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다음 생에 할 일들 : 안주철 시집

저 : 안주철(安舟徹)출판사 : 창비(창작과비평사)발행일 : 2015년 10월27일 | 종이책 발행일 : 2015년 06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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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스터소개글 TOP

200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안주철 시인의 첫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창비시선 390)이 출간되었다. "시적 주제와 방법이 다양하고 말을 활발하게 밀고 나가는 저력이 확연하다"는 호평을 받으며 등단한 지 무려 13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시인은 등단 당시 "미래의 작품에 기대가 컸다"는 믿음에 부응하듯, 활력이 넘치는 언어와 감각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진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치며 오랜 시간의 깊이와 무게가 가슴에 선뜻 와닿는 묵직한 시편들을 선보인다. 일상의 사물에서 감정의 깊이를 짚어내는 비상한 시선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황폐한 삶의 풍경 속에서 "‘운명’과 ‘운명을 바라보는 눈’이 시의 자기장 안에서 깊게 빛"나는 시편들이 "읽는 이의 눈에 머물지 않고 가슴에 낮게 스며들"(장석남, 추천사)며 뭉클한 감동과 공감을 자아낸다.

출판사서평 TOP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유성처럼 흘러내릴 때/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병일 때/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아무 말 없이 엄마가/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이런 때/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
(/ '밥 먹는 풍경' 전문)

생활 속에서 시를 찾아내는 예민한 감각이 돋보이는 안주철 시의 풍경에는 삶의 "충만함보다는 먼저, ‘사라지는 무언가’로 인해 남겨지는 황폐함"(양경언, 해설)이 짙게 깔려 있다. 심지어 시인은 자못 비장한 심정으로 "나는 사라질 것이다"('눈 4')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척박한 삶의 그늘과 황폐한 어둠속에서도 "살아서 길길이 날뛰"('봄밤입니다')는 이들이 있다. 시인은 폐허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집 같"('모래로 빚은 봄')은 처지가 되어 "나도 한마리/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삼나무숲')할 수밖에 없는 고달픈 현실을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모든 것에 서식"('나는 모든 것에 서식한다')하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생활 속에 맺힌 물방울이/빛 한방울을 소중하게 간직하듯이"('희미하게 남아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나는 일초와 이초 사이에 서식한다./일초가 지나면 새해가 시작될 것이다./나는 지난해가 되기도 하고/다음 해가 되기도 하겠지만/경계를 구걸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나는 집히는 대로 서식한다.//비가 내리고 비가 그친 오후에 나는 서식한다./월급이 입금된 통장에서/빌려 쓴 미래가 모두 빠져나간 날처럼/나는 너덜너덜하게 서식한다.//(...)//나는 어슬렁거리는 무릎에 서식한다./한없이 세상 밖으로 녹아버리는 눈들과/내리는 눈 사이로 희미하게 저녁을 안치는/비탈진 골목처럼 서식한다.//나는 서식한다./내가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떠나는 순간에/용도와 흥미가 폐기된 가구처럼/나는 모든 것에 서식한다.
(/ '나는 모든 것에 서식한다' 중에서)

시인은 "어디에서 헐리게 될지"('깨진 유리') 모를 삶의 가장자리에서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내가 없"고 "사진을 찍어도 내가 없"고 "목에 힘을 주고 뒤를 돌아보아도/내가 없다"고 단정할 만큼 "희미하게 남아 있"('희미하게 남아 있다')는 존재로서 "내가 누군지 모르게 시들어버"('아프리카')리듯 점차 사라지거나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익숙하다. 하지만 체념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실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양계장')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하릴없이 "쓸쓸함에 기대거나/슬픔에 만족하지 않으려고"('봄밤입니다') 한다. 더 나아가 "서서히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뭐가 그렇게 긍긍하냐?"('오리는 젖는다') 되물으며 좀처럼 벗어날 길 없는 처절한 삶의 비애와 무게를 오롯이 감당해내고자 한다.

꿈을 하나 지운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쉽게 지워지는 꿈이 신기해서/아내의 꿈도 슬쩍 하나 지운다. 아내의 꿈도/잘 지워진다. 아내는 자잘한 꿈이 많아/손이 많이 간다.//꿈을 지울 때마다 내 몸에 구멍이 하나씩/늘어난다. 구멍을 세는 것이 재미있어서/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꿈을 지운다.//꿈이 지워질 때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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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발견한 모든 ‘좋은 첫 시집’의 공통점은 거기에 ‘운명’이 어른댄다는 점이다. 안주철의 첫 시집에는 간절히 감추고 싶었을 그것이 ‘돌아보면 슬쩍 숨는’ 얼굴로 도처에 어른대고 있으니 읽는 이의 눈에 머물지 않고 가슴에 낮게 스며들 시집임에 확실하다. 마치 첫 경험처럼.
망설이다가 그냥 인용하기로 한다. "물이 식는 속도를 센다./(...)물고기가 더이상 도망가지 않을 때까지//엄마의 발가락을 감고 있던 붕대가 풀리자/피가 쏟아진다. 엄마는 등을 돌린다. 나는/저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대야에 붉은 꽃잎이 한장 두장/오래도록 펼쳐진다. 한송이가 될 때까지//(...)거울 속에 다시 노을이 끓는다.//나는 내 살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 나는 못됐다! 그러나 가파른 언덕을 넘듯 이 시를 ‘읽어 넘어’야 했는데 힘겹고 아름다웠다.
타고난 것에 대한 무한한 저항과 사랑의 균형점에서 시는 솟고, 그의 시가 꼭 그랬다. 궁극에서는 만들어진 시를 버리고 솟아난 시를 택하지 않던가. ‘운명’과 ‘운명을 바라보는 눈’이 시의 자기장 안에서 깊게 빛난다.
- 장석남 / 시인

저자소개 TOP

안주철 [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200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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