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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같은 목소리

원제 : Schattenstu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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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추리 소설 작가인 이자벨라 트루머가 이번에는 탐정이 아닌, ‘자신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삼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바로 [그림자 같은 목소리]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그프리트 그람바흐는 여든 살의 나이에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려 실어증과 공황 장애를 겪게 되었다.
이야기는 치매 초기 증상이 나타나는 2006년 봄부터 시작하여 공황 장애와 실어증이 점점 더 심해지다가 급기야는 의사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해지고 가족들마저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2014년 봄까지 이어진다.
이자벨라 트루머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바로 ‘아버지’이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분노와 옅은 희망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러나 이 책은 환자의 가족들이 어느 날 갑자기 떠안게 되는 문제와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환자 본인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나는 병의 진행 과정에서 아버지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가 ‘기억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알게 된 또다른 의식의 세계를 과연 스스로 느끼고는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저자는 지그프리트 그람바흐의 치매 증세가 악화되어 가는 상태를 매우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묘사했다. 이는 저자가 환자의 상태를 철저히 이해하고자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독자들은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는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혼란과 고통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그림자 같은 목소리]는 치매에 대한 단순한 탐구심에서 쓴 책이 아니다. 곁에서 간병하면서 아버지를 세심히 관찰한 딸의 입장에서 쓴 것도 아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읽는 이에게 무작정 눈물로 호소하려는 책은 더욱 아니다.
이자벨라 트루머는 아버지가 느꼈을 것이라 짐작되는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고독의 세계를 이해하고 깊이 공감하면서, 아버지에 대해 느꼈던 서글픈 연민의 감정을 매우 담담
한 어조로 풀어 나갔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때로는 연민과 아픔을, 때로는 희망과 감동을 가져다 주는 [그림자 같은 목소리]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 중간 중간 일부러 철자와 문법을 틀리게 쓰고 말줄임표를 자주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주인공의 실어 증세가 개선될 가망은 전혀 없이 악화되어 가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일화들 중에서 지그프리트 그람바흐의 인생담이나 실어 증세와 관련된 부분은 실화이지만, 다른 치매 환자들을 비롯해 그들의 가족을 만나면서 저자 스스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도 가미되어 있다고 한다.
[그림자 같은 목소리]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는 환자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환자와 그의 가족 혹은 주변 사람들이 병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이자벨라 트루머는 고령화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점에도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치매를 앓는 환자 자신은 물론, 병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모든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가족들의 고충을 드러냄으로써 이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더불어 깊은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낸다.
후기에는 치매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임상 경험이 풍부한 치매 전문 가족상담사의 글을 실어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줄거리

