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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1979년의 '한영길 사건'에 휘말려 무고하게 북한공작원으로 몰림으로써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객으로 살아야 했던 이유진 씨의 자전 에세이.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기개를 꺾지 않은 그는 이 책에서 순조롭지 않았던 그동안의 삶을 담담하게 회고하고, 조국이 영토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분단을 넘어 하나가 되는 꿈, 강대국의 핍박과 회유와 속임수에 의연히 대응하는 독립국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꿈을 이야기한다. 외롭고 고달픈 망명생활 속에서 농축돼온 저자의 넉넉한 인생관과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2001년 출간됐던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동아일보사)>의 개정판이다.

아직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1979년의 ‘한영길 사건’(*)과 관련해 무고하게 북한공작원으로 몰려,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객으로 살아온 이유진 씨의 자전 에세이.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기개를 꺾지 않은 그는 이 책에서 순조롭지 않았던 그동안의 삶을 담담하게 회고하고, 조국이 영토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분단을 넘어 하나가 되는 꿈을 이야기한다. 외롭고 고달픈 망명생활 속에서 농축돼온 저자의 넉넉한 인생관과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과 함께 시집 《소같이 웃으면서》(따뜻한손)를 동시 출간한다. 이 책은 2001년에 출간됐던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동아일보사)의 개정판이다. 　 (*)한영길 사건은 1979년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의 파리무역관 부관장이자 이유진씨의 대학후배로 평소 사석에서 반정부 발언을 했다던 한영길씨가 가정불화로 부인이 세느강에 투신자살한 뒤 문책성 소환을 당하게 되자 정치적 망명을 시도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영길의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유진씨가 한영길과 그의 딸을 납치해 파리 주재 북한 통상대표부로 데려갔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이유진씨는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반박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해왔다. [르몽드] [리베라시옹] 등 프랑스 신문들도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한영길 사건의 조작의혹을 보도했다. 한편 한씨는 사건 후 귀국해 서울에서 살다가 부랑자로 거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전적 기록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나라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인가. 또 사람이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독재정권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바야흐로 민주주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나, 생사람을 하루아침에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두는 이 나라가 과연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며 사람답게 살기에 충분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미국에서, 프랑스에서, 일본에서 떠도는 제삼의 혹은 제사의 이유진은 없는가. 가령 이유진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이제 우리도 공범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신경림 시인이 발문에 쓴 이 구절대로 이 책 《빠리망명객 이유진의 삶과 꿈》은 민주주의 세상이 됐다고 하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 이르는 동안 과거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 보상을 하고, 의문사 진상규명을 하고, 과거사 청산을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해왔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해외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에 대한 역대 정보기관의 탄압과 조작에 대해서도 진실을 밝히고, 정권 담당세력의 교체에 정치적으로 자족하거나 저항하는 수준을 넘어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법과 제도, 관행을 수립하는 데 힘을 모으고, 스스로 자긍심을 가질 만큼 우리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이 책의 저자는 특히 참여정부에서도 노인이 다 된 해외의 민주인사들에게 ‘입국불허’ 조처를 취하는 태도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정의의 전통과 도량과 기백은 다 어디로 갔는가? (…) 왜 아직도 정부는 시비곡직을 만두소 같이 얼버무리고 있는가. (…) 나의 말이 졸렬하고 깔깔하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새로운 결단과 참여정부의 긍정적인 해결책에 희망을 건다.”(28쪽) 그러나 저자는 민주투사형이라기보다는 다정다감하고 인간미 넘치는 ‘자유인’이자 ‘휴머니스트’라는 게 그를 아는 지인들의 일치된 평가다. 이 책에서 우리는 저자의 이런 면모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궁지에 몰린 후배의 망명을 도와주려다가 조국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간첩으로 몰리고, 파리에서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모진 생활고를 겪고, 가장 어려울 때 부친과 정신적 지주였던 대부를 잃고, 늦둥이 아들은 염색체 이상으로 선천적인 장애아로 태어나는 등 기구하다면 기구하달 수도 있는 삶을 살아오면서도 저자는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이런 그의 태도는 한국인의 특징 중 하나이자 그 자신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정’을 정의하는 대목에도 잘 반영돼 있다. “동양에서는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켜 정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을까? 최고의 아편은 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리하여 때로 인심은 위태롭고 진리는 미묘하고 인정은 스스로 시달림을 탄식하는 사람이다. 또한, 무지와 무심이야말로 고단한 두뇌를 쉬게 하는 건강한 베개임을 아는 사람, (…) 친구들과 허튼 소리를 하지만 여자에게는 정직한 사람, (…) 충고보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 (…) 죽을 때까지 감격하는 능력을 잃지 않는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 겸허하게 돈을 쓸 줄 아는 사람, (…) 언어의 어쩔 수 없는 무상함을 알고 그 언어세계를 초월한 사람이다.”(107~108쪽) 저자는 간첩의 누명을 쓰고 팍팍한 망명객 생활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중국고전 공부로 얻게 된 성찰과 지혜를 곳곳에 풀어놓아 책 읽는 맛을 더하게 해준다. 저자는 “부귀도 타락시키지 못하고, 빈천도 흔들지 못하고, 위세도 무력도 꺾지 못한다”는 맹자의 ‘호연지기’에서 격려와 위로를 느끼고(56쪽),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으로 한가로운 삶을 추구한 장자의 태도에 서럽도록 놀라워하고(57쪽), “봄비 내리는 황혼이면 비스듬히 동쪽 창가에 기댄 채 멀리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유유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도연명을 사랑한다(58쪽)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대학》을 읽다가 ‘지어지선’에 이르러 탄복했다”면서 “이 넉자로 말미암아 선은 초조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119쪽)고 고백한다. 필맥 출판사에서는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가 적어도 알고는 있어야 할 ‘이유진’이라는 사람의 삶의 내력과 정신세계가 잘 반영된 그의 저서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동아일보사, 2001)가 절판돼 시중에서 구할 수 없게 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해, 그에게 연락해 최근의 글을 받아 추가해 넣고 기존의 내용을 수정 보완해 이번에 그 개정판을 내게 됐다.

