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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로스엔젤레스 시립도서관에서 10년간 사서생활을 하고 귀국, 번역과 소설창작 활동을 하는 저자가 이제는 고등학생, 대학생인 두 딸을 키워온 과정을 사진과 쪽지글을 곁들여 책으로 엮었다. "..가장 아픈 속살이자 서로에게 위안이고 상처이며 또한 치유일 수밖에 없는 부모와 자식됨의 숙명이 애잔한 슬픔으로 여운을 남긴다." - 소설가 오정희

출간의 변
- 거울 속에 집 짓기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적부터 적대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와 딸. 그들의 이야기는 어떠한 형태로든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많은 사건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어머니와 딸 사이에는 묘한 얽힘과 끊임없는 긴장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두 딸을 바라보는 작가 최순희. {딸이 있는 풍경}은 빛 바랜 액자에 고즈넉히 담겨 있는 딸들의 이야기다. '어찌어찌 딸을 키워라'라는 전문 실용서가 아닌 엄마와 딸의 정직한 삶의 이야기다. 또한 이 책은 아이들 입장에서 봤을 때 다소 감추고 싶은 부분도 작가의 걸출한 입담과 아이들의 익살스러운 표정 말투로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은 총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은 현재의 시점에서 기억을 되돌려 빛 바랜 사진을 한 장, 한 장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이미 자기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 만큼 커버린 아이들의 옛 모습을 회상하며 즐거웠던 기억과 가슴 아팠던 기억들을 조곤조곤 얘기한다. 결혼과 임신, 자식을 낳는 엄마의 마음, 아이들의 출산과 다들 한 번쯤 경험했음직한 딸들간의 엄마 쟁탈전까지, 순진무구한 어린 딸의 모습을 예쁘게 담아내고 있다.

다음 장은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 첫 장의 이야기들과 달리 아이들의 재미난 에피소드를 그 당시 기록해두었다가 옮긴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거침없고 당돌하면서도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학습지 한번 풀어보지 않은 딸아이의 첫 시험에 얽힌 에피소드, 성性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아이들과 그 상황에 대처해나가는 엄마의 이야기, 연예인에 대한 동경 등 꾸밈없고 솔직한 아이들의 모습은 누구의 눈에도 사랑스럽게 보인다.

마지막 장에는 아이들이 유학을 가기까지의 좌충우돌하는 모습과 유학생활,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는 결혼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큰딸과 작은딸의 유학 준비 과정에서 느꼈던 유학의 장단점과 아이들의 자아가 성립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 조카의 결혼을 보면서 느끼는 부모로서의 묘한 감정,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장의 고충까지 작가는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흑백사진 속의 어린 딸들이 이제는 선명한 자아를 지닌 성인으로 자라나는 모습, 미운 일곱 살을 거쳐 적대적 관계의 최고조인 사춘기를 겪고 이제는 엄마의 고충을 먼저 발견하는 딸들. 그 모습을 보며 산다는 것은 작가 최순희뿐만 아니라 딸을 가진 엄마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딸이 있는 풍경]은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기억 저편에 멀어져 있던 어린 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잊고 있었던 내 아이의 소중한 어린 시절을……. 이미 다 성장하여 품에서 떠나보낸 엄마들을 비롯해 미운 일곱 살의 딸로 인해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는 엄마들, 옹알이를 하는 아이의 해맑은 미소에 그저 행복하기만 한 엄마들, 혹은 언젠가 엄마가 될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이 책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산문집이자 꽤 괜찮은 실용서가 될 것이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서로의 거울 속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노력하지 않아도, 혹은 무의식중에 엄마와 딸은 너무도 많이 닮아가고 그런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엄마는 딸을, 딸은 엄마를 이해하는 관계가 된다. 상대방의 거울 속에 집을 짓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무난히 치렀다면 엄마와 딸이 아닌 여자라는 동등한 인격으로 마주 보게 된다. 그것이 곧, 엄마는 딸을, 딸은 엄마를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는 계기가 된다.