2006년 봄, 지그프리트 그람바흐는 팔순을 맞는다.
그는 제법 성공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는 전쟁 후 철도회사에 취직해 역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가족관계도 원만했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결혼한 아내의 질투심이 심한 탓에 부부 싸움을 자주 겪었지만 두 사람은 딸과 아들을 낳고 평생을 함께 했다. 딸은 부모의 다툼에 질렸다며 독신을 고집했다. 그러나 아들은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팔순을 맞은 그를 위해 아내와 자녀들은 성대한 잔치를 준비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사람들이 많은 자리를 불편해한다. 잔병치레 하나 없이 지내온 덕분에 몸은 건강하지만 최근 건망증이 부쩍 심해진 탓이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대부분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면,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려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일도 발생한다.
2006년 가을, 열쇠나 안경을 엉뚱한 곳에 두고 찾는 일도 허다하다. 대개는 아내가 눈치채기 전에 찾아내지만 들키는 일이 점점 잦아지면서 아내는 부쩍 걱정이 늘어간다. 손님이 오는 것도 달갑지 않다. 손님이 옛 이야기를 꺼내면 무슨 이야기인지 생각나지 않아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짐짓 기억나는 척 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는것으로 은근 슬쩍 고비를 넘기곤 한다.
2007년 봄, 각종 고지서나 서류를 정리하는 일도 어려워진다. 각종 납부금이 밀려 경고장을 받는 일이 늘자 나중에는 아내가 이를 도맡아 하게 된다. 평생 두어 온 체스 규칙도 잊어버리고 공황 장애가 오면서 장을 보러 가면 슈퍼마켓 안에서 길을 잃는다. 책이나 신문을 읽는 일도 힘들어졌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사용한 그릇을 식기 세척기가 아닌 찬장에 그대로 집어넣기도 한다.
2008년 여름, 실수가 늘수록 아내의 짜증이 심해지는 것을 느낀 그는 무언가를 자꾸만 잊는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입을 다무는 일이 늘어났다. 마침내 아내는 그를 의사에게 데려간다. 의사는 기억력을 향상시켜 준다는 약과 기억력 향상 연습을 처방한다.
딸 바바라가 자주 찾아와 퀴즈를 내거나 함께 게임을 해 주지만 그에게는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다.
2009년 봄, 실수가 잦아질수록 그의 불안도 점점 더 커져 간다.
하루는 실내화 차림으로 우편물을 가지러 나갔다가 자신이 전쟁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대로 거리를 따라 내려가는 일도 생긴다. 이웃의 눈에 띄어 겨우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신경과 의사를 찾는데, 의사는 그에게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청천벽력처럼 떨어진 그 한마디에 지그프리트 그람바흐의 삶은 180도 달라진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병의 실체를 파악해보려 애썼지만 '얼굴 없는 그 무엇'은 다만 침묵할 뿐이다.
2009년 겨울,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서 점차 언어능력도 잃어가기 시작한다. 말하려던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가 하면, 발음이 부정확해지고 어법과 철자가 틀리기도 한다. 크리스마스에는 손주들에게 줄 선물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한참을 헤맨다. 그러나 자기를 잊지만 않는다면 선물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손녀딸 레나의 말에서 위안을 받는다.
2010년 새해 첫날, 다시 힘을 내기로 다짐한 그는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이상한 감촉을 느낀다. 침대에 오줌을 싼 것이다. 기저귀를 쓰면 된다는 아내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기며 수치스러워한다.
2010년 가을, 이제 그는 점차 과거와 현실을 혼동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농가로 돌아와 있다고 착각하고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는 형제들이 들에 나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도와주러 나가기도 한다. 거름을 준다며 음식물 쓰레기를 아
내가 끔찍이 아끼는 화단에 가져다 쏟아 부어 화단을 망쳐 놓는 일도 벌어진다. 행동은 점점 어린아이 같아지고 아내 없이는 불안에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담석 때문에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가서도 아내가 눈에 띄지 않자 두려워하며 반항한다. 이때 '그림자 같은 목소리'가 또다시 그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2011년 여름 어느 날, 아내가 심장 이상으로 수술을 받으러 가게 되자 딸 바바라는 그를 요양소로 데려간다. 그는 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어딜 가는 것인지’ 그리고 ‘아내는 '왜 같이 오지 않았는지’를 반복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는 요양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한밤중에 집에 가겠다고 문을 쾅쾅 치며 난동을 부리고, 요양소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가 하면, 낮 동안에는 딸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창가에 하염없이 서 있다. 딸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와 슬로바키아인 간병인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돌보게 한다.
2011년 가을, 그는 이제 자신이 살던 집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역장으로 일하던 시절과 현재를 착각하고 기차 출발시간에 맞추어 신호를 보내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재활원에 머물고 있는 아내를 면회하러 갈 때는 아내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한다.
2012년 가을, 그는 먹기 싫은 음식을 장롱에 숨기거나 신문지를 찢어 바닥에 늘어놓는 놀이를 하며 아이처럼 행동한다. 오줌을 싼 바지를 구석에 쑤셔 박아 숨기기도 한다. 죽은 형제들의 환영을 보는 일이 잦아지고 가족 모두를 몰라본다.
2013년 봄, 언어능력은 어린아이처럼 되다 못해 의사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해지기에 이른다.
그렇듯 병이 악화를 거듭하면서 시간이 흐른 2014년 봄,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다.

