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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그 깊은 역사 : 500년 조선사회를 이끈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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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권오영
  • 출판사 : 글항아리
  • 발행 : 2014년 04월 10일
  • 쪽수 : 416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6735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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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경전과 역사서는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기저가 되었다
    읽고 쓰는 작업에 매진하며 근본을 다진 가문들
    그들을 통해 조선의 정신과 혼을 엿보다


    사장詞章과 도학이 팽팽히 힘겨루기를 하던 때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다
    이기심성理氣心性에 대해 진지하고도 깊이 있는 학문적 토론을 펼치다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반듯이 하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세출의 문장과 언어를 이뤄내다
    임란의 한가운데를 학문을 충忠으로 관통해내다

    예와 덕으로 500년 역사를 이끈 명가들

    2004년 5월 첫발을 내디딘 이후 매년 네 차례씩 조선의 명문가들을 찾아 그들이 이어온 역사의 맥을 짚고, 그들을 창窓으로 삼아 역사를 읽는 작업을 해온 뿌리회가 펴내는 [조선의 양반문화] 시리즈 2권인 [명문가, 그 깊은 역사]가 나왔다.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2011)에 이은 두 번째 명문가 탐색이다. 옛 시대의 ‘가격家格’이 한 개인의 정체성과 학자관료 집단 및 나라의 근간을 알려주는 개념이 될 수 없지만, 새로운 역사 읽기를 시도하려는 우리에게 가문은 역사의 중요한 주체였고, 핵심적으로 밝혀내야 할 타자이기도 하다.
    조선의 양반들은 ‘지식인’을 자처했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가 그들 인격의 밑바탕을 만들어냈고, 삶의 가치를 규정해주었으며, 그들은 이런 공부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벼슬길에 나아갔다. 다른 한편 과거에 합격한 뒤 벼슬길을 물리치는 집단도 형성되었는데, 재야에 남아 은일자나 처사로 한평생을 연구와 저술에 쏟아붓는 이들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책에서는 이 책은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에 이은 두 번째 권으로 한양 조씨 정암 가문, 창녕 성씨 청송 가문, 창녕 조씨 남명 가문, 영일 정씨 송강 가문, 풍산 류씨 겸암서애 가문, 무안 박씨 무의공 가문, 해주 오씨 추탄 가문, 파평 윤씨 명재 가문, 한양 조씨 주실 가문, 여주 이씨 퇴로 가문 등 모두 열 가문을 다뤘다. 이들은 결코 관료를 많이 배출하고 권력의 정점을 누렸던 곳이 아니다. 그런 기준으로 살피자면, 아첨하거나 영합하고, 무능하거나 타락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가문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 유교의 ‘예禮’와 ‘덕德’을 조선 명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명가의 탄생은 조선시대에 예학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 가문에서 벼슬길에 대한 열망, 탄탄한 경제력, 학맥과 혼맥의 단단한 결속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긴 했으나, 그 중심에는 항상 권력과 힘보다는 도와 예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림정치와 도학정치의 시대를 열다