이 책은 사랑의 기록이다.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고 품을 떠나기까지의, 함께 변모하고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마침내 여성으로서의 동질감과 자매애를 획득해가는 모습이 차분하게 드러나 있다. 지나간 시간, 되돌이킬 수 없는 세월을 따뜻하게 되살려내는 것은 사랑으로 간직한 추억의 힘뿐이리라. 가장 아픈 속살이자 서로에게 위안이고 상처이며 또한 치유일 수밖에 없는 부모와 자식됨의 숙명이 애잔한 슬픔으로 여운을 남긴다.
―오정희(소설가)

작가의 말
- 엄마와 딸의 술래잡기

나는 육십년대 중반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때 일학년 일학기 국어책에 실렸던 흑백 삽화 한 장이 지금도 이따금씩 눈앞에 떠오른다. 치마 저고리를 입고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무명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엄마가 철수와 순희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술래는 엄마. 엄마는 담벼락에 두 팔을 고이고 얼굴을 묻는다. 아이들은 엄마 기척을 살피면서 비긋이 열린 대문 뒤로 살금살금 걸어가 숨는다. 이 모두를 바둑이가 꼬리를 살랑대며 지켜보는 다사로운 정경. 그런데 왜 유독 이 삽화가 일학년짜리 어린 계집애의 뇌리에 그토록 깊숙이 각인된 것일까? 혹시 그런 그림을 내가 아는 현실 속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장면이어서 그 낯섦이 어떤 광채와 신비를 동반하고 내 기억의 가장 깊은 심연에 들어가 박힌 것일까?

나의 어머니도 삽화 속 엄마처럼 늘상 빳빳하게 풀 먹인 무명 앞치마를 두르고 살았다. 그러나 마흔도 훌쩍 넘어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내 기억의 맨 처음부터도 이미 할머니였다. 막내딸이 겨우 젖을 떼자마자 홀로 된 송내댁은 척박한 서울 생활과 싸워 우리 다섯 남매들을 어떻게든 '여봐란듯이' 키워내리란 다짐으로 언제나 분주했다. 수줍고 감수성 여린 어린 날의 내겐 대차고 강인한 여장부 엄마는 자랑스럽기는커녕 서울내기 친구들 앞에 어쩐지 부끄럽기만 한 존재였다. 나는 엄마의 거친 손과 촌스런 쪽머리가 부끄러웠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와 커다란 목청이 부끄러웠으며, 어떤 흥정에서건 기어코 이기고야 마는 당찬 수완도, 또 자식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기대와 자부심도 모두 부끄러웠다. 아들딸과 술래잡기하는 엄마를 둔 국어책 속의 순희를 부러워하면서, 난 이 다음에 절대로 나의 어머니 같은 뚝뚝한 엄마는 되지 않으리라고 숱하게 다짐했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 다짐대로 된 것 같다. 한 가지 나도 몰랐던 것은 그러나, 겉모습이야 단단하든 연하든 내 속엔 내가 그토록 닮기 싫었던 내 어머니의 강렬한 피가 매우 짙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도 내가 못다 살아본 삶을 두 딸들을 통해 마저 살아보고 싶어하는 평범한 부모일 뿐. 다만 자식들에 대한 내 어머니의 기대가 그 시절의 여느 어머니들의 꿈이 대개 그러했듯 '남보란듯' 뛰어난 인물이 되어주는 것이었다면, 나는 그 방향을 안으로 돌려 구태여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할 그 무엇을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는 대신, 저들이 각기 남이 아닌 진정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자라주길 바랄 따름이다.

집을 떠나 있다가 방학에 돌아올 때마다 아이들은 부쩍부쩍 어른스러워져 있어 나를 놀래준다. 언니가 대학에 가면서 한 학기 동안 헤어져 있던 자매는 지금 거실 가득 트렁크를 펼쳐놓고 서로의 옷을 바꿔 입어보며 수선을 피우고 있다. 아이들이 자란다는 건 내가 그만큼 나이 먹어가는 거란 사실도 깜빡 잊고 입가에 흐뭇이 벙그는 웃음이라니. 첫아이가 태어나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되돌아보는 일은 망원경을 통해 원경을 눈앞에 끌어당겨 볼 때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느낌 끝엔 나도 설명할 길 없는 애잔함이 남아 고즈넉해진다.

차례
기억하라
딸이 있는 풍경 / 기억하라 / 엄만 누굴 더 사랑해? / 따돌림 / 돌멩이국 / 여름밤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 / 통과 의례 / 유년의 끝 / 열여섯 살 / 거울아, 거울아 / 이름유감

종소리
종소리 / 영이 / 신라의 달밤 / 지붕 위의 바이올린 / 가을 소나타 / 결혼식 단상 / 호박빵 굽는 시간

들어가는 글 ... 4

기억하라
딸이 있는 풍경 ... 12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 ... 68

종소리
종소리 ... 146
...
호박빵 굽는 시간 ... 214