현지 언론 보도자료

[클라이네紙 Kleine Zeitung], 2014년 4월 1일 기사


다른 세계에서 칩거하다
독자들은 [표면 아래에서]의 작가의 최신작 [그림자 같은 목소리]1 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추리 소설이 아니다. 이자벨라 트루머Isabella Trummer가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주제로 삼아 그 병을 앓는 환자 본인의 관점에서 책을 썼다.
이번 작품에서는 범죄자들을 뒤쫓는 탐정 카멀랜더Kammerlander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 주州 출신의 이자벨라 트루머가 앞서 출간된 다섯 편의 추리 소설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책을 선보였다.
" [그림자 같은 목소리]는 꾸며낸 이야기도, 자기계발서와 같은 실용서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토대로 쓴 글이에요. 저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증세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사람의 상황에 관한 책을 한 권 쓰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 환자 자신의 입장에서 전개되어 가는 이야기 말이지요." 라고 이자벨라 트루머는 설명한다.
바로 저자 자신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았기에 그녀는 병에 관한 모든 진실을 속속들이 파헤칠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추리 소설을 한편 더 쓸 생각이었죠. 그런데 이야기가 제 펜 끝에서 흘러나오지 않더군요.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관해 제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아주 많다 보니, 결국엔 그 문제에 대해 쓰게 된 거에요. 마치 제 자신에 대해 쓰는 것 같았죠."
1 독일어 원제는 [Schattenstumm] ; 우리말로 직역하면 ‘침묵하는 그림자’이다.

이자벨라 트루머의 신간 소개

기자의 직감으로 예상컨대,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저자가 개인 블로그를 통해 작품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기대할 것 같다.

은폐하다
"알츠하이머성 치매 환자를 둔 가족들의 입장에서 쓰인 책들은 사실상 이미 넘쳐 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책도 환자 본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 적은 없습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는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수도 없이 만나면서 저는 ‘병을 앓는 당사자는 대체 이 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되더군요."
"병의 초기 단계에서는 주변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환자 쪽에서 자신이 병에 걸린 사실을 더 일찍 알아차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치매 환자들은 대개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감추려 들거나, 무언가를 자꾸만 잊게 되는 건망 증세를 적당히 둘러대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러한 상황에 닥치면 누구든 당황스러우니까요.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대개의 환자들이 결국에는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됩니다."
"초기에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인 치료가 이루어져야 병의 진행을 최대한 늦출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분야의 전문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 봤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희망적인 말을 해주지는 않더군요. 기껏해야 상태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정도의 말뿐이었습니다. 병이 호전되거나 치유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기 때문이겠죠."
이 말은 최악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정작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무능력해지는 겁니다. 결국에 가서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더욱이 병의 말기로 갈수록 가족들은 환자를 혼자 내버려 둘 수도 없으며, 일부 환자들의 경우에는 성격이 변하기도 합니다. 제 아버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지만, 병 때문에 공격적인 성향으로 변해 버리는 환자들의 예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환자 자신과 그의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입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버지를 만나러 가면 그가 웃어 주었을 때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무언가를 느끼면 나는 그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치매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만의 의식 세계로 들어가서는 그곳에 틀어박혀 버립니다. 그곳은 들여다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세계이지요."
그녀는 우리 사회가 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인한 인구 고령화 현상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따라서 장기적으로 노인들을 돌볼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목차

서문

2006년 봄
2006년 가을
2007년 봄
2008년 여름
2009년 봄
2009~2010년 겨울
2010년 가을
2011년 여름~가을
2012년 가을
2013년 봄
2014년 봄

후기

본문중에서

아내가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나도 사람들과 악수를 나눴다. 사람들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한 일이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그림자 같은 목소리’다. 힐데가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고는 내게 뭐라고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도 그저 그림자 같다.
(/ '2006년 봄' 중에서)

공황상태에 빠졌다. 나는 혼자다. 완전히 혼자다. 통로를 뛰쳐나가자 잡지꽂이가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지면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어서 그만 쓰러지고말았다. 잡지꽂이도 나와 함께 쓰러졌다. 또다시 통증. 그리고 아이의 비명 소리...... "어머나, 지그프리트!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아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2007년 가을' 중에서)