    16세기 사림의 영수로 맨 앞자리에 놓이는 조광조의 한양 조씨 가문은 원래 공신세력이었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가문이다. 선조 조인옥은 고려 말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을 종용한 인물이며, 조영무, 조연, 조온 등 한양 조씨 일원은 이성계 측에 참여해 활동하고 그 성과로 대거 봉군되었다. 당시 이성계와 중첩하여 혼인관계를 맺은 것이 주효했다. 한양과 경기 지역 일대에 세거하던 한양 조씨는 재지 기반을 확대해나갔고, 15세기 중반에는 일부 계파가 용인 지역에 정착했다. 이러던 것이 조원기가 16세기 초반 소릉昭陵(문종비) 복위를 지지하면서 한양 조씨는 정치적 성향이 변하게 되었다. 점차 사림 성향으로 전환해갔던 것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조원기는 족보 편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집안의 정체성을 다졌으며 드디어 조광조의 탄생을 본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경연 강화와 언로 개방, 소격소 폐지, 현량과賢良科 실시, 위훈 삭제 등 여러 개혁 방안을 추진했다. 이것은 한양 조씨가 남양 홍씨, 진주 유씨, 창녕 조씨, 여흥 민씨, 한산 이씨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성씨들과 꾸준히 통혼권을 형성한 영향도 있었다. 일부 훈구 계열 가문 외에도 새롭게 정치세력화하던 사림 계열 가문과의 통혼관계는 조충손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직되고 이후 한양 조씨 가문에서 과거합격자가 계속 배출되면서 중앙정치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었던 보호장치로 기능했다. 뿐만 아니라 조광조 등이 중앙 정치에서 사림의 영수로 활동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되기에 충분했다.
    조광조는 결국 기묘사화라는 역풍을 맞았다. 조광조 사후 한양 조씨 가문에서는 반란 세력에 가담한 자가 나오는 등 세파에 휩싸여 그의 무덤도 거의 황무지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시대가 활짝 열렸고, 조광조가 뿌린 씨앗은 열매를 거두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엔 국왕들이 존숭하는 대상이 되었다. 숙종이 [정암집]을 읽고 어제御製로 그 뜻을 표현했을 뿐 아니라 영조는 ‘해동대현海東大賢’이라 일컬었다. 여기에는 물론 저마다의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었는데, 바로 사림 도통 계승의 천명이었다. 어쨌든 왕들의 이런 포장이 가문을 역사 속에 온전히 서게 했음은 분명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지금 문벌이 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다음이 우리 창녕 성씨다"라고 했듯, 창녕 성씨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문 집안이다. 성삼문, 성담수, 성현, 성수침, 성혼 등 이름을 빛낸 수많은 관료와 학자가 이 집안에서 나왔다. 성여완이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고, 그의 세 아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나갔다. 이후 성충달의 아들 성세순은 이조참판까지 이르렀다. 연산군과 중종 때 모두 벼슬생활을 한 그는 "이조참판 때 그의 집에 벼슬을 구하러 오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청렴했"으며 죽었을 때 김안국이 "조정은 양좌를 잃었다"라고 할 정도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 책에서는 성세순을 기점으로 그의 아들인 성수침과 손자 성혼으로 이어지는 창녕 성씨 가문의 학문적 위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
    특별히 성수침과 성혼을 주목했다. 성수침의 서재에는 도서圖書가 가득했다. 하지만 성수침의 학문은 자기 몸을 돌이켜 가장 절실한 것을 구하는 일을 우선시했다. 그는 일찍이 학자들에게 이르기를 "도道란 큰길과 같다는 성인의 가르침이 분명한데 어찌 알기 어렵다고 하겠는가. 가장 고귀한 것은 힘써 배워 그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소학] 공부를 매우 중시했다.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성수침은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헤아리고 드디어 과업科業을 버리고 백악산白嶽山 아래 집 뒤에 두어 칸 집을 짓고 ‘청송당聽松堂’이란 현판을 달고는 문을 닫은 채 혼자 그 속에서 날마다 성인의 교훈을 외우며 태극도太極圖에서부터 정주서程朱書에 이르기까지 손수 다 베껴가면서 의리를 탐구했다. 조정에서 수많은 부름이 있었지만 결국 나아가지 않고 72세로 작고했다.
    성수침의 아들 성혼은 이이와 함께 도학종사로 16세기 기호학계를 대표했다.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온 힘을 쏟은 인물이다. 율곡과 사단칠정으로 논쟁을 벌이기도 한 그의 논리는 ‘이기일발설理氣一發說’로 정리되는데, 이황과 이이의 견해를 절충했다는 평가와 함께 윤증박세채를 비롯한 소론계와 김창협김창흡 등 몇몇 노론 학자에게 계승되어 하나의 학맥을 형성했다.
    창녕 성씨 가문의 명성은 성수침성혼 부자의 묘소를 둘러보면 잘 알 수 있다. 성수침의 묘갈명은 이황이 직접 쓴 것이며, 성혼 묘비의 비문은 김집이 짓고 윤순거가 썼다. 묘소 입구 오른쪽엔 김상헌이 짓고 김집이 쓴 신도비가 있다. 이들 부자의 학문과 인품에 대한 조선조 학자들의 존경과 칭송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의義의 정신을 떨치고 불세출의 문학을 이뤄낸 인물들

