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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더글라스 평전 : 위대한 이름 불행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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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안경환
  • 출판사 : 라이프맵
  • 발행 : 2016년 01월 15일
  • 쪽수 : 428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62609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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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헌법은 국민의 몸에서 국가를 떼어 내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시퍼런 공권력을 앞세운 군사독재가 민주시민의 일상을 옥죄던 1970년대, 한국의 청년법학도는 ‘국민의 저항권’이라는 법리에 끌렸다. 국가 대신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헌법철학에 심취했다. 그 앞에 사법영웅이 나타났다.
    “헌법은 국민의 몸에서 국가를 떼어 내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윌리엄 더글라스(1898~1980년)는 미국 연방대법원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판사였다. 월스트리트 변호사, 컬럼비아 및 예일대 교수,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을 거쳐 약관 40세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36년 7개월(1939~1975년) 동안 재직했다. 사상 최장기록이며 역대 대법관 그 누구보다도 많은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을 썼다.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또는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고 네 차례 탄핵의 위기를 맞았다. 그의 판결문에 매혹된 청년법학도는 자신의 사법영웅의 발자취를 찾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7년 후 교수가 되어 돌아 왔다. 이 책은 그의 연배로는 매우 희소한 ‘진보법학자’ 안경환이 청년시절 자신의 법학에서, 정신적 멘토였던 더글라스의 생애를 재조명하고 화려한 이름 뒤에 가려진 불행한 인간의 총체적 삶을 허식과 미화 없이 고스란히 드러낸다. 군데군데 담긴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친근감을 더한다.

    출판사 서평

    법의 목적은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우리시대 법은 죽지 않았다.
    “단지 잠들었을 뿐이다.”


    윌리엄 더글라스는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은 아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사, 증권거래위원회의 위원장, 컬럼비아대 교수,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같은 빛나는 경력에도 불구하고, 낯선 인물이다. 아마도 미국의 대법관 중에서는 최초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인물이기도 할 것이다. 1952년 한국을 방문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하면서 당시 행정부 수반에게는 실망을, 김병로 대법원장이 이끌던 한국의 사법부에게는 희망을 보고 돌아갔다. 그는 방한(訪韓)에 대한 기록은 물론, 낯설지만 친절한 사람들의 삶과 애환, 그들과 함께 누리는 세계평화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양의 저술도 남겼다. 수십 년 전 이미 오늘의 우리가 되짚어 봐야할 여러 과제들에 대한 더글라스의 혜안은 탁월했다. 미국 연방대법원 아홉 명의 대법관들은 사회를 양분하는 모든 첨예한 갈등 이슈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이 판결의 위력은 가히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다. 이들의 판결은 그것이 나라 전체에 미칠 영향을 항상 고려하기 때문에 미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된다. 그들의 판결은 그야말로 미국을 움직이는 숨은 권력이다. 미국 연방대법원 역사상 약자의 대변인으로 빛나는 명성을 떨친 윌리엄 더글라스(William Douglas, 1898~1980년) 판사는 '약한'자의 한숨과 눈물을 담아내지 못하는 법은 제대로 된 법이 아니라'고 믿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한 일은 우리와 함께 사라지지만,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 한 일들은 영원히 남는다는 진리를 한 번 떠올려 보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윌리엄 더글라스의 생애(生涯)를, 그의 사상을 되돌아보는 건 단순히 위대한 인물에 대한 흠모가 아니라, 삶에 부딪히고, 깨지고, 상처 입으면서 그가 터득한 모든 것,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찾는 일이다.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유년의 뜰
    1980년 1월 23일 워싱턴 | 병치레 아이, 어머니의 보물 | 아버지 잃은 다섯 살 소년 | 야키마 밸리, 가난의 사회적 의미 | 어머니의 장남, 애증의 인간극장 | 휘트먼 칼리지, 인간과 자연의 신비를 깨치다 | 전장에 못 간 이등병

