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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지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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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하늘 끝에 닿은 그리움, 천애지연(天涯之戀)!

    부모의 죽음으로 검은 수렁에 빠졌던 자신을 구해준 어린 정혼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만든 인연이 오히려 자신에게서 그녀를 앗아가 버렸다.
    세월이 흘러도 가슴 속에 담긴 정혼녀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그녀를 앗아간 자들에 대한 대가를 하나씩 준비하는 진혁 앞에
    낯선 얼굴의 여인이 나타났다!

    출판사 서평

    성하(星河)를 다스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붉은 입술이 부는 요적(妖笛) 소리에 하늘이 깨고
    진주보다 흰 손이 두드린 동고(?鼓)가 산을 울리네
    몰려오는 사나운 폭풍은 비파 소리에 잠드나
    검은 양금(洋琴)은 유부(幽府)의 사령(死靈)을 부르는구나
    쟁(箏)의 흐느낌에 붉은 대지가 눈물 흘리고
    칠현금(七絃琴)의 아득한 울림이 바다를 가르나
    애절한 이호의 부르짖음에 어둠이 내려앉누나
    미인의 웃음에 웃지 말고, 눈물에 울지 마라
    세상의 명암이 그녀로 말미암으니,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으랴

    목차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본문중에서

    “진혁(進赫)아!”
    아이의 이상한 기색에 서문인창은 놀라 소리쳐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혁이가 왜 이러는 겁니까, 백부님!”
    양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잡아 올려 눈을 맞췄지만, 회색의 탁한 동공만이 되돌아왔다. 감정 표현이 많지 않아 무뚝뚝하고 냉담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지만, 숙부인 자신에게만은 주뼛거리며 다가와 마음을 종종 털어놓곤 하던 아이였다. 고작 일곱 살이었지만, 장래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지 알고 있어 누가 종용하기도 전에 스스로 나서서 자신을 단련하던 영민한 아이이기도 했다. 또렷또렷한 눈빛으로 벽에 걸린 중원 전도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던 아이가 어찌 이리 망가졌단 말인가.
    천제영의 얼굴도 침통해졌다. 아들에 며느리까지 잃고 총명하던 손자까지 이 지경이 되자 그는 속이 썩어문드러졌다. 냉정해 보이는 것은 겉모습일 뿐. 만약 손자마저 죽임을 당했다면 그는 적의 의도가 무엇이든 아랑곳 않고 세상을 모조리 갈아엎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한 그의 이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넋을 놓고 있는 손자의 안위와 복수심이었다.
    “제 부모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으니 어찌 온전하겠느냐……. 무진이랑 며늘애가 자신들의 목숨은 버리다시피 하며 이 아이만큼은 살리려 했음이니…….”
    적의 유인책에 속아 떨어진 호위대가 달려올 때까지 아들인 무진(武震)은 온몸에 치명상을 입고서도 버티었다 한다. 쓰러진 며늘애는 제 남은 목숨을 모두 걸고서 진법을 그려 진혁을 보호했다. 손자는 어미의 시신과 혈인(血人)이 된 아비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쓰러지지 않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고 하니, 어찌 바른 정신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제 아비와 어미의 피를 뒤집어쓰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손자의 모습은 죽어 저승 강을 건널지라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혁아! 서문 숙부니라! 모르겠느냐?”
    간절한 부름에도 진혁이라 불린 소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진혁을 어루만지며 서문인창은 한탄했다.
    불쌍한 것! 가엾은 것! 네 앞날의 운명이 너무나 모질고 험하구나. 저들은 더욱 집요하게 너를 노릴 터. 백부님이 아직은 정정하시다 하나 그래도 연치가 있으시니……. 그저 네가 장성할 때까지만이라도 천수를 허락받아 든든한 기둥으로 남아주십사 하늘에 기원할 수밖에 없구나. 숙부라 불리면서도 위태로운 널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영민하고 강한 아이이니 제 스스로 떨쳐 이겨낼 겁니다. 백부님과 무진의 피를 받은 아이입니다.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몸속에 흐르는 피가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믿음이었다. 철혈(鐵血)과 냉혈(冷血)이 흐른다는 대야성(大野城)의 무적천가(無敵天家)에 대한 믿음이었다.