    남명 조식을 배출한 창녕 조씨 가문은 직계 조상으로는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은 없지만, 외계로는 혁혁한 인물이 많았다.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을 지낸 조지서 집안은 남명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책에서는 조지서에서 남명으로 이어지는 강골정신의 계보가 눈길을 끈다.
    지족당은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 공부하기 싫어하는 연산군을 끝까지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려다가 연산군에게 소인小人으로 낙인찍혀 훗날 화를 당했다. 남명은 지족당의 묘갈명에서 "당시에는 소망지蕭望之처럼 보필했고 나중에는 오자서伍子胥처럼 억울하게 죽었다"라고 하면서 비감어린 심정을 토로했다. 496년(연산군 2)에 지족당이 무고로 인해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올린 상소문에는 "간을 베어 종이로 삼고 피를 뿌려 글자를 써서肝爲紙 瀝血以書"라고 한 표현이 나오며 이는 남명이 [욕천浴川]이란 시에서 "만약 티끌이 오장에서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리塵土能生五內 直今腹付歸流"라고 한 것과 흡사하며 격렬하기 짝이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조지서의 이러한 행적을 통해 남명사상과 행동 방식의 한 면을 연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조지서 역시 남명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식은 지리산 천황봉처럼 우뚝한 벽립천인의 처사로 늘 ‘성성자’라는 방울과 경의검을 차고 생활했던 그는 자기 집 벽에 ‘경의敬義’ 두 글자를 써놓았고, 그의 학문은 곧 ‘경의지학敬義之學’으로 일컬어진다. ‘경의’라는 명제는 [주역] 곤괘 ‘문언전’의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남명은 경의라는 글자와 관련시켜 존양성찰存養省察을 뜻하는 ‘명’과 처사접물시處事接物時에 결단을 의미하는 ‘단’을 그 자리에 대체시킴으로써 [주역]이 함의하는 바를 넘어서 자신만의 새로운 용어로 재정립시켰다. 남명은 국왕 선조에게 ‘군의君義’ 두 글자를 올린 바 있다. 그가 그린 [신명사도] 안에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국왕에게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하며, 학자 역시 죽음으로써 도를 지킬 생각이 없으면 그 마음을 보전할 수 없다는 강한 메시지를 표현한 것이다.
    조선 후기 갑술환국 이후 영남 출신들의 환로는 막혔고, 영조 연간에 일어난 무신란은 그들의 어려움을 더 지극하게 했다. 영남 우도 역시 벼슬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비범한 학자들도 배출하지 못했는데,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학문에 탁월함을 보이는 인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은 조식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표방하고 나서 20세기를 거치면서도 조식의 ‘경의’ 정신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영남과 마찬가지로 호남에도 많은 명가가 자리했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맥을 잇는다. 기대승의 행주 기씨, 김인후의 울산 김씨, 고경명의 창평 고씨, 정철의 영일 정씨, 윤선도의 해남 윤씨 등이 호남의 명가를 대표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호남 명가는 영일 정씨다. 그중 선조대에 좌의정을 지낸 정치가이자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정철은 정극유를 시조로 하는 가문에서 났다. "흉회가 호방했던" 인물 정철의 한평생은 사실 권력과 비난과 죄인의 신분 등으로 얽힌 파란만장함 그 자체였다. 직선적인 말과 과실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선조대 치열했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어 동인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불세출의 언어로 남겨진 위대한 문장과 시들은 오늘날 그의 존재를 여전히 살아 숨 쉬게 한다.
    이 책에서는 파란만장한 정철의 삶을 조망하면서 동시에 조선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하는 정철가의 고문서를 살펴보고 있어 흥미를 끈다. 송강 정철 가문의 고문헌은 아직까지 완전하게 조사되지 못했다. 후손들이 충북 청주와 진천 일대에 살고 있지만 여태껏 체계적으로 조사한 바가 없다. 다만 지실마을의 고문서 일부가 2009년 계당溪堂의 당주 정구선鄭求宣 선생에 의해 전남대 도서관에 기탁됨으로써 셋째인 진명과 넷째인 홍명, 그리고 그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료도 1902년 계당에 화재가 일어나 많은 자료가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온전한 것은 아니다. 정구선 선생이 기탁한 고문헌은 고서 1117책, 고문서 2993건, 고서화 143점 등 총 4193점이다. 고문서는 간찰이 2414건, 그 외 문서가 519건이며, 고서화는 서예가 119점, 회화가 25점이다. 이들 문서 중 고서는 2009년 전남대 도서관에서 [고문헌도록-계당위탁 고문헌]으로 펴내 서명, 판본, 연도, 소장권, 책수 등 간략한 목록과 함께 주요 도서를 소개하고 있다. 정홍명이 선위사宣慰使로 대마도 사신 등을 응대해 상경을 안내했던 기록인 [음빙행기], 정철이 1593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면서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던 일의 불가피성을 말하고 원군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고자 중국 관원과 나눈 대화 내용을 기록한 [문청공연행일기], 선조대부터 숙종대까지 서인 계열의 간찰을 모아 만든 첩본인 [동현간독], 정홍명과 함께 김장생의 문인으로 우정이 돈독했던 장유張維가 정홍명에게 준 시를 모은 시첩인 [계곡첩] 등 눈길을 끄는 책들이 많다.