    제2장 젊은이여, 동부로 가라! 대륙횡단열차
    시골학교 선생의 꿈 | 법을 공부해야 돼! | 산골 출신 고학생, 컬럼비아 로스쿨 | 로 리뷰 편집위원에 뽑히다 | 크라바스 로펌, 월스트리트 변호사 | 새로운 탐색, 컬럼비아대 교수 | 예일대 교수, 법현실주의 운동의 선봉장 | 기업도산의 심층 연구자로 부상하다

    제3장 워싱턴의 떠오르는 새별
    뉴헤이븐, 현모양처의 작은 천국 | 어두운 저편의 기억 | 유일한 두려움은 두려움 그 자체다 | 워싱턴으로, 개천에서 용이 나다 | 뉴딜공연, 객석에서 무대로 | SEC, 월스트리트의 청소부 | 조셉 케네디와 윌리엄 더글라스 | 사적 클럽을 공적 기관으로 만들다

    제4장 청년 대법관
    뉴딜주의자 더글라스 | 브랜다이스의 후계자가 되다 | 프라크퍼터의 짧은 군림 | 더글라스 대 프랑크퍼터, 앙숙이 되다

    제5장 환상과 실제 : 흔들리는 가정
    언론이 만든 즐거운 나의 집 | 이혼은 치욕스런 인생의 실패

    제6장 전쟁과 법원
    태평양 연안의 전쟁 히스테리 | 대법원의 내부갈등, 하버드파 대 예일파 | 기업보다 국가, 국가보다 개인 | 진보사법의 전도사, 휴고 블랙 | 반대자들도 언론의 자유를 누린다

    제7장 대통령이 될 뻔했던 대법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총아 | 트루먼과 더글라스, 불편한 동거 | 정치여 안녕!

    제8장 진짜 사나이 : 야생의 빌
    거친 사나이들의 우정 | 낙마 사고, 기적의 회생 | [인간과 산], 낭만주의 선언 |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현신 | 소년의 새 아버지, 산 | 이혼, 두 여자를 동시에 속일 수는 없다

    제9장 맥카시 광풍과 법원
    정치 바이러스, 미국 땅에 창궐하다 | 반공 아니면 반역 | 강요된 선택은 헌법 위반 | 로젠버거 판결, 고립무원의 더글라스

    제10장 현직 대법관의 상습적 이혼
    자식이 냉소한 ‘장한 아버지’ 상 | 노(老)대법관과 여대생의 짧은 사랑 | 캐시, 마지막 여인 | 떠난 사람, 남은 사람

    제11장 환경운동의 기수
    걷다, 노래하다, 지키다 | 환희와 분노 | 히말라야 트래킹의 선구자 | 산도 나무도 물 고기도 원고적격이 있다

    제12장 원주 미국인, 인디언
    대륙의 원주인 | 인디언 관련 판결 | 야키마 소년, 인디언을 만나다 | 자연의 신비와 지혜에 경의를 표하라

    제13장 부자와 빈자
    단독 플레이어 판사 | 나는 반대한다 | 시민에는 등급이 없다 | 워렌 법원, 사법혁명을 이끌다 | 좋은 정책이 바로 헌법원칙 | 창의적 이론 | 대법원의 셰익스피어 | 평등의 한계

    제14장 네 차례의 탄핵
    판사에 대한 정치적 공격 | 포타스의 사임 |[ 반란의 요체], 태풍의 눈 | 탄핵 이후, 강 심장에도 깊은 상처가 | 자전적 드라마, 두 편 | 정신과 의사와 환자 더글라스 | [법과 문학]의 선구적 시론

    제15장 닉슨과 워터게이트사건
    캄보디아 폭격, 대통령의 독선 | 더글라스, 폭격중지 명령을 발부하다 | 더욱 고립되는 더글라스 | 리처드 닉슨의 치욕스런 종말

    제16장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
    언론의 본질은 논쟁을 장려하는 것 |‘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의 허구성 | 대법원 은 국민의 교육가관이 돼야 | 프라이버시권의 창시자

    제17장 낯선 땅, 친절한 사람들
    체험적 여행 | 아시아 혁명의 성격 | 소련을 이기는 길 | 러시아 기행, 청년 로버트 케네디의 일화 | 친숙한 풍광, 정겨운 사람들 | 카라치에서 이스탄불까지