    굳게 입을 다문 천제영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가문의 핏속에 도도히 흐르는 불패(不敗)와 불굴(不屈)의 의지. 그것은 한 번도 패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수만의 패배를 당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도전해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다는, 수십만 번 무너져도 굴복하지 않고 끝끝내 극복해 이겨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이룩해낸 것이 지금의 무적천가였다.
    굳건한 믿음이 오가는 침묵 위로 문밖에서 낭랑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상공, 소첩입니다.”
    “들어오시오.”
    안으로 들어오는 악소군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몸단장을 한 탓에 단출한 차림새였다. 장신구나 화장도 없이 깨끗한 민낯에 머리도 올리지 못하고 뒤에서 하나로 묶어 늘어뜨렸다. 그녀는 강보에 감싸인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 아이냐?”
    “네, 백부님. 제 딸입니다. 백부님의 조카손녀이지요.”
    천제영의 눈길이 비단 강보에 감싸여 있는 아기에게로 향했다. 이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이 이번 원행(遠行)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 30여 년 만에 태어난 지기의 후손이었다.
    허, 운학(雲鶴). 이제는 자네 편히 눈을 감겠구만. 비록 여아이기는 하나 비선곡의 후계가 태어났으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사람의 일이란 것이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는 것이라더니, 내가 아들과 며느리를 잃으니 자네는 손녀를 얻는구만. 기뻐도 크게 웃지 말고, 슬퍼도 소리 높여 울지 말라더니…….
    천제영은 손을 내밀었다. 공손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악소군이 안고 있던 강보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진홍 비단으로 만든 포에 금사로 목숨 수(壽)와 복 복(福)자가 수놓여 있었다. 한 땀 한 땀 놓인 바늘자리에 아기의 앞날을 기원하는 모정이 박혀 있었다.
    단잠에 빠진 아기가 꽃잎처럼 붉은 입술을 앙증맞게 오물거렸다. 상아처럼 깨끗하고 반듯한 이마에 풍성하고 긴 검은 속눈썹이 높은 콧대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진주처럼 윤나는 흰 살결에 오밀조밀하게 그려진 눈, 코, 입이 자라면 뭇 사내들의 마음을 쥐고 흔들 대단한 미녀가 될 듯했다.
    “허허. 이 아이가 자라 중원 유람이라도 나갔다간 비선곡의 문턱이 닳아 남아나질 않겠구만. 여기저기서 며느리로 달라 청을 할 테니 창이 너도 고생 좀 하겠구나. 그래, 이름은 지었느냐?”
    “은설(誾雪)이라 지었습니다.”
    “서문은설……. 좋구나. 잘 지었어.”
    어감도 부드러웠지만, 이름에서 느껴지는 다감한 온기가 더 좋았다. 차가운 눈, 설(雪)자가 들어갔는데도, 앞자의 영향 탓인지 온기가 담겨 있어 부르는 이도, 불리는 이도 모두 잠시 온유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아기에게 관심이 쏠린 어른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천제영의 곁에 바짝 붙어 있던 진혁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혈향이 점점 옅어지고 있어.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미세한 틈까지 꽉꽉 들어차 지워지지 않던 피비린내가 서서히 빠져나가자 망막에 새겨지듯 각인되어 있던 핏빛 영상도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적들에게 사로잡힌 모친이 끝끝내 쓰러져 마지막 숨을 넘기기 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은 힘을 끌어 모아 펼친 진 안에서 그는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보았다. 부친의 뒤편에서 검을 내지르던 배덕자들. 모친을 포기하고 진 안에 있는 그를 지키기 위해 앞을 막아선 부친에게서 흘러내리던 피를 기억했다. 그의 발끝을 적시던 모친의 더운 피도 잊을 수 없었다. 무수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그의 앞을 지켜낸 부친의 뒷모습. 거대한 거목처럼 버티어 서서 마지막까지 무릎도 굽히지 않으셨다. 부친에게서 뿌려지던 피 세례가 지금도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쇳내가 섞여 있는 피비린내.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혈향이 천적을 만난 듯 밀려나고 있었다.
