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여기 침묵처럼 무섭고 슬프게 살다 간, 한 시인이 있다.
그 시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를 몇 편 보내어 당선의 영예를 안았을 뿐, 그 이후 어떤 곳에도 작품 한편 발표하지 않았으며, 시인이라는 관사를 쓰고 어느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홀로 남양주의 작은 아파트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골목을 배회하고 시를 쓰다가 죽었다. 뒤늦게 친구들이 찾아가 시신을 불태우고 재를 산과 강에 뿌렸다.
그가 여림이다. 장례를 마치고 친구들이 아파트를 찾아가 컴퓨터를 열어보니, 초고를 끝낸 유작시 110편이 나왔다. 친구들은 110편의 유작을 여러 벌 복사하여 평소 그가 무척 따랐던 그의 은사이신 최하림 선생을 비롯한 박형준 등 문우에게 보내주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특히 내 눈물샘을 심하게 건드린 것은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라는 구절이었다. 시인은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찾아보았으나 그럴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인은 면도날로 여러 갈래 손목의 핏줄을 자른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을 결행하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피 흐르는 손목을 꼭꼭 접어 맨 뒤, 창 밖의 세상을 본다.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그는 흐느낀다.
그것은 감상적인 넋두리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다. 그는 홀로 침묵 속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도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죽을 이유와 살 이유를 찾았다. 죽을 이유도, 살 이유도 없었다. 이유가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나는 삶에 이유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것이 여림과 내 차이였다.
― 최하림「우정의 글」중에서

얼마나 무섭고 슬프기에 여림은 살 만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하고 종일 생각했으며, 아무 이유를 찾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던졌을까. 왜 그는 그토록 외로운 상황에서도 시를 발표하지 않았을까. 발표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침묵 속에서 침묵처럼 침묵을 사는 것이 시인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여림의 시를 관류하는 것은 홀로 있음이었다. 홀로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두려웠고 밤 골목을 헤맸다. 살만한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도 홀로 있다는 사실의 두려움을 담고 있는 물음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이 담지하듯이 홀로 있음은 인간의 얼굴을 돌로 만들며 검은 침묵으로 포장한다. 홀로 있음과 침묵은 하나이거나 외로움의 더께가 침묵이다. 침묵하고 있을 때 인간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울에 갇힌 짐승처럼 포효하고 긴장한다. 실제로 침묵은 울에 갇힌 언어라 할 수 있다.
여림의 시는 살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욕망에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괴롭고 슬프다. 생을 마감하기 4년 전(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던 1999년)에만 해도 그의 시는 슬프되 따스한 체온이 저류에 흐르고 있었다. 그의 데뷔작인 「실업」에는 그 체온이 여리게 느껴진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 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 「실업」 전문

이 시에서의 ‘즐거운 나날’은 실제로 즐거운 나날이 아니다.
그는 시

시인 여림의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절망을 느낄 수 있는 시집이다. 그는 이 시집 한편을 발표하고 2002년 겨울에 타계 했다.에 쓰인 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름다웠’고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던’ 것도 아니다. 그에게 아내는 없었고 아이들도 없었다. 직장도 없었다. 그는 독신이었다. 집과 아내와 아이들은 소유하고 싶은 것일 뿐 소유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들은 소유하지 못한
세계를 부정하거나 돌멩이질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넘어다보았다. 이 무렵의 그의 시에는 곳곳에 따뜻한 언어들이 넘친다.
그러했던 여림이 급기야 그의 시편들이 아직도 빨간 불을 켜고 깜박깜박 하는 컴퓨터와 작별하고 박형준과 이승희, 김진주와도 작별한다. 여림은 아름다운 세상에게도 하직인사를 하고서 ‘언젠가는 나를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사다리가 되리라’ 믿었던 곳으로 걸어 올라간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나 ‘따듯한 불빛’이 가득한 집으로 간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최하림과 박형준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가 더 많은 날과 밤을 살아주기를 바랐던 편은 아니었다. 더 많은 시를 쓸 시간을 갖기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시의 길은 택해서 걸었고, 시인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시 한 편을 달랑 세상에 발표하고 그 많은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가, 여림은 침묵을 이길 수 있었던가, 여림이 침묵 그 자체였던가 하는 물음이 바닷가의 파도처럼 내 목을 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의 침묵이 아프다. 여림은 갔으되 오래오래 그 아픔은 내 가슴을 치리라. 그런 밤엔 다시 그의 시집을 찾아들고 읽게 되리라.
― 최하림「우정의 글」중에서

그가 죽고 유고집을 만들기 위해 친구가 그의 시를 취합해 메일로 보내왔을 때에야 나는 내가 얼마나 모진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의 시에 배인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절망은 그가 일찍 죽을 수밖에 없는 시인임을 절절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아무런 수사 없이도 시행을 감싸고 있는 진실한 울림은 시란 영혼으로 쓰는 것이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님을 아프게 깨우쳐줬다. 그가 최하림 선생님을 좋아한 것도, 필명을 선생님의 이름을 따 여림으로 삼은 것도, 영혼이 저절로 토해져서 나오는 시의 길을 밟고자 한 그의 의지였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 박형준「우정의 글」중에서