    제18장 법을 통한 세계평화
    트루먼 대신 더글라스였더라면 | 미국인의 과제와 미국인의 책무 | 무기 대신 협상으로 | 지구연방주의와 세계법치주의 | 국제 NGO의 역할 증대 | 노대법관의 청년적 이상, 6단계 세계평화 구축 방안

    제19장 더글라스와 한국
    실망스런 신생국가 지도자, 이승만 | 신생 대한민국과 더글라스의 저술 | 아주 작은 에피소드

    제20장 최후의 날들
    자서전과 회고록 | 젊은이여 동부로 가라! 진실과 기억 | 낭만적 성찰과 사회적 개안 | 낭만주의자 의사와 법률가의 만남 | 부부의 마지막 여행 | 사임, 위대한 장정의 종착 | 사임했지만 은퇴하지는 않았다! | [법원시절], 사후에 출간된 마지막 자서전 | 그가 떠난 후, 빈자리와 채운 자리 | 그 후에

    에필로그

    본문중에서

    어느 나라에서나 90퍼센트의 법률가는 상위 10퍼센트 국민의 이익에 기식하여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나머지 10퍼센트만이라도 더글라스처럼 90퍼센트의 지친 영혼에게 연민의 눈길을 주는 나라, 그런 나라여야만 살만한 가치가 있다.
    (/ '저자 서문' 중에서)

    36년 7개월의 대법원 재직기간 동안 더글라스 판사는 헌법 속의 권리장전을 현실의 규범으로 만들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데 진력했다. 전통적인 기준으로 볼 때 형식과 내용에 있어 파격의 극치였던 그의 판결문들은 자신의 말대로 ‘국민의 몸에서 정부권력을 떨쳐내는’데 과녁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말의 의미는 멸시당한 자, 눈물과 한숨 밖에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돈지갑이 얇은 국민을 포함하여 모든 국민이 헌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더글라스의 공적 이미지는 그의 실제 삶과 항상 부합되는 것은 아니었다. 함께 일한 동료 중 일부는 그를 차갑고 타산을 앞세우는 인간으로 경멸했다. 그를 모셨던 연구원과 직원들은 몹시 가혹한 상사로 기억한다. 한마디로 더글라스는 멀리서 찬양할 수는 있지만 가까이서 좋아할 수는 없는 인간이었다.
    더글라스의 개인사도 공적생활만큼이나 비정통적이었다. 무려 네 차례나 결혼했고, 아내들과 자녀에게 냉혹하거나 무관심했다. 아버지 더글라스 목사가 천상에게 개탄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들도 아버지처럼 인류를 위해 봉사했다. 그것도 아버지가 감히 상상조차 못할 큰 무대 위에 우뚝 서서 수천만, 수억 지구인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주었다. 1980년 1월 23일, 수도 워싱턴의 장로교회(National Presbyterian Church)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 열렸다. 미합중국 대통령, 부통령, 국무장관, 상하 양원의 지도자들, 그리고 연방대법원 판사 전원이 함께 자리하여 찬란했던 고인의 생애를 묵념으로 반추했다. 전 국방장관 클라크 클리포드의 조사는 이렇게 마감했다.
    “ 빌 더글라스, 그로 인하여 우리들 각각이 더욱 자유롭고 안전하고 그리고 강력해졌습니다.”
    (/ pp.15~16)

    ‘소크라테스식’으로 불리는 로스쿨의 전형적인 수업방식은 교수와 학생 사이에 고도의 지적체계가 수반되는 대화를 요구한다. 컬럼비아 로스쿨의 스톤 학장 자신이 이러한 수업의 달인이었다. 스톤은 일찌감치 더글라스의 지적 수월성에 주목한다. 동급생 리프킨드의 증언이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는 우리 중에 가장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보다 세련된 친구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적 능력으로만 치면 더글라스가 단연 최고였다.” 컬럼비아에서 더글라스는 일생동안 접한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지적 열정에 충만한 선생을 만난다. 언더힐 무어(Underhill Moore), 그는 타는 불과 같은 열정과 지적 능력을 겸비한 학자이자 선생이었다. 수업시간에 학생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리는 지식 폭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폭언은 마치 정밀한 보석을 자르는 세공처럼 정교한 논리적 분석력에서 분출되는 것이었다. 주로 조합법과 매매법 강좌를 담당했던 그는 학생들의 공포의 적(敵)이자 우상이었다.
    (/ p.48)