    안동의 명재상 서애 그리고 동해안의 무의공 가문

    안동에는 시례詩禮를 숭상해온 명가가 많다. 그중 이황을 배출한 진성 이씨, 류운룡류성룡을 배출한 풍산 류씨, 김성일을 배출한 의성 김씨 등이 손꼽힌다. 특히 풍산 류씨는 조선 후기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는 명가다. 이 가문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서 나라를 지켜냈던 영의정 서애 류성룡을 들 것이다. 조선시대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그 자리에 올랐다 해도 명상名相으로 칭해지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서애가 비록 퇴계에게서 학문을 배웠지만 이로써만 논한다면 오히려 그의 진면목을 가리고 만다. 즉 그의 학문을 이기론理氣論적 구도에 위치지어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으며, 퇴계학파의 중심인물이기 이전에 조선조의 수상首相으로 왜란이라는 왕조 최대의 위기를 극복해낸 경세가經世家로 조명해야 한다. 더구나 목릉성세穆陵盛世라 불릴 만큼 인재가 극성했던 선조대에 대표적인 수상이었다는 점은 지역 차원에서 서애를 이해하기보다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며, 도학자의 차원뿐 아니라 정치가경세가의 차원에서도 조명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이 책에서는 비록 짧은 지면이지만, 그의 학문과 정치가 어떻게 어우러져 현실성을 발휘했는지 안팎을 살피고 있으며, 특히 그가 나라의 인재로서 활약할 수 있도록 집안일의 염려를 덜어준 형 겸암 류운룡의 됨됨이도 함께 살펴보고 있다.