    이 향기는 뭐지?
    피비린내가 옅어지며 청아한 향기가 났다. 백목단처럼 순결하고 백설처럼 깨끗하며 빙극처럼 차가운 향이 그의 정신과 몸을 일깨웠다.
    아! 기분이 좋아! 정말 좋은 향이다.
    벗어날 수 없었던 핏빛 수렁에서 마침내 빠져나온 진혁의 작은 몸이 잘게 요동쳤다. 생기를 잃고 흐릿하던 동공이 맑은 빛을 되찾더니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진혁아!”
    목석처럼 굳어 있던 손자가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보이는 반응이다. 천제영은 머리를 낮춰 손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멍하니 죽어 있던 눈동자에 작은 불티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던 생기가 희미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 할아비를 알아보겠느냐! 내가 누군지 알겠어?”
    “……향기가…….”
    “뭐? 뭐라고 한 것이냐?”
    “……향기가 있어요.”
    바짝 말라붙어 있던 입술이 달싹이며 간신히 한 문장의 말을 토해냈다.
    “향기라니?”
    점점 빛이 살아나는 진혁의 눈빛을 따라가다가 천제영은 흠칫 놀랐다. 오랫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못한 진혁의 가늘고 마른 팔이 그의 가슴 안쪽을 향해 뻗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부들부들 떠는 작은 손에 어른들의 시선이 쏠렸다.
    진혁은 본능적으로 향기를 좇았다. 기뻐하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뒤로한 채 자신을 구원해준 향기부터 찾았다. 작은 손은 천제영이 안고 있는 강보로 향했다. 진혁은 단단히 갈무리되어 있는 강보의 귀퉁이를 잡아챘다.
    향기는 이 안에 있다. 지남철처럼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가까이 갈수록 청량한 향이 점점 짙어져 남아 있던 악몽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지워냈다.
    “……아기?”
    진혁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보았다. 그를 깨운 향기의 근원지는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였다.
    강보를 뒤적이는 난폭한 손길 탓일까, 진혁이 아기를 확인하는 순간, 잠자던 아기가 눈을 떴다. 흑진주처럼 까만 눈동자에 진혁의 얼굴이 맺혔다. 진혁은 아기에게서 풍기던 향기가 몇 배로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 누구……?”
    “은설이다! 서문은설!”
    천제영이 손자의 물음에 소리치듯 답했다.
    “……은설? ……은설.”
    진혁은 이름을 중얼거리며 은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혁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말없이 주시하고 있던 서문인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혁아, 향이 난다는 말이 무엇이냐?”
    “……은설에게 향이 있어요.”
    서문인창은 강보에 싸인 딸아이를 보았다. 다시 잠기운이 몰려오는 듯 커다란 눈망울이 몇 번 깜박거리더니 스륵 감겨들고 있었다.
    향이 있다?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 것을. 혹 실내에 향이 나는 물건이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진혁만이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은설의 목욕물에 향을 섞었소?]
    [아니요, 가군. 이제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아기에게 향물을 사용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악소군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녁나절 은설을 직접 씻긴 그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딸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백부님?]
    [나도 맡지 못했다.]
    세 사람은 의문스러운 눈길로 은설을 보고 있는 진혁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어찌 알았으랴. 그 향기가 은설의 영혼이 간직하고 있는 인연의 끈이라는 것을. 하늘이 만들어놓은 두 아이의 운명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들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불안과 걱정을 담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혼몽에서 깨어난 진혁은 일각 정도 버티다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몸이 깨어나자 필요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인 것이다. 진혁은 고꾸라지듯 눈을 감으면서도 끝끝내 은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생명줄인 양 자신의 손의 반도 안 되는 은설의 손을 꽉 움켜잡은 채 잠에 빠졌다.
    악소군이 잠이 든 두 아이를 데리고 잠자리를 봐주러 나가자, 객청에는 천제영과 서문인창만이 남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감돌았다.