    “당신에게 새 자리가 있소. 시시한 일이요. 더러운 자리,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는 자리요.”
    대통령은 몇 마디 더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더글라스는 가슴이 철렁했다. 통신위원장이 분명한 듯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최종결정을 통보했다. “내일 당신 이름을 루이스 브랜다이스의 후임으로 상원에 보내겠소.”
    4월 4일, 상원은 62 대 4의 표결로 더글라스를 대법관으로 인준했다. 노스 다코다의 린 프레이저(Lynn Frazier)가 홀로 반대 발언을 했다. 다소 튀는 포퓰리스트인 그는 후보자가 “증권거래소 및 월스트리트와 밀착 관계에 있으며 농업과 노동법 관련해서 진보적 활동을 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프레이저는 더글라스가 민권 보호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p.103)

    개인의 존엄과 권리에 대해서는 확연하게 다른 입장을 취한다. 즉 그는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법과 질서의 유지, 국가안보 및 국가 목적의 달성에 있다고 보고, 이러한 국가의 목적이 위협받을 때에는 물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으나 이때의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회계약’의 조건에 따라 성립된다고 했다. 더글라스의 만민평등 사상은 이 경우에 국가의 의무에 또 하나의 조건을 부가한다. 즉 국가는 경제적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듯이, 개인의 자유가 관련된 경우에도 국가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억압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 강자에 의한 약자의 박해 또한 적극적으로 방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더글라스의 지론이다. 이러한 기본원칙에서 도출되는 세칙은 흑인, 극빈자, 부랑자, 소위 ‘위험인물’, 농민, 노동자 등 소수약자도 일반 시민이 누리는 각종 혜택을 동등하게 수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구나 체포 시에는 변호인이 선임되어야 하고, 공민권에 대한 제한은 용납되지 않으며, 공공시설의 이용권, 여행의 자유(거주 이전의 자유), 언론 . 표현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등의 보장에 있어 일체의 차별이 금지된다는 것이다.
    (/ p.140)

    산과 들, 물과 바람과 같은 환경보호 대상물은 스스로의 보전을 위해 개발 계획에 대해 법적 구제를 신청할 적격이 있다. 이는 마치 ‘법인’ 이라는 무생물에게 소송당사자로서 원고적격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계곡, 고원, 강, 호수, 해변, 군목, 늪지대, 심지어는 공기조차도 현대인의 삶의 행태와 테크놀로지의 강한 위협을 느낀다. 이를테면 원고로서 하천은 생태학적 단위를 대변한다. 어부, 카누 여행자, 동물보호가, 원목운반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천이 대변하는 가치, 파괴에 위험에 직면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나설 수 있다.”
    (/ p.233)