책머리에
개정판을 내며
　
이십육 년 만에 귀국해 보니
내 운명을 바꾼 엉성한 사건
자유로운 정신과 풍류를 찾아서
기가 죽으면 뜻대로 살 수 없다
알고 보니 네가 독립군이구나
선은 초조하지 않다
외눈박이의 두 눈 뜨기
답답하고 숨 막히고 부끄럽던 청춘
사일구, 오일육, 그리고 파리 유학
가난했던 파리 생활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
빈약한 주머니가 고달프긴 하지만
프랑스 시민이 되어 몽양을 생각하며
청산은 애초에 시비가 없는 것
소명절차는 저들이 거쳐야 한다
　
발문/ 슬프고 따슷하고 맑고 고운…… 신경림

“강물이 언제 맑은 곳만 찾아 흐르던가. 흙탕물이며 쓰레기까지 제 품에 끌어안고 세느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른다. 그 강변에서 사람들은 고뇌의 걸음을 옮기고 사랑의 밀어를 나눈다. 산다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고, 뒤죽박죽 엉킨 진창 속을 힘겹게 한 걸음씩 내디디며 작은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라고, 세느강은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설령 달팽이의 한나절 흔적처럼 미미할지라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보잘것없는 인간의 최선일 것이다. 그렇게 날마다 다짐하는 것이 흰머리 늘어가는 늙은 망명객의 속절없는 자기위안일 뿐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루하고 답답한 세월이었고 각자는 미미한 흔적만을 남겼을지라도, 고여 있는 것 같아도 세월은 흐르고 그 세월 속에서 조국의 높은 장벽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지 않은가?”(7~8쪽) “독일의 시인 릴케는 사랑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감탄했다지만, 어디 사랑뿐이랴. 이순의 나이가 지난 지금도 나는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그 놀라운 힘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자못 감탄할 뿐이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은 세칭 ‘한영길 사건’을 중앙정보부는 어떻게 조작했던가? 이십여 년 이상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조국으로 접근도 못하게 만든 이른바 한영길 사건을 나는 헛웃음 없이는 되돌아볼 수 없다. 먼 파리까지 취재 나온 MBC 스페셜 제작팀의 반응도 “설마…”였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중앙정보부였다지만 그렇게 엉성할 수 있느냐며 그들을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인생을 바꾼 건 바로 그렇게 엉성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32~33쪽) “돌이켜보면 삼십 년 망명객, 저 태어나고 골목골목마다 자잘한 추억이 깃든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이 서재에 그득하고, 커피 한 잔 값의 제법 마실 만한 포도주도 곁에 있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망명객일지언정 언제든 밤새워 술잔 기울일 친구도 적지 않으며, 외롭고 고단한 세월이긴 했으나 한평생 내 뜻을 꺾어본 적 없으니, 내 삶이 소소하게 즐겁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긴 하다.”(85쪽) “나는 적응이나 성공 따위를 생각할 적마다 인류의 스승들을 떠올린다. 십자강에 매달린 그리스도, 독약을 마신 소크라테스, 상갓집 개로 조소당한 공자, 일 년 열두 달 동냥중으로 떠돌아다닌 석가모니. 그들의 삶들을 떠올리면 속세는 살기 힘든 세상임을 새삼 깨닫는다. 겨우 생물학적 수준의 약육강식이 연출되는 사회에서 성공하면 얼마나 성공하겠는가? 최고선 혹은 절대진리를 추구한 위대한 스승들의 ‘정당한 실패’가 오히려 광채를 뿜는다. 그것이 곧 승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한 예수 그리스도, 동시대인들에게 ‘언제나 미소 짓는 사람’으로 불린 부처님을 상기해보라. 육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나의 마음에 자유와 안정과 용기를 주는 것은 결국 참된 것, 바른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다.”(118쪽) “혹시 철조망이라도 둘러쳐져 있다면 모를까, 말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울타리라는 것은 고작 헝겊쪼가리를 이어붙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그 경계를 뛰어넘을 생각은커녕 오히려 울타리의 구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 생긴 말들의 그 궁상맞은 평화로움이 어쩐지 어색했다. 그 말들 위로 내 민족의 삶이 겹쳐졌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말들이 순진하다고 목장 관리인에게 말을 건넸다. 사람 좋아 보이는 관리인은 다 그런 건 아니라면서 털이 새까만 놈 하나를 가리켰다. 그 녀석은 제멋대로 울타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놈을 눈여겨보았다. 첫눈에는 다른 놈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니 자기 생명의 율동을 즐기는 자유로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윤기가 반짝였다.”(3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