    영남 동해안에 위치한 영해에는 농수산물이 넉넉해 조선 후기에 탄탄한 경제적 배경을 기반으로 명문가로 성장한 가문이 많았다. 이곳은 예부터 안동 명문가들과 혈연적학문적 연대를 맺어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고 꽃피운 곳이라 하여 ‘작은 안동’이라 불리곤 했다. 특히 명현의 등장은 짧은 시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인데, 생활 기반을 갖추는 것은 물론이고 벼슬길에 나아가 고급 관료들을 배출하며 혼인관계를 맺는 것은 세월의 흐름을 요했고, 여러 대에 걸쳐 전략적인 선택과 집중으로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영해의 무안 박씨 가문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이성계 측의 신흥 무인 세력과 연대했다. 무안 박씨가 영해에 정착한 것은 박지몽에 의해서였는데, 부모를 여읜 그는 백부 박이가 영덕군수로 부임할 때 그를 수행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이 가문은 박의장에 의해 일약 명가로 부상한다. 박의장은 임진왜란이라 나라의 위기에 맞닥뜨려 크고 작은 전투를 10여 차례나 이끌며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써 그는 높은 벼슬을 지냈을 뿐 아니라 덕망도 떨쳐 영남 굴지의 명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이후 박세렴 대에 와서는 부모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배움에 전념했으며, 무반이 아닌 문반으로 나아가 문중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할 책임을 느껴 박세렴은 39세의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두 아들의 학문적 성취를 독려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세렴은 부친과 자기 당대에 구축된 이황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퇴계 학통과 긴밀하게 관계를 다져나갔으며, 손자가 유학자적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다.

    기호 지역의 명문 해주 오씨와 충청을 대표하는 파평 윤씨

    오윤겸을 명조로 하는 해주 오씨는 경기도 용인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기호 지역의 명문이다. 이 가문은 1401년에 그려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계보 기록인 [해주오씨족도]를 소장하고 있다. 오효충의 아들 오광정이 기초하고, 아들 오선경이 완성한 이 족도는 계보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 오윤겸은 오효충의 후손으로 성혼 우계의 문인이다. 그는 일생 학문에 정진한 학자이자 고위 관료로서 청렴했고 근면했다. 광해조에 절의를 지키고 반정 이후 영의정을 지냈다. 오희문이 이처럼 가문의 격을 세운 것은 그 아버지 오희문이 평생 품었던 벼슬살이에 대한 욕구를 실현한 것이기도 했다. [쇄미록]이란 일기의 저자인 오희문은 선조 오희보 이래 과거 출신 및 고관을 내지 못했던 집안의 열등의식과 좋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자식들이 집안을 일으켜주었으면 하는 솔직한 속내를 일기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 피란살이 와중에서도 오윤겸 형제를 서당으로 보내 학업에 힘쓸 것을 독려했고, 과정의 소식과 동정에 귀를 세우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오윤겸의 현달은 이 가문을 17세기 사림사회에서 우뚝 선 존재로 만들었다. 오윤겸의 정치사회학문적 면모와 비중은 우율 문인, 특히 ‘파문고제坡門高弟’라는 점, 광해조에 절의를 지키고 반정 이후 수상을 지냈다는 점, 한평생 학자관료로서 청렴근면하며 덕업을 쌓았고 정치적으로는 서남 화합을 추구했던 보합론자였다는 점 등으로 요약된다. 이런 바탕 위에 조카 오달제의 절의, 손자 오도일의 문장, 현손 오명항의 훈공이 더해지면서 추탄 가문은 ‘3불후三不朽’를 갖춘 집안으로서의 자존의식을 천명해나간다.
    송시열의 [회덕향안] 서문에서는 "내가 생각건대 호서에는 예로부터 3대족이라 일컫는 바가 있었으니 연산의 김씨, 니산의 윤씨,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회덕의 송씨다"라고 할 만큼 노성의 파평 윤씨 집안은 조선 중기 호서를 대표했다. 파평 윤씨 노성파는 윤돈이 충청도에 정착한 뒤 형성된 문중으로, 윤돈은 류연의 차녀 문화 유씨와 혼인하면서 처향인 충청도 노성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때가 16세기 중엽인데, 윤돈의 후손 중에는 문과급제자가 4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뒤 윤황의 아들 8형제가 이름을 드러냈는데,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로 이 가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상징적인 인물이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우계 성혼의 외손으로 가학이 성리학이었다. 윤증 역시 부친의 뒤를 이어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그는 노성의 유봉 밑에 종학당宗學堂을 설립하고 문중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윤증은 17세기 호서 사림의 대표로서 호서뿐만 아니라 중앙 정치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효종 말년에는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하지만 그는 벼슬을 일체 마다하고 재야에서 생활하며 학문을 쌓아 ‘백의정승’이라 일컬어졌다.
    한편 윤증과 그의 스승 송시열 사이에서는 회니시비懷尼是非가 일었는데, 이것은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우암에게 부탁한 데서 비롯되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순절하지 못하고 강화도를 탈출해 늙은 부모를 만나고자 남한산성으로 갔던 바 있는데, 이 일로 인해 스스로를 폐인으로 자처하며 향촌으로 숨어 들어가 평생 학업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애초부터 묘갈명을 쓸 의향이 없었고, 그들 사이에 윤휴라는 인물이 끼어 갈등을 일으키면서 사제간의 의리는 끊기고 만다. 이 문제는 그러나 개인 간의 불화로 그치지 않았고, 이후 송시열의 처신에 실망한 무리가 생겨난 뒤로부터는 암암리에 노론과 소론의 분당에 촉매재 구실을 했으며, 선비들 사이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유증을 지지하는 소론으로 갈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이런 불화가 있긴 했으나, 윤증은 어쨌든 조선시대에 군왕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삼공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라고 알려졌다.