    “혁이의 말이 무슨 뜻인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혁이의 정신을 깨운 것은 네 딸인 은설이가 분명하다. 그렇지 않느냐?”
    “……네, 백부님.”
    서문인창은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두 아이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눈 뜬 장님처럼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어렵게 얻은 딸과 연관되어 있어 더 초조하고 근심스러웠다.
    “향이 있다라? 풍문에 사람의 살결에서 향이 나는 이도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만…….”
    “은설은 아무 향도 나지 않습니다. 백부님도 안아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진혁이만이 향을 맡을 수 있다는 말이냐?”
    흥미롭다는 어조였다. 가슴을 짓누르던 큰 시름 하나를 덜어 천제영의 안색과 음성은 객청에 들어설 때보다 한결 밝아졌다.
    “심신이 지친 진혁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손자의 천성대로라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면 했지, 그런 있지도 않은 소리를 가장해 깨어나지는 않았을 터. 중요한 것은 진혁에게 미치는 은설의 영향이었다.
    “항상 머무시던 유운각(流雲閣)을 정리해두었습니다. 진혁이도 편히 잠이 들었으니 백부님도 좀 쉬시지요.”
    벌써 자정이 지난 지 한참이었다. 서문인창은 늦은 시각을 지적하며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길 권했다. 아무것도 아닌 양 말을 하긴 했으나 그것은 빈말일 뿐, 치기 어린 아이의 말로 넘기기엔 진혁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천제영이 의자의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창아.”
    “예, 백부님.”
    천제영은 이름만 불러놓고 한참 동안 서문인창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부름에 재깍 답한 서문인창도 다른 말 없이 묵묵히 기다렸다. 심지가 타들어갈수록 침묵의 무게가 무거워졌다.
    “창아, 네 딸, 은설이를 진혁이에게 다오.”
    “배, 백부님!”
    “내 손자라 하는 말은 아니다만, 진혁이라면 장차 그 누구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뒤떨어지는 일은 없을 터, 두 아이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특별한 교감이 오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이니, 이참에 두 아이를 이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구나.”
    진혁의 혼몽을 깨운 아이였다. 게다가 죽은 지기의 손녀이기까지 하니 금상첨화였다.
    “백부님! 은설이는 태어난 지 이제 막 한 달이 된 갓난쟁이입니다. 진혁이와의 장래를 논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태중 혼약도 있거늘, 한 달이야 무슨 문젤까. 그러고 보니 네 부친과 오래전에 그런 말을 나누었었지. 내 자식과 그이의 자식 중 하나를 골라 서로 엮어주자고.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으나 흔쾌히 그리하자 했더니라. 설마 나도, 네 아비도 아들만 하나씩 생길 줄이야. 네 아비가 두고두고 아쉬워했었지.”
    “그건 오래전에 지나간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물론 서문인창도 기억하고 있었다. 두 분은 술자리만 가지면 그와 무진을 앉혀두고 한탄을 하곤 했었다. 시커먼 사내 녀석만 둘이라 아쉽게 되었노라 혀를 끌끌 차셨다.
    “아들이 못 한 것을 손자와 손녀가 이룬다면 네 선친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신 부친이 아니었다. 하물며 혼례 후 간신히 얻은 딸아이가 아니던가. 데릴사위를 얻어도 허락할까 싶은데 며느리로 내어주어야 할 자리라니.
    선뜻 내켜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새파랗게 굳은 서문인창의 얼굴을 보니 예상보다 더 반발이 클 듯했다. 천제영은 손잡이를 한 번 쓸어내린 후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옆으로 돌아 나왔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네가 반대하는 이유가 은설의 어린 나이 하나뿐인 것이냐?”
    의자의 뒤편에 선 그는 서문인창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아닙니다.”
    서문인창도 지지 않고 쏘아보는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럼, 진혁이의 기량이 모자라더냐?”
    “아닙니다.”
    “진혁이의 품성이 부족하더냐?”
    “그 또한 아닙니다.”
    “허면, 진혁이가 앉을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로구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인창이 반대하는 이유라면 그 하나일 것이라고.
