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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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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야생의 여성성을 찾아서, 그녀만의 섬뜩한 감성으로 새로운 여성 미학을 직조해내는 작가 천운영의 두번째 소설집



    한국 소설의 전통과 여성 소설의 계보를 일신하며, 여성성의 문학적 의미를 파격적으로 갱신하는 최근작 여덟 편 수록.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로 소설집 『바늘』로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신예 천운영의 두번째 소설집 『명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되었다.
    1990년대 들어 문단의 전면을 장식하며 등장했던 일군의 여성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작품 세계와 작가관을 선보여 새로운 여성 미학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았던 천운영은 이번 소설집에 한층 성숙하고 폭넓어진 작가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했다.
    지난 소설집 『바늘』에서 육식성의 욕망을 괴기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탐구했다면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 강도와 집착을 덜되, 그 폭을 넓히는 일에 주력했다. 또한 『바늘』에서 치밀한 취재력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묘사와 강렬한 이미지에 치중했다면,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다양한 소설적 장치들을 활용한 작풍으로 한 걸음 나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문학평론가 김동식은 해설 「숨쉬기의 무의식에 관하여」에서 이번 소설집에서 삶에 대한 욕망이 구체화되는 양상을 '페티시fetish', '판타지fantasy', '희생 제의'로 정리했다.
    먼저 페티시는 천운영 특유의 육식성과 그 맥을 같이하되, 그 양상은 조금씩 변주된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라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가슴에 이어 가슴 가장자리의 세번째 유방을 탐하는 남자(「세번째 유방」), 떠나간 남자의 손에서 세상을 본 여자(「모퉁이」) 등은 천운영 소설의 대표적인 육식성 인물들이다. 한편「명랑」에서는 '상처 없는 몸'에 대한 희구로 재현된다.


    그녀(할머니―인용자)의 발은 전족(纏足)을 한 것처럼 작고 위태롭다. 14문 버선을 벗기면 아기처럼 보드랍고 작은 발이 숨겨져 있다. 굳은살 없는 뒤꿈치는 땅 한번 디뎌보지 않은 살처럼 동그랗고 야들야들하다. [……] 그녀가 버선을 벗고 발을 씻을 때면 그녀의 발에서는 달짝지근하면서도 비린 풋내가 풍기는 듯하다. 나는 향긋한 풀냄새를 맡으며 버선을 벗긴다.(p.14)


    두번째 '판타지'는 「늑대가 왔다」라는 작품에 두드러진 핵심 자질이며 작가 천운영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특질이기도 하다. '늑대가 왔다'라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를 소녀의 이야기로 바꾸어놓은 작품이다. 소녀가 보는 늑대는 소녀의 소녀성에 관한 독특한 의미 자질을 생성하는 동시에,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 간 아버지의 상징이다. 소녀의 존재와 내면을 둘러싼 설화와 환상, 그리고 그녀가 처한 숯가마 마을 사내들이 만드는 현실가의 접목은, 소설 공간을 신화적인 공간과 현실적인 공간에 걸쳐 있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희생 제의'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상황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역시 천운영 소설이 주요한 자질들 중 하나다. 칼이 몸에 들어오는 느낌을 원해 자신의 배꼽을 찔러달라고 졸라대는 여자(「그림자 상자」), 자신이 3년 동안 몸담았던 건물에 영원히 남고 싶어 엘리베이터 틈에 몸을 던지는 사내(「입김」), 자신이 그렇게도 집착했던 여인의 세번째 유방에 정확히 칼을 꽂아버리는 남자(「세번째 유방」) 등이 등장한다.




    「바늘」,「숨」 등 초기작에 비해 『명랑』에 수록된 작품들은 소재나 이미지의 강렬성이 순화된 느낌이다. 발로 쓴 생생한 묘사력이 줄어들고 초점 이동이나 시점의 변화, 소재에 대한 해석적 깊이, 심리적이거나 환상적인 사건 활용 등이 더해졌다. 물론 전혀 이질적인 스타일 변화까지 나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실제 경험을 중시하며 고통스럽고 산문적인 삶의 현장을 서사적 문제의식으로 팽팽하게 긴장한 채 지키려 하는 의지는 뚜렷하게 감지된다.
    천운영은 아직 도정의 작가이다. 지금까지 쓴 이야기보다 앞으로 쓸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지닌 작가다. 이미지의 강렬성으로 밀고 나갔던 초기작들의 특성이 작가 자신에서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접속 시대의 흐름에서 비껴나 생생한 체험을 요령 있는 스타일로 서사화하는 그녀의 소설은 이제 더욱 다양한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삶의 현장에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천운영이 더욱 탄탄하고 활달하게 보여주길 바란다. 천운영의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리얼리티, 새로운 스타일과 더불어 포스트리얼리즘의 신천지가 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우찬제(문학평론가)