    한양 조씨 주실 가문과 여주 이씨 퇴로 가문

    영해의 인근 고을인 영양의 일월산 자락에 위치한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한양 조씨가 영남 지방으로 이주한 것은 기묘사화 때다. 조종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잡은 영남의 영주는 외가 및 처가라는 연고가 있었던 곳이다. 그 뒤 조원이 1535년 영양으로 이주함으로써 조씨가 영양 일대에 많이 살게 되었다.
    주실 조씨 가문은 조선 후기에 조덕순조덕린 형제가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가면서 영남의 명문으로 부상했다. 조덕순은 1690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조덕린은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나자 영남의 호소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 뒤 이 가문은 조선 후기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주실 한양 조씨 가문은 영남 산골에 살면서도 다른 어느 가문보다도 일찍 개화에 눈을 떴다. 1899년 조종기조인석조두석 세 사람이 조창용조술용과 함께 조병희를 따라 상경해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오늘날 주실 한양 조씨가 각계각층에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개화 문물을 빨리 수용했기 때문이다.
    주실마을에 가보면 18세기 말에 지어진 월록서당이 남아 있고, 마을 앞에는 문필봉이 솟아 있다. 오늘날까지도 주실 조씨 가문의 종가는 세 가지를 남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의 전통을 자랑한다. 첫째 양자를 빌리지 않고, 둘째 글을 빌리지 않고, 셋째 재물을 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실의 한양조씨 명가의 전통은 이같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여주 이씨 밀양파는 15세기 초에 서울에서 밀양으로 이주하여 근 600년간 시례를 숭상해온 명가로 영남의 유림사회에서 아주 높은 명망을 유지해왔다. 그 가운데 여주 이씨 퇴로 가문은 이종극의 아들인 이익구와 이능구, 이명구 삼형제가 1890년에 세거지인 밀양 단장면 무릉리에서 부북면 퇴로리로 이주한 뒤에 형성된 명가다.
    퇴로 가문은 영남에 내려온 뒤 영남의 명가는 물론이고, 근기 실학의 종사인 이익 일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 가문은 19세기 후반의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전통적인 유학의 가치를 고수하면서도 이익에서 허전으로 이어지는 근기 실학의 학통과 학문을 계승함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신학문을 수용해 교육했고, 또 각종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쳤다. 현재 퇴로리에는 쌍매당, 천연정, 청덕당, 서고정사 등 고가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글을 통해 빛나는 명가의 법고의 전통과 더불어 창신의 정신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 부장. 저서 [사적史蹟으로 본 안동독립운동], 공저 [오미마을 사람들의 민족운동] [안동 근현대사], 공역 [국역자료집-권오설(1,2)], 논문 [안동콤그룹의 조공재건운동] 외 다수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 저서 [최한기의 학문과 사상 연구] [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조선 성리학의 의미와 양상], [근대이행기의 유림] 외 다수.