    “은설이가 함께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자리입니다! 무림을 일통하다시피 한 대야성의 안주인 자리라니요!”
    “네 딸의 기량으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느냐?”
    서문인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제영이 냉정한 눈길로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은설의 기량이 문제가 아니지. 설사 그 아이가 감당할 수 있다 해도 넌 반대할 심사이지 않더냐.”
    침묵하고 있던 서문인창은 입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 아무리 찬란한 부귀영화가 가득하더라도 평생토록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운 자리인 것을 알면서 어찌 덥석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드높은 명예도, 호화로운 부귀도 바라지 않았다. 그가 딸아이의 앞날에 바라는 것은 평온한 삶이었다.
    “은설이만이 아니라 진혁이도 생각해주면 안 되겠느냐? 그 아이, 네 조카이니라. 부모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엾은 아이다. 늙은 나마저 가고 나면 의지할 데라고는 너뿐인 아이니라.”
    “백부님.”
    “네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나 또한 모르지는 않는다. 허나 네 말마따나 진혁이의 몸에 무적천가의 피가 흐르는 이상 쟁투(爭鬪)는 피할 수 없는 천명(天命)일진저, 고독한 그 아이에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서문인창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어렵게 얻은 자식을 위한다는 생각에 맹약을 나눈 지기인 무진을 외면하려 했다. 죄책감과 못난 이기심이 양심과 뒤엉켜 뿌옇게 혼탁해졌다.
    천하를 호령할 듯 호협하던 무진의 얼굴. 서문인창은 어른거리는 형상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외면하려고 하면 할수록 무진의 얼굴은 더 또렷해졌다. 그 얼굴이 그를 질책하고 있었다. 말없이 비난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어린 자식을 외면하느냐 책망하고 있었다.
    후우.
    서문인창은 어지러운 심사를 덜어내듯 긴 숨을 내쉬었다. 답답하고 무거운 고민거리들이 담겨 바닥을 쓸었다. 은설과 진혁이 각각의 접시에 담겨 저울질을 당했다. 은설에게로 기울어 있던 저울추가 그의 양심에 의해 점점 올라와 이제는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둘 다 소중했다.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욕심쟁이라고 비난하더라도 그는 진정 두 존재 모두 지키고 싶었다. 딸을 둔 부정도, 지기를 위하는 우정도 진심이었기에.
    곁에서 고민을 부채질한 천제영은 한동안 뜸을 들이듯 서문인창을 내버려두었다. 그의 성격상 어느 쪽도 쉬이 버리지 못할 것을 알기에 마음껏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기 어렵다면 시간을 좀 두는 것이 어떠냐?”
    “네?”
    “네 말대로 두 아이 다 아직 어리지 않느냐. 지금 당장은 은설이 덕분에 정신이 깨어난 탓에 진혁의 관심이 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지. 어린 시절의 짧은 관심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리 된다면 지금의 대화야 가벼운 농담으로 지워버리면 될 터.”
    “하지만 그때에도 진혁이의 관심이 은설에게 있다면 어찌해야 할는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결론을 내놓겠느냐?”
    그야말로 진퇴양난, 서문인창에게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시의 유예라도 달갑게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10년 정도 후면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겠지. 진혁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10년의 유예인가. 그사이 진혁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하길 빌어야겠군. 기실 10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금 진혁의 나이가 일곱이니 10년 뒤면 열일곱. 한창때의 혈기왕성한 나이이니 또래의 이성에게 관심을 보일 터. 어릴 때 본 갓난쟁이는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서문인창은 억지로 십년지약(十年之約)을 받아들였다.
    (/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현재 대구에서 살고 있는 불량 작가입니다.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흰 목련꽃이 보이는 집에 살고 있구요.

    2002년 [그린핑거]를 시작으로 [카사블랑카], [야래향],[노란우산],[청애],
    [눈노을],[매의 검],[위험한 휴가],[화잠],[떼루아]를 출간했습니다.

    다시금 성실 작가로 돌아오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 중이라,
    잠시 취미 생활인 인형만들기와 십자수도 접어둔 상태입니다.

    올 연말 여행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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