    작품집 『명랑』에는 ‘냄새’라는 단어가 124번 사용된다. 천운영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냄새를 통해서 세계를 인식한다. 달리 말하면 등장인물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세계를 바라보거나 세계에 관한 소식을 듣지 않는다. 그들은 호흡을 통해서 세계를 경험한다. 들이마시는 숨을 따라서 세계가 그들의 몸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외부 세계가 전달하는 여러 냄새들을 통해서 자신의 객관적 상황과 무의식적 욕망을 자각한다. 그들은 또한 호흡의 상호성을 구현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존재들이다. 숨을 들이쉬며 세계의 냄새를 맡을 뿐이다. 그렇다면 언제쯤 숨을 내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입김을 세계에 풀어놓을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죽음을 불러들이는 제의적인 몸짓이 펼쳐진다. 죽음의 지점에서야 그들은 숨을 내쉰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호흡을 완성한다. 생명에 대한 비극적인 갈망. 천운영 소설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귀착점이 아닐까
    ― 김동식(문학평론가)




    천운영 소설 속의 여성들이 처한 억압과 소외는 거의 태생적인 것에 가깝다. 그 억압과 소외가 함유하는 사회적·문화적 동기와 맥락은 소설의 표면에서는 희미하게 나타난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그녀들이 견뎌내야 할 불우는 가족 단위의 어두운 운명론에 기대고 있다. 이 젊은 작가는 그 오래된 운명론에 독특한 미학적 자질들을 새겨넣는다. [……] 천운영의 소설들은 여성과 여성 사이의 실존적 관계, 혹은 여성의 실존적 연대에 대한 작가적인 관심을 통해 새로운 여성 미학의 전선을 형성해가고 있다. 한국 문학에 독특한 여성 캐릭터의 이미지를 새겨넣으며서 여성성의 문학적 의미를 갱신한 작가 천운영. 작가는 1990년대 여성 소설의 성취를 껴안고 상투적인 여성 이미지를 창조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소설적 가능성을 시험해왔다.
    ― 이광호(문학평론가)




    목차

    명랑

    늑대가 왔다

    멍게 뒷맛

    모퉁이

    세번째 유방

    아버지의 엉덩이

    입김

    그림자 상자



    해설·숨쉬기의 무의식에 관하여 _ 김동식



    작가의 말

    본문중에서

    그녀가 먹는 가루는 명랑이다. 명랑은 진통제다. 명랑 백 포들이 상자 겉면에는 두통을 비롯한 관절통, 인후통 등 열여섯 가지 통증과 오한 발열 시 해열의 효능까지 있다고 적혀 있다. 하루 2회, 복용 간격은 여섯 시간 이상으로 한도를 두고 있지만 그녀는 명알이 설탕 가루라도 되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털어넣는다. 그녀가 먹은 것은 약기 아니라 방부제인지도 모른다. 그녀 몸은 이미 부패가 시작되었고 부패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방부제를 투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에게서 풍기는 늙은이 냄새 또한 죽음을 위장하는 방부제 냄새가 분명하다. 그녀 몸 구석구석에는 채 녹지 않는 명랑 가루가 그대로 쌓여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죽어도 썩지 않으리라. 나무뿌리가 관뚜껑의 틈을 벌리고 그 틈새로 떨어진 흙이 그녀 몸을 덮치는 동안에도 그녀의 머리칼은 잔뿌리처럼 쑥쑥 자라날 것이다.


    - <명랑> 본문 중에서




    지난 삼 년 동안 내 옆에서 한결같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검은 개. 그 개가 얼마 전 살구씨를 삼켰다. 그러더니 배가 조금씩 불러오고, 전에 없던 식탐을 부리고, 햇볕에 앉아 깜빡깜빡 졸고, 구역질을 하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 개는 지금 상상 속에서 임신 중이다. 얼마 있으면 다른 임신한 개들과 똑같은 산고를 겪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주인 닮아 소설 쓰느냐고 비웃는다. 그런데 나는 그 개가 측은하면서도 기특하다. 그 속에 품은 것이 생명을 갖지 못한 살구씨라 할지라도, 그래서 낳은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할지라도, 그 개는 힘든 산고를 겪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내가 쓰는 소설이 아주 작은 살구씨를 품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고통만 있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겪은 산고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 되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양분을 흡수하고 가슴을 부풀릴 것이다. 그러다보면 꾸물꾸물 움직이는 동물은 아니어도,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넓히는 나무 한 그루를 내 속에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면, 그리하여 단 한 사람에게라도 새콤한 살구 맛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걸로도 되지 않을까? 나느 단단한 껍데기가 열리고 싹을 틔우는, 내 몸에 자리잡은, 하나의 살구씨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깥으로 내보이기 위해 거쳐야 할 고통을 기쁘게 맞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71~
    출생지 서울특별시
    출간도서 20종
    판매수 13,176권

    1971년 서울 출생.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 『엄마도 아시다시피』,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 『생강』 등이 있다. 2003년 신동엽문학상, 2004년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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