이처럼 여림의 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는 매우 여리고 섬세하면서도 내구성이 강한 감성의 실핏줄들로 짜여져 있다. 이 감성의 실핏줄의 마디절에는 정겨움, 가난, 이별, 그리움, 회의, 우울 등의 정조가 견고한 내성의 울림으로 응결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적 결절들은 ‘삶의 한 가운데를’ 향한 갈망과 죽음의 심연을 향한 매혹으로 축약된다. “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다짐을 가슴 깊이 각인하고서 세상의 것들에게서 발을 떼려”(「내가 여읜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겨울」) 하는, 삶에 대한 욕망과 죽음의 매혹이라는 모순 명제가 중첩되는 점이지대에서 그의 시는 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는 거듭 읽을수록 부드럽고 아름다우면서도 창백한 슬픔과 우울의 정감이 깊이 배어 나온다.
마침내 그는 ‘종일,/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하다가, ‘저녁 무렵,/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여러 갈래 짓이겨서 쏟던 피’의 현장 속에서 스스로 죽음의 벼랑으로 하강하는 자신을 망연히 응시하기도 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지만,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의 냉담한 횡포 앞에서 어떤 ‘희망’의 출구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여림은 기어코 ‘꿈으로 지은 집에 세 들어 살’다가 ‘그 집의 세간들에 정 들 무렵/홀연/먼 길을 떠’(「木에게」)나고 말았다.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려’한 것이 ‘세상의 것들에게서 발을 떼’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사랑도 희망도 철저히 부재하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이 여리고 섬세한 감성의 핏줄을 지닌 시인은 스스로 삶의 저편을 향해 홀연 떠나버렸다. 이제 그의 시적 삶은 마감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적 삶이 마감되는 지점은 그가 노래했던 시적 주제의식이 가장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이란 본래 이 세상 속에 부재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온몸으로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림 시인의 1주기를 맞아 펴낸 이 시집은 평소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지인들의 따뜻한 마음으로 출간되었다. 오는 11월 15일, 생전에 그를 알고 그의 시를 사랑했던 서울예전 동문들을 비롯한 여러 문우들과 독자들을 초대하여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가질 예정이다.

시인의 말
1부
실업
겨울, 북한강에서 일박
밥이 내게 말한다
나는 집으로 간다
마석우리 時.1 - 나의 너에게
마석우리 時.2 - 어머니
강물은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내 마음의 신발
결빙기
......
2부
물잔디
그리운 나무
내가 여윈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겨울
손가락들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서 아프다
봄 '환절기' 여름
무인도에서 일일
떠난 집
......

시인의 말

1부
실업/겨울, 북한강에서 일박/밥이 내게 말한다/나는 집으로 간다/마석우리 詩 1-나의 너에게/마석우리 詩-어머니/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내 마음의 신발/결빙기/인사동에 묻다-1989년 3월/난지도 근처/어린 시절의 밥상 풍경/나는 공원으로 간다/폐경기, 그 이후/1999년 2월 3일, 아침 04시 40분

2부
물잔디/그리운 나무/내가 여읜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겨울/손가락들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서 아프다/봄 '환절기' 야름/무인도에서 일일/떠난 집/대체로 사는 건 싫다/지하철 묘지/허망한 뿌리는 숨죽이고/실업편/하회마을에서/4월의 단풍나무/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숨찬 기억으로 되돌아오는 것은/네가 떠나고/네가 가고 나서부터 비가 내렸다/계단의 끝은 벼랑이었다/마음 속의 나무/돌담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

3부
물레방아가 쉼없이 저를 공굴리는 지하실에서/장미꽃 밟지 않으려/이십대의 끝/침몰/정독 도서관/늙은 은행나무의 노래/느낌/시집, 그 속의 사막/고독/선인장/담배꽁초/나무가 일어난다/순환선/고릴라/水에게/예하리에서

우정의 글
최하림-그는 왜 침묵을 살아야 했을까
박형준-절실한 울림
홍용희-삶의 한가운데, 또는 그 어두운 심연

어린 시절의 밥상 풍경
아버지는 언제나 저녁을 드시고 오셨다.
보리와 고구마가 쌀보다 더 많았던 저녁밥을
밥그릇도 없이 한 양푼 가득 담아 식구들은 정신없이
숟가락질을 하다가도 조금씩 바닥이 보일라치면
큰형부터 차례로 수저를 놓았고 한두 알 남은
고구마는 언제나 막내인 내 차지였다.

이제 나는 혼자 밥을 먹는다.
(/ p.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