(redical)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구호다. 처음 이 구호를 읽었을 때는 열아홉 살이었다. 대학 도서관 한구석에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장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세계를 바꾸기 위한 초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삶의 아주 작은 부분에도 켜켜이 끼어 있는 성차별과 가부장주의에 저항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정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 말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뚜렷한 글씨로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 구호가 공명할 때, 이 문장의 바로 뒤에는 선후 관계를 뒤집은 구호도 함께 들어 있었다.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이다.
    _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183쪽

    “그래도, 여자가”와 “감히, 여자가”는 서로를 끊임없이 북돋우면서 여성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나간다. 여성의 몸과 생각을 점유해나가고, 뒤떨어지는 여성과 위대한 여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구체화되어간다. 나는 밸러리 솔래너스가 왜 남성 거세를 외쳤는지 충분히 이해한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 선언문을 다른 방식으로 넘어서야 하므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회심리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캐롤 타브리스(Carol Tavris) 는 저서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도 똑같지도 않은 이유》에서 ‘여성들은 전쟁에 책임이 없다’는 주제의 기사에 실릴 인터뷰를 거절했던 자신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전쟁에 나가서 이기고 돌아오라며 노란 리본을 다는 ‘애국자 여성’들과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간 ‘평화주의자 남성’들을 동시에 떠올렸다고 말했다.
    지금 여기에서, 페미니즘은 “그래도”와 “감히”를 뚫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남성이라는 위험한 존재를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한다. 함께 살아나가기 위해서다.
    _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189~190쪽

    노동조합에서 일 년 정도 사무직 간부로 일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위원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 때로 어떤 문제를 대신 해결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노동조합이라는 권위와 간부라는 직책, 그리고 정당한 주장이 결합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하필이면 내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조합원이 잘못하지 않은 정황이 명확했을 때에만 개입을 시도했음에도 여성 조합원을 향하던 “감히, 여자가”라는 분노에 나를 향해 내리꽂히는 “감히, ‘건방진 젊은’ 여자가”까지 덧붙어서 오히려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는 걸 몇 번 경험해야만 했다. 그 이후로는 위원장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정신없이 전화를 거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달아야만 했다.
    _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197쪽

    그러나 어쩌면 이름이 앞에 쓰이느냐 뒤에 쓰이느냐는 문제가 당사자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규범을 충실하게 지키는’ 여성으로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는 남성에게 보호받는 여성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를 수 있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에게 보호받는 문제는 생존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는 흔히 ‘남자 못 잃어서 광광 운다’, ‘명예 자지’, ‘흉내 자지’라는 비난이 쇄도하지만 나는 그 여성 노동자에게 ‘그깟 남성 권위를 잃는 게 두려워서 그러느냐’고 비난할 수 없었다.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며 언성을 높일 수도 없었다. 오히려 걸음을 늦춰서라도 나는 그 여성 노동자와 함께 걸어야 했다. 함께 걸으면서 신뢰를 얻고 난 뒤에 부당함에 대해 말해야 했다. 가장 늦게 걸어오는 걸음은 늦고 싶어서 늦는 게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_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200~201쪽

    추천사

    은유(《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저자)
    삶은 늘 이념보다 크다. 페미니즘, 네 글자에 담기지 못한 여자의 서사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라디오 사연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소모되던 평범한 여성들의 치열하고 사사로운 이야기가, 질문과 사유를 만나 사적인 페미니즘이 되었다. 자유로운 개인에서 이름 없는 아줌마로의 존재 이동을 추락이 아닌 춤처럼 경쾌하게 그려낸 내공이 놀랍고, 게임 세계에서도 안전과 존엄을 사수해야 하는 여성 게이머의 진술은 날카롭다. 엄마를 ‘저소득층 중년 여성’으로 읽어내는 대목은 용감하고, “감히, 여자가”와 “그래도, 여자가” 사이를 널뛰면서 삶의 균형을 잡는 과정은 구조적인 시야를 열어준다. 개념과 이론에 빚진 페미니즘이 놓친 그것이 네 사람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목차

    들어가며: 지금 거기의 페미니즘에게

    결혼 후에 오는 것들 / 박소현
    우리의 인생이 게임이 아니라는 거 확신해요? / 오빛나리
    당신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 홍혜은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 이서영

    본문중에서

    공적인 것들과 사적인 것들이 교차하는 제각기의 삶을 가운데에 두고, 이 자리에 서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지금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사적인’ 모든 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묻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이 당신의 시공간, ‘지금’ ‘거기’의 페미니즘에 가닿는 것입니다. 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세상을 향해 함께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는 지극히 사적인 목소리를 높여 지금 거기의 페미니즘을 묻습니다.
    _ 들어가며: 지금 거기의 페미니즘에게, 9쪽

    기혼 여성을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시키면 각자의 개성과 가치관, 지향점, 그리고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가 사라지고 만다. 여성들의 삶은 하나로 추출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미혼/기혼/아이를 키우는 여성은 어떠해야 한다’는 명제를 모두 해체한다. 내 존재를 어떠한 기준들에 맞추어 범주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개별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나를 사회가 받아들이게끔 도전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이 사회의 모든 타자들과 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나는 나를 기혼 여성이자 아이 엄마로 환원시키려는 일상의 도전에 끊임없이 맞섰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는 내게 싶은 영향을 끼쳤으나 그것이 나의 핵심 정체성이 되지는 못했다.
    _ 결혼 후에 오는 것들, 20~21쪽

    한국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성인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 각자의 가족과 연결되는 것, 특히 남자의 가족으로 편입되는 과정이다. 내 편에서 결혼에 필요한 모든 걸 준비했기에 시가(媤家)의 태도가 유연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남편의 가족은 결혼 자체를 반대했다. 미혼인 형과 함께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남았다는 것이 대략의 이유였다. 소요가 잦아들고 결혼을 하고 나자 나는 남편이 다하지 못한 의무를 함께 이행해야 하는 가족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시가 문화의 시작이었다. 남편의 가족들과 나는 통상적인 인간관계처럼 점차 친밀함이 형성되는 방식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매우 가까운 관계인 가족이 되었다. 새롭게 편입한 젊은 여성인 나는 개성을 잃고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달고서 가장 낮은 자리에 배치되었다.
    _ 결혼 후에 오는 것들, 22~23쪽

    호칭으로 거리를 두는 것에서 시작해 관계에도 거리를 두었다. 부당함이 극심했던 시기에 나는 일 년간 남편의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다. 남편의 가족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며느리가 찾아오지 않을 경우 그것을 강제할 만한 장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남편의 부모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현재 나는 남편의 가족들을 예의 바르게 대하지만 가부장제의 방식은 거절하고 있다. 가부장제의 성(城)은 결혼 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견고했고 나는 말 그대로 고군분투했다.
    _ 결혼 후에 오는 것들, 24~25쪽

    저자소개

    오빛나리, 홍혜은, 이서영 [저] 신작알림 SMS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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