    평화주의자 더글라스는 전쟁론자 이승만에게서 큰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는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이승만의 무능함에 실망했다. “…그는 늙었다. 행정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인플레이션, 물가 통제, 곡물 저장 등 일상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의 무력했다.” 이승만은 인플레이션이 심각하다고 정부가 하루에 1억 원 씩 화폐를 발행하여 이를 더욱 가중시킨다고 불평한다. 대통령은 자신이 곧바로 정부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은행은 정부의 대리인이고 대출의 절반 이상은 무담보로 행해진다. 정치적 프로젝트는 신속하게 집행된다. 그러나 이승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은행 대출조차 받기 힘들다고 한다. 대통령은 애로를 말한다. 물가 통제가 어렵다고. 약삭빠른 투기꾼이 설치기 때문이라고. 법은 있으나 누구도 지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더글라스는 질문한다.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법을 만들면 어떠냐고. 대통령은 대답 대신 어깨는 들썩거렸다. …(중략)… 왜 정부가 식량을 사들여 배급정책을 실시하지 않느냐고 여행객이 묻는다. 대통령을 즉시 대답한다. “그럴만한 쌀이 없어요.” 더글라스가 보기에 한마디로 말해서 이승만은 민생문제에 대해 명료한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서만은 확고한 소신을 보였다. 이승만은 더글라스에게 미국정부가 3억 달러를 지원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 돈으로 통화도 안정시키고 서울을 재건하며 일본과 함께 태평양 동맹을 맺고 태평양군사동맹(Pacific Pact)에 가입하며 군대를 증강하겠노라고 한다. 전쟁 대신 평화적 방법으로 국제분쟁을 해결할 것을 주창하는 더글라스에게는 실망을 넘어 허탈한 기분이 드는 만남이었다.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반, 용기 있는 애국자인 그다. 그런데도 그 자신이 바로 정부이며, 자신의 힘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어떤 외부세력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는 듯 했다.” …(중략)… “전반적으로 볼 때,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출발은 나쁘지 않다. 국회도 활기가 넘치며 김병로 대법원장이 이끄는 법원은 희망의 불씨를 품고 있다. 권력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개념도 존재한다. 종합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는 도시 시골을 불문하고 그 어느 모퉁이에서도 강한 생존본능을 느낄 수 있는 나라였다.” …(중략)… 한국을 방문하기 3개월 전인 1952년 6월 2일, 더글라스는 한국전쟁과 연관이 있는 대법원 판결에 참가했다. 이른바 “철강산업 국유화 사건(The Steel Seizure Case)”이다. 미국 전역에 걸쳐 철강공장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고대량파업의 위협이 감지되었다. 전쟁의 수행에 필요한 군수물자의 원활한 공급에 큰 차질이 예상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발부하여 철강산업을 일시적으로 국유화할 수 있는 권한을 상무부장관에게 부여했다. 사기업을 사실상 국유화하는 이러한 조치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권한으로 규정한 헌법 제 2조의 범위 밖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대법원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판단을 내렸다. 5월 12일, 13일, 이틀에 걸쳐 구두변론을 열었고, 6월 2일 최종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6 대 3의 표결로 트루먼 대통령의 조치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선언했다. 전쟁을 명분으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들 수 없다는 사법철학이다. 이 판결에서 더글라스는 별도의 의견 없이 블랙이 집필한 다수의견에 동참했다. 전쟁에 특권을 주지 않는 더글라스의 사법철학을 이승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pp.368~370)

    더글라스를 좋아했든 싫어했든 동료들은 그의 부재를 실감했다. “그가 그립소.”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더글라스와 결코 가깝지 않았던 한 대법관의 말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1980년 1월 23일, 그 매섭게 추웠던 겨울날 워싱턴의 장로교회에 더글라스의 추도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답을 알 것이라는 사이먼의 평가다. “더글라스의 허영, 옹졸함, 그리고 성마름과 비열함, 이 모든 것들은 이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영구히 칭송받을 것이다. 윌리엄 더글라스는 개인의 역량과 품위가 보다 나은 나라와 세상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선사함으로써 인간정신의 위대한 영웅의 상징이 된 것이다.”
    (/ p.406)

    워싱턴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더글라스에 대해 물었다.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위대한 사람일지는 모르나 별로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고 했다. 마지막 부인, 캐시 헤퍼넌 더글라스와 두 차례 의례적인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브레넌 대법관에게 편지를 써서 주소를 얻었었다. 한국 청년 법률가가 남편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사실을 고마워한다는 타이프로 친 짧은 편지였다. 그의 무덤이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도 찾았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Eternal Flame)’이 밝히는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묘소 근처였다. 그때 이미 죽은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케네디의 인기는 여전했다. 더글라스의 무덤은 질박했다. 누군가가 남긴 시든 꽃다발이 처연했다. 묘석의 앞면에 ‘이등병’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뜻밖이었다.
    (/ p.418)

    저자소개

    생년월일 1948~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글쓴이 안경환은 1948년생으로 1970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7년부터 2013년까지 같은 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서울대 법대 학장, 한국헌법학회 회장,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와 국제인권법률가협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헌법, 미국법, 영국법, 인권법, 법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전공서와 교양서를 펴냈다. 이 책은[조영래 평전](2006),[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2013)에 이어 저자가 쓴 세 번째 인물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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