나는 길 위에 서 있다. 그......미지의 무언가로 가는 길, 어둠으로 가는 길.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로 가는 길일까? 이 길은 얼마나 더 길게 이어져 있을까?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도 얼마 안 가서? 내가 누군지조차 모르게 된다면? 내가 몸을 더 이상 조절할 수 없게 된다면? 침을 질질 흘리다가 삶을 끝내게 된다면?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누가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힐데와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도 그런 건 용납할 수 없다. 짐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것만은 안 된다. 그럴 경우에 대비해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사는 건 싫다. 병과의 타협을 시도해 보았다. 어차피 내 안에 웅크리고 있으니. 실체라도 명확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얼굴 없는 이것은 꿈쩍도 하지 않고 침묵할 뿐이다. 알츠하이머라니! 내가!
(/ '2009년 봄' 중에서)

잠옷 바지를 더듬자 뭔가 축축한 게 만져진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네. 어째서 바지가 젖어 있는 거야? 침대로 눈을 돌리자 매트리스에 번져 있는 커다란 얼룩이 한 눈에 들어
왔다. 맙소사, 이건 사실이 아닐 거야. 침대에 오줌을 싸다니....... 어린아이처럼 바지를 적시다니! 이제 어떻게 하지? 아무도 보면 안 되는데. 힐데가 이 꼴을 봐선 안 되는데. 몸
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턱 밑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아요." 어느새 아내가 등뒤에 와서 내 팔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방수요를 깔든지 기저귀를 쓰면 돼요." 기저
귀라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너무나 수치스럽다.
(/ '2009년 ~ 2010년 겨울' 중에서)

휠체어에서 벗어나려 했다. 일어서려 하자 그들이 나를 눌러 앉혔다. 그들이 하는 말을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단 한 마디도. 어째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그림자
같은 목소리’다. 팔이 죔틀에 고정된 것 같다. 이거 놔! 주사기가 내 팔을 향해 다가온다. 고함을 지르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 '2010년 가을' 중에서)

윙윙대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커졌다. 무섭다. 이제 그만......! 방 안이 다 보이도록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무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그러니
정신 차려야 해. 사방이 조용하다. 윙윙대는 소리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닌가? 혼자 있고 싶지 않다. 다들 어디로 간 거야?
(/ '2010년 가을' 중에서)

방 안이 어둡다. 여긴 무슨 방이지? 창문 틈으로 빛이 조금씩 새어 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두 발을 바닥에 딛자 건너편 침대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저건 누구지? 아니,
여기가 어디야? 나직이 ‘이봐요!’하고 불러 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좀 더 큰 소리로 불러봤다. 그는 화가 난 듯 으렁거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2011년 여름 ~ 가을' 중에서)

오늘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가족들이예요." 힐데가 말했다. 나는 모두에게 에이 바르게 인살했다. 누가 온 건지는 모른다. 한 사람은 이르이 미하엘이란다. 내 아들이란
다. 힐데가 가르쳐줬다. 나도 안다고. 내가 바본 줄 아나. 아이들. 시끄럽다. 떠드는 아이들은 싫다. 미하엘은 아들이기는 하지만 좋다.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다.
(/ '2013년 봄' 중에서)

저자소개

이자벨라 트루머(Isabella Trummer)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58
출생지 오스트리아
출간도서 1종
판매수 54권

1958년 오스트리아 남부에 위치한 슈타이어마르크Steiermark주의 마리아 란코위츠maria Lankowitz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교육학 중에서도 특히 학생 심리 상담을 전공했으며, 현재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의 중고등학교에서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그림자 같은 목소리]를 발표 하기 전까지는 추리 소설을 주로 써왔다. 이전 작품들에서는 탐정 '카멀랜더'Kammerlander'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해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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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한 뒤 독일로 건너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정치학과 서양미술사학 학·석사 통합 과정을 마쳤다. 책을 사랑하고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출판 번역가의 길을 택했다. 현재 독일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에게 집중하는 연습》 《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나르시시스트 리더》 《1%의 디테일을 완성하는 센서티브의 힘》 《생이 보일 때까지 걷기》 《예민한 아이의 특별한 잠재력》 《우울한 게 아니라 화가 났을 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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