    김봉곤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공저 [지리산과 인문학] [섬진강 누정산책], 논문 [노사학파의 형성과 활동] [최부의 중국표류와 유학사상] [지리산권(남원,함양)사족의 혼인관계와 정치, 사회적 결속] 외 다수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학자료조사실장. 저서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공저 [여헌 장현광의 학문 세계] [조선 양반의 일생], 논문 [17세기 영남학파 연구]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증시행정] 외 다수.

    박병련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원장. 공저 [남명 조식-칼을 찬 유학자] [남명학파와 영남우도의 사림] [잠곡 김육] [여헌 장현광] [서계 박세당] [용비어천가와 세종의 국가경영], 논문 [삼봉 정도전의 행정사상 연구] 외 다수.

    이근호 한국체육대학교 강사. 공저 [조선시대 경기북부지역 집성촌과 사족] [정조의 비밀어찰, 정조가 그의 시대를 말하다], 논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 [17세기 경화사족의 인적관계망] 외 다수.

    이상필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저서 [남명학파의 형성과 전개] [남명 조식] [선비가의 학문과 지조], 역서 [남명집] 외 다수.

    이영춘 한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저서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차례와 제사] [임윤지당] [강정일당], 공저 [조선시대의 청백리] [한국정치사상사] [잠곡 김육 연구] 외 다수.

    임선빈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실 전임연구원. 공저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근대이행기 지역엘리트 연구 1], 역서 [심춘순례] [백두산근참기], 논문 [인조의 공산성주필과 후대의 기억] [금강의 지명변천과 국가제의] 외 다수.

    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저서 [조선후기 화폐유통과 경제생활], 논문 [18세기 이재 황윤석의 화폐경제생활] 외 다수.

    목차

    1장 조선 사회에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천하다
    한양 조씨 정암 가문 | 이근호

    2장 은군자와 도학자를 배출한 조선의 명가
    창녕 성씨 청송·우계 가문 | 권오영

    3장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반듯이 하다"
    창녕 조씨 남명 가문 | 이상필

    4장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세출의 문장과 언어를 이뤄내다
    영일 정씨 송강 가문 | 김봉곤

    5장 임란의 한가운데를 학문과 충忠으로 관통해낸 구국의 경세가
    풍산 류씨 겸암·서애 가문 | 박병련

    6장 엄격한 가정 경영과 과감한 실천으로 이름을 떨치다
    무안 박씨 무의공 가문 | 정수환

    7장 학통과 정파와 혼맥을 초월한 열린 가문
    해주 오씨 추탄 가문 | 김학수

    8장 '백의정승'을 배출한 소론의 명가
    파평 윤씨 명재 가문 | 임선빈

    9장 "사람, 글, 재산은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
    한양 조씨 주실 가문 | 강윤정

    10장 실학정신으로 근대의 선구가 되다
    여주 이씨 퇴로 가문 | 이영춘

    참고문헌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경북 안동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영남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한국사학 전공)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최한기의 학문과 사상연구, 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조선 성리학의 의미와 양상, 근대이행기의 유림,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지식인의 생활사(공저), 혜강 최한기 연구(공저)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최한기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현실인식], [조선조 사대부 제례의 